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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론(改憲論)
서상일 제헌국회의원 / 헌법기초(起草)위원장 | 승인 2017.01.09 17:20|(202호)

다음 글은 제헌국회 시절 헌법기초(起草)위원장을 지냈던 서상일 제헌의원이 국회보 창간호(1949년 11월호)에 기고한 ‘개헌론’의 전문이다. 이 글의 주요 내용은 제헌헌법 기초 당시 권력구조가 내각제 중심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변경하는 과정 등을 설명하며 다시 내각제로 개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 안팎에서 개헌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이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서상일 제헌국회의원 / 헌법기초(起草)위원장 <글·국회보 제공>
 

                           국회보 창간호에 실린 서상일 제헌의원의 ‘개헌론’.

민의 정치적 행동은 합법적과 비합법적 두 방향이 있다. 민주주의의 국가체제에 있어서는 그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에 최고권력기관인 국회에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총집결 시킴은 국민의 정치적 동향(動向)을 합법적 방면으로 유도 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향(指向)을 민주정치라 하며 의회정치라 하는 것이다. 의회정치는 정당정치요, 정당정치는 곧 책임정치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헌정의 상도(常道)인 것이다. 국정을 운 영함에 있어서 국민의 정치적 의욕(意慾)을 조화(調和)함에 있어서든지 또는 국정을 시정하려 함에 있어서든지 그 유일 한 최선의 방법은 헌정의 상도를 확립함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정상적인 정치적 구심세력으로 발전케 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운영이 헌정 의 상도를 이탈할 시는 필연적으로 독재적 경향을 띠게 되 어 국정을 크게 그르치게 하고 필경(畢竟)에는 민족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불만과 이것을 시정하려는 국민운동(國民運動)은 가끔 비합적(非合的)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쉬운 중 대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가는 것이니 이러한 대립격화 속에서 항상정정(恒常政情)은 혼란에 빠지고 민생은 도 탄에 헤매여서 도저히 그 안정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만민균등의 부의 생활을 염원하는 민주주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니 그 정신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가장 진보적인 착상(着想)으로 되어 있으나 그 운영에 있어서는 제도상에 중요한 한 두가지 결함을 지적하지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첫째, 대통령은 국가의 책임자인 일국의 원수로서 국민신망의 의표(儀表)적 존재가 되어야 하고 정부의 책임 자는 확호(確乎)한 국책을 수립하야 국정을 추진함에는 국민에게 그 책임을 지는 강력한 책임내각제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바이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수백 년이라는 유구한 시간에 정치적 훈련을 쌓아왔고 또한 고도의 문화수준을 갖고 있는 국민이라 대통령 중심제로서 능히 순조로운 국정을 운영하여 가지만 정치의 1년생인 우리에게는 도저히 이 제도로서는 민주정치의 완벽을 기하기 어려운 것이다.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 내각책임제라 하여 정변(政 變)이 자주 일어나서 정정(政情)의 안정을 얻지 못한다고 비난하지만 합법적인 정변은 이것이 정치적 훈련이 되어 또한 정치적 진화과정인 것이다. 대통령중심제로서의 독재성 강화로 인하여 국민운동을 비합법적 방면으로 추향(趨向)케하기보다는 그 득실이 과연 어떠할 것인가!

대통령중심제에 있어서 국무회의제의 특징을 자랑하 지만 현하(現下) 우리 국정으로 보아 누가 국무회의 중심 주의를 강조하여 독재성(獨裁性)을 시정할 수 있으며 대 통령 후임(後任)에 있어서도 누구를 기대하며 신뢰할 수 있을 것이냐! 내각책임제에 있어서는 정당정치 중심으로 나가야 할 것이요, 의회세력 분야(分野)에 따라서 단독 혹은 연립내각을 구성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혹자는 1당 독재를 기우(杞憂)하며 혹자는 사 상과 정견이 대립되는 연립을 기피하는 혐(嫌)이 불무(不 無)하나 정부에 의회해산권이 있고 국회에 정부불신임 권이 있으면 국회 내에 필연적으로 양당제도가 발달되고 소당(小黨)분립은 없어지나니 영국의 실례(實例)는 이것 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바이다.

둘째, 단원제(單院制)는 세계적 추세에 한 역행(逆行) 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각계 각층(各層)에 학식과 경험이 있는 유능한 인물을 의정권(議政圈) 내에 다수 포섭하여 국론(國論)의 귀일(歸一)을 도(圖)함은 물론이오 단원(單 院)의 조잡(粗雜)한 입법성을 시정할 수 있는 신중을 기 하여야 한다.

단원이므로 하여서 정부에 법률거부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정부와 국회는 항상 마찰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 니 이를 해소(解消)하고 입법의 정상적인 궤도로 지향케 함에 있어서도 양원제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마지않는 바 이다. 더욱이 지역대표로서의 하원(下院)만으로는 학술, 경제관계의 유공(有功)자와 해외혁명가들의 정치적 참여 기회를 얻지 못해서 민주주의적 정치는 실행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현하(現下) 초비상적인 준전태세하(準戰態勢 下)의 시국에 조급한 개헌론은 자중(自重)하지 아니할 수 없으나 국가민족의 백년대계를 위하여는 애국적 양심에 서상술한 바 한 둘의 결함을 보충할 수 있는 개헌이 아니고는 우리가 상념(想念)하는 헌법의 정신을 살리고 민주 과업을 성취케 할 방도(方途)가 없다고 확신함에서이다.

더구나 나 자신은 헌법기초위원장으로서 이러한 과오를 범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객관적 조건이 만부득이함에서라 할지라도 후일의 비평에 무어라 변해(辨解)할 여지가 없음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바이며 국회의원으로서 당연히 수정해야할 중대한임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충실한 대변자 노릇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더욱이 죄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역사적인 5·10 선거(選擧)를 통하여 성립된 국회에서 작년 6월 3일 헌법기초위원회를 성립시켜 헌법 초안(草 案)의 심의를 시작하여 6월 19일 내각책임제와 양원제(兩 院制)로 할 것이 대개(大槪) 합의되었는데 제3회의 진행 도중 6월 21일에 당시 국회의장인 이승만 박사께서 헌법 기초위원회의에 출석하여 대통령중심제를 역설(力說)하 셨고 단원제(單院制)에 대해서는 조헌영(趙憲泳) 의원의 열렬한 주장으로 이 박사의 찬동과 다수 의원의 동의(同 意)를 얻어서 그날 결정되었으나 대통령중심제 문제는 난색(難色)이 있어 그날 결정하지 못하고 보류하였다.

그 공기(空氣)를 아시고 익(翌, 다음날) 22일에 별기(別 記)와 여(如, 같은)한 서찰이 위원장에게로 온 것이었으나 21일 오후에는 벌써 당시 제헌위원 중 유력한 위원 기인(幾人, 몇사람)이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기로 방침을 고쳤기 때문에 그 익(翌) 22일 회의에서는 번안동의(飜案 動議)가 성립되어 대통령중심제로 변경되고 제3독회가 종료된 것이었다.

(별기)
“헌법기초위원장 귀하
작일(昨日)에 초안(草案)에 대한 몇 조건은 보충하기 위하야 의
사를 제공한 것뿐이오. 이대로 채용해야 된다는 주장이 아니니 상 의하셔서 최선을 행하실 것뿐이오. 제(弟)1)도 그 초안의 주의(主 義)2)를 양실(諒悉)3)하는 바이니 양처위하(諒處爲荷)4) 만제배배(晩 弟拜拜)5)

그리하여 6월 23일 제17차 본회의에 전문 10장 102조 로 구성된 초안을 상정(上程)하였는데 당시 국회 공기는 감정적인 파벌적 대립과 의원들의 초보적인 정치생활에 서 대국(大局)적 고찰을 못하고 102조의 원안에 조잡(粗 雜)한 200여조의 수정안이 제기되어 격론의 나머지에 7 월 7일 제27차회의에서 제2독회를 완료하고 7월 12일 28 차 회의에서 제3독회를 종결하여 전문 10장 103조로 성안된 현행헌법을 7월 17일에 공포하여 대통령을 선거하고 대한민국을 탄생케 하여 민주국가의 법적기초를 확립 케한것이다.

국회는 국민의 최고 권력기관인 만큼 국회의원은 모름지기 자기네의 권위와 존엄을 반성, 자각하여 이 나 라의 국정을 바로잡고 이 나라의 민생을 도탄(塗炭)에 서 구하려는 순결한 심정과 강철 같은 결의로서 대동(大 同)을 위하여 소이(小異)를 버리고 국회 내에 부동의 안 정세력을 확립하여 우리들의 임기내에서 부하(賦荷)된 임무완수를 위한 역사적인 개헌의 대과업을 달성하여야 할 것이다.

1) 자신을 낮춰 부르는 호칭 2) 의도하는 바 3) 충분히 이해함 4) 어 떻게 하시겠는지요 5)이승만 올림 


서상일 (徐相日, 1887∼1962)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대구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청년단체인 대 동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다.
3·1운동에 참가했으며 일제 관서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다 투옥되기도 했다. 광복 후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립해 총무를 맡았으며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민선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1948년 5·10총선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헌법기초(起草)위원장으로 제헌헌법의 기틀을 닦았고 산 업위원장을 지냈다. 제헌국회 말기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최초로 제출했으며 1956년 진보당 창당에 참 가해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제5대국회 민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서상일 제헌국회의원 / 헌법기초(起草)위원장  jknews@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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