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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남 제우스 유화공업주식회사 회장“통일 없이 미래 없어…재산 바쳐 통일재단 만들겠다”
이채현 기자 | 승인 2016.06.07 18:11|(195호)
이창남 제우스유화주식회사 회장
영화 <국제시장>을 기억하는가. 불과 2년 전 전체 관객수 1,400만 여 명을 동원하며 역대흥행 2위의 기염을 토해낸 영화 <국제시장>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어린나이 함남 함흥에서 아버지와 헤어져 부산으로 온 덕수(황정민 분)가 아버지를 대신해 첫째로서 가족을 위해 온갖 고생을 하며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이야기다. 특별한 액션도 화려한 구성도 없는 이 영화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한국 전쟁과 그 이후를 겪어야 했던 국민 모두의 심금을 울렸다.
이창남 제우스유화공업주식회사 회장의 지나온 삶은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를 상기시킨다. 이창남 회장은 한국전쟁 당시 북녘에 어머니를 두고 와 온갖 서러움 속에서 치열하게 기업을 일구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회장에게 통일은 평생의 숙원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이제는 통일을 위해 전 재산을 바쳐 통일에 이바지고자 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이 회장의 삶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보았다.
 
6·25 당시 소련군의 학정을 등지고 38선을 넘어 필사적으로 아이를 업고 피난가는 어머니(왼쪽)와 어릴 적 이창남 회장과 그를 등에 업은 어머니 권정자 여사(오른쪽).
한국전쟁의 산증인 이창남 회장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국민 모두에게 트라우마를 안겼다. 이는 단지 산천이 부서지고 죽은 자들의 목숨을 가져간 것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은 살아있는 모든 한민족의 가족을 부셨고 이웃을 형제관계를 부시며 평생을 안고 가야 하는 큰 상처를 안겼다.
그런 시련의 역사를 그대로 겪었던 이가 바로 이창남 제우스 유화공업(주) 회장이다. 겨우 8살, 함경남도 원산 신풍리 273번지에서 태어난 이 회장은 어머니의 친정 포천에서 미처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야 했다.
어머니를 따라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본래 집인 함남 원산으로 향했다. 밤에만 움직이면서 인민군이 갔던 길을 따라 북으로 이동했다.
자칫 유엔군 폭격기에 맞을 수도, 학살을 당할 뻔한 위험도 넘겼다. 때론 인민군에게 쌀을 얻어먹기도 했으며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어머니는 인민군에게 묵묵히 음식을 해줘야 할 때도 있었다. 나무 아래마다 시체가 쌓여 있었다. 길에선 젊은이들을 잡아서 새끼줄로 치고는 어디론가 잡아갔고 중학생 정도의 어린 군인이 제 키 만한 총을 끌고 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어린 이 회장은 그때 만해도 전쟁을 그저 작은 불편쯤으로만 여겼다.
그렇게 원산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난 이 회장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다시 피난길에 오르며 비로소 전쟁을 실감했다. 북녘에 어머니를 두고 부산으로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남쪽으로 갈 피난선 자리는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탈 수 있었던 사람도 군인 가족과 국가 고위직뿐이었다. 이때 작은아버지 덕에 집안의 장남인 이 회장은 먼저 배에 탑승했으나 어머니는 시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북에 남게 된 것이다. 폭격에 불바다가 된 원산항을 뒤로하고 부산에 도착했다. 그렇게 66년. 살아계신다면 95세가 되셨을 어머니. 1달만 지나면 볼 수 있다는 약속이 영원의 시간이 됐다.
이 회장은 “제가 그때 조금만 더 어머니와 같이 가야한다고 졸랐으면 될 것을. 평생 후회가 됩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하며 몇 차례나 눈물을 흘렸다.
 
정경뉴스와 인터뷰 중 이산의 아픔에울먹이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다.
고아아닌 고아로서의 삶
 
전쟁 후의 부산은 어린 아이들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책 없이 세상에 던져진 부모 잃은 전쟁고아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생존이 삶의 목표가 되는 때였다. 이 회장은 작은아버지 가족과 함께 지냈지만 전쟁고아로 오해받아 부랑아 보호소로, 또 가덕도 섬 고아원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이 회장은 어린 아이가 아니라 몸집이 작은 사람으로서 인간 이하로의 삶을 살아야 했다.
한창 예쁨을 받을 나이, 고아아닌 고아로 살아가던 15세의 이 회장은 어머니를 다시 만나야겠다는 일념에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섬을 탈출 했고 몇 차례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머니의 고향 포천으로 갔다. 하지만 포천 역시 풍비박산 나 있었다. 38선을 넘어가려 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다. 결국 좌절감을 안고 작은 아버지 가족과 재회했다. “넌 집안의 기둥이다. 집안의 장손노릇을 해야 한다”는 가족들과 어머니의 말을 되새기며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아버지와도 연락이 닿았으나 새 가정을 꾸린 아버지에게 의지하기보다 어엿하게 독립해야겠다는 마음이 컸던 이 회장은 곧 친구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자진해 들어갔다.
 
제우스유화공업(주) 울산 온산에 위치한 제3공장 전경.
무일푼에서 강소기업을 일구다.
 
친구의 소개로 타이어 수리점에 취직한 이 회장은 이내 독립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도 북녘에 두고 온 어머니는 이 회장 가슴에 남아있는 멍울이었다. 첫 월급 받은 날 어머니를 위해 산 내복을 두고 밤새 울던 이 회장은 언젠가 이 내복을 어머니께 꼭 전해 드리리라 다짐했다.
이후 타이어 방에서 일하던 이 회장은 우연한 기회에 엔진오일을 파는 일을 하게 됐고 어느덧 윤활유 중개상이 되었다. 기회는 행동하는 자의 몫이었다. 시기를 잘 만나 윤활유 중개업이 안정될 즈음 모든 유류가 배급제로 바뀌었고 엔진오일이 시중에 딸리게 되면서 장사가 잘 됐다. 이것이 현재 이 회장이 운영하는 제우스유화공업(주)의 발판이 됐다. 이후 이 회장은 좌판장사부터 시작해 1964년 극동기업사라는 5평 남짓의 점포를 차렸다. 이는 후에 1978년 제우스유화공업(과거 유성정유공업사)의 모태가 됐다.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름도 귀하고 데모도 많던 시기, 소방서나 관청에서는 위험물질이라며 빼앗다시피 기름을 마구 수거해 가기도 했다.
“요즘 같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딱히 정당한 이유가 필요하거나 정의가 실현되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정사정하면서 기름을 되찾아오기도 했습니다.”라고 이회장은 회상한다.
또 당시는 부도가 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이 회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수차례의 부도와 고비 속에서 이 회장은 긍정하고 또 긍정했다. 실패로 성공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며 언젠가 자신을 대견해 하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사업가로 성장할 꿈을 갖았다.
 
제우스유화공업(주)이 획득한 특허청 제품인증서
35년 윤활유 시장 역사 제우스유화공업(주)
 
현재 제우스유화공업(주)은 창사 이래 35년간 한국 윤활유 시장의 역사를 함께하며 시장을 선도해 온 윤활유 전문 회사다. 제우스유화공업(주)의 성공비결은 끊임없는 연구와 틈새시장 공략에 있다. 결과 자동차, 철강, 금속 뿐 아니라 전력, 발전, 인쇄, 조선, 섬유, 화장품, 고무 등 모든 산업 전반에 걸쳐 제우스유화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
결과 제우스유화공업은 많지 않은 수의 직원을 가지고 있지만 연매출 230억 원을 이루고 있는 강소기업이 됐다. 생산 공장 역시 부산에 있는 본사 외에도 인천, 울산 총 세 곳에 두고 있다. 현재 제우스유화공업은 자체적으로 연구원을 두면서 여러 가지 특허를 내면서 품질향상에 역량을 기울이고 있으며 2015년부터는 동압연유, Sus압 연유, 철강압연유 등도 판매를 개시했다. 장남 이선도 씨 역시 가업을 잇기 위해 성대 화학공학 박사를 취득, 임원역할을 성실히 수행중이다.
 
이창남 회장의 아내인 장명화 여사(가운데) 고희연에 참석한 대가족 모임 ‘신풍회’ 기념 촬영.
잊혀지지 않는 고향, 그리고 어머니
 
8살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사업을 꾸리고 74세가 됐음에도 고향 원산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옅어지지 않았다. 이 회장은 조금이라도 고향땅에 대한 소식을 듣기 위해 평양도 두 차례나 방문하고 금강산, 백두산도 수차례 방문했다.
명절 때마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썼던 편지와 일기가 <못 가는 편지 못 잊는 사모곡>, <어머님 전상서>라는 책으로 나올 만큼 간절했건만 들은 소식이라고는 의동생 채용걸 씨에게서 들은 고향 소식뿐이었다. 채 씨는 “이 회장의 고향 원산에 가보았으나 아파트와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 적어준 곳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또다시 실망한 사이 2000년 기쁜 소식이 찾아왔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으로 직접 가 6·15 남북 공동선언을 이끌어내며 통일의 물꼬를 튼 듯 했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정치적으로 풀기에는 너무 많은 이념적 격차가 있었다. 일단 통일 과정에 대한 의견이 달랐고 이내 북한의 잇단 핵실험 등으로 남북관계가 더없이 악화 된 것이다.
 
‘통일에 앞장선 사람에게 상을 주고 싶다’
 
이창남 회장은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 500마리를 몰고 자신의 고향인 북한 강원도 통천으로 향하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이 회장 역시 같은 꿈을 품고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이 회장은 ‘남북이 다시 화해할 수 있다. 휴전선을 무너뜨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김구 선생이 첫 번째 소원도, 두 번째 소원도 대한독립 이였듯 이 회장에게 남북통일은 평생의 소원이다.
74세의 나이. 이 회장에게 남은 바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 회장은 인터뷰에서 “이제 저는 어린 아이도, 경제력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평생 생존 하나만을 위해 뛰어왔기에 저를 대신해 통일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만나면 큰 빚을 진 듯 한 마음이 듭니다.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떠들었지만 정작 제가 통일을 위해 한 일을 되돌아보면 무엇 하나 결실을 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실천을 하려고 합니다.”라며 그 동기를 털어놨다.
이 회장은 통일재단을 만들고 그 재단을 통해 숨은 공로자를 발굴해 통일 인물상을 주고자 한다. “저는 정치, 이념 이런 것에 대해 잘 모릅니다. 소련 공산주의 붕괴를 가져온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는 언론과 학자, 문인들이 연결된 글라스노스트(정보공개) 정책이 주요했다고 합니다. 우리 남북문제도 정치인들보다는 언론인과 문화 예술인들이 앞장서야 일이 좀 더 수월하게 풀리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라는 것이 재단 설립의 이유다.
 
평생 소원인 남북통일을 위해 통일재단을 만들 이창남 회장이 소유한 땅이 인천아시아 주경기장 부근에 5,000여 평의 땅을 확보하고 있다. (사진은 항공촬영 장면.)
통일 위해 남은 인생·전 재산 바치겠다
 
이 회장은 남은 인생과 인천에 있는 100억 원 가치의 부동산을 한반도 평화통일재단을 만드는데 투자하고자 한다. 이에 남·북 각각 통일 분위기 조성에 기여한 단체를 발굴해 상과 함께 각각 상금 1억원을 수여하고자 한다. 이 회장이 상을 주려는 단체나 인물은 북한 주민에게 쌀을 기부한다거나 양말을 준다거나 하는 차원과는 조금 다르다. 정부는 아니지만 그야말로 ‘통일’ 자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대상에게 수여할 예정이다. 또한 이런 단체는 남한이나 북한 정부로부터 승인을 얻은 단체여야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게 해야 단체의 우호적인 교류와 좋은 기운이 정부로까지 전해져 통일의 물꼬를 틀 것이라는 것이 이 회장의 생각이다. 현재 이 회장은 재단 설립의 기틀을 기획하는 동시에 통일 인물상 1회 차로 줄 대상을 물색 중이다.
또한 통일 분위기 조성에 언론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회장은 인천부지에 ‘한반도 남북통일재단(가칭)’을 설립하여 소유케 하고 ‘한국언론인연합회’(회장 최재영)와 공동으로 활용하여 통일의 발판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성공하는 자는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만 실패하는 자는 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아낸다’는 것이 저의 기업 사훈입니다. 앞으로 갈 길이 멀겠지만 저의 사훈과 같은 마음으로 결국 통일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여생과 통일한국을 맞바꿀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서로 갈라져 싸우는 민족에 미래는 없다
 
이 회장은 통일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상황에 대해 “한국전쟁 1세대가 거의 세상을 뜬 지금 젊은 세대중에는 통일이 간절하지 않은 사람도 분명 존재 할 것입니다. 통일이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일궈놓은 모든 것을 퇴보시킬 것이라는 막연한 염려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며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통일을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통일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높은 수치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이 늦어질 수 록 우리의 성장력은 둔화할 것입니다. 남북 긴장 완화, 기대되는 세계의 주목, 규모의 이론에 따른 경제적 시너지, 화합과 평화의 분위기가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줄 것입니다. 통일을 하지 않은 한국은 미래가 없습니다”고 확언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 <연금술사>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가 도와준다’. 이창남 회장에게 통일은 전 생애 전반에 걸친 숙원이다. 2015년 기준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에 등록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 여명 중 사망자 수가 6만 명을 넘었고 매년 3800여 명의 이산가족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통일은 선택이 아니다.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하는 것이다. 이창남 회장의 간절한 소망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이채현 기자  redjoker@m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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