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의 상징, 에펠탑을 중심으로 한 야경

파리는 겨울이지만 눈 대신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유럽 특유의 음습한 추위가 파고들었지만, 미국 동부지역에서 경험하게 되는 살을 파고드는 강추위와는 달리 비교적 온화한 날씨였다. 인구 220만 명, 서울의 1/6 크기에 해당하는 이 작은 도시에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오가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흡사 뉴욕과도 비슷하지만 무뚝뚝한 뉴욕커들보다는 파리인들만의 여유와 정감이 묻어났다. 영어로 길을 물어보면 아무리 자기 영어가 어설프고 갈 길이 바빠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함께 가주거나 차근히 설명하며 길을 알려주는 파리인들의 친절함은 7년 전에 방문했던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프랑스혁명과 함께 계몽주의를 주창해 오면서 서구 근현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쳐왔고, 항상 진보적이고 인간미가 넘치는 것 같은 이미지의 프랑스도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일견 인종차별이 없었을 것 같은 프랑스에서도 18세기에는 노예제도가 크게 성행했다.

프랑스는 이처럼 겉으로는 사상적으로 인간의 권리와 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도 안으로는 남태평양과 카리브해, 아프리카의 식민 국가들로부터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해 부국이 된 유럽의 대표적인 제국주의 국가였다. 하지만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극단적인 빈부 차이로 인한 양극화 현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로 끊임없이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미국에 비해 프랑스는 다양한 인종의 사회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면서도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유럽식 사회주의 교육제도를 통해 엘리트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되도록 많은 이들이 평등한 배움의 기회를 누리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렴한 학비와 우수 교수진

▲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파리 에꼴 노르말 음악원

가장 먼저 방문한 파리 에꼴 노르말 음악원(Ecole Normale de Musique de Paris)은 1919년 프랑스의 저명한 클래식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였던 알프레드 꼬르또가 세운 음악원으로서 국내에서도 우수한 클래식 음악 재원들이 유학을 가는 사립학교로 유명하다. 대중가요에 클래식을 접목한 ‘베이시스’라는 그룹으로 이름을 알리고 현재는 영화음악가, 연예인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정재형이 클래식 피아노와 영화음악 작곡을 전공한 학교로도 알려져 있다.

이 학교는 오디션을 보면 학년을 교수들이 정해 주고 입학요건에 있어서는 크게 까다롭지 않지만 정부지원 없이 자기 돈 내고 자기가 배우라는 취지에서 학비가 1년에 2,300 유로(한화 309만 원) 정도로 다른 음악원들에 비해 두 배 이상 비싸다. 에꼴 노르말 음악원은 세계적인 클래식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도 교수진이었을 만큼 훌륭한 교수진을 자랑하는데, 프랑스는 음악이론을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지 않으면 졸업하기가 극히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0% 불어로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많은 한국 학생들, 특히 과묵한 남학생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고 한다. 한편 프랑스의 많은 유명 음악학교들의 입학요건 중에는 나이 제한이 있는데, 에꼴 노르말 음악원에는 나이제한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 파리의 대중음악 전문 교육학교, 아틀라

다음으로 방문한 학교는 아틀라(ATLA; l'cole des musiques actuelles)로 역시 사립음악학교다. 이곳은 클래식 전문학교인 에꼴 노르말 음악원과는 달리 재즈나 팝, 락, 재즈, 월드 뮤직, 영화음악 등 컨템포러리 음악을 교육하는 음악학교로서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드럼, 보컬 등의 대중음악 악기과정과 컴퓨터 음악과 작곡 등을 가르치고 있었다. 프랑스 음악학교가 다 그렇듯이 학교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개인이 설립한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학비가 다소 비싸다. 영화음악과 같은 경우 2달 과정에 4,500 유로(한화 약 605만 원)를 받는다니 미국 학교들 못지않은 수업료다. 역시 불어로만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불어가 필수조건이며 입학처에서조차 직원들과 아예 영어로는 대화가 거의 안 되어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직원이 오는 다음날 다시 오라는 이야기까지 들어야 했다. 학교를 돌아보면서 지하에서 학생들이 컴퓨터를 이용한 작곡 수업을 받는 모습과 밴드가 모여서 블루스 연주를 연습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CRR(Conservatoire rayonnement regional d'Aubervilliers) 93은 우리말로 하자면 ‘오베르빌리에 93 지역 국립음악원’으로서 파리 북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새로 지은 현대적인 디자인의 건물이 인상적이었는데, 음악대학이면서도 우리나라에서 초중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도 음악교육을 받고 있었다. 마침 기회가 되서 월드 뮤직 리듬을 가르치시는 베이스 교수님의 수업을 참관할 수 있었는데, 1:1 개인 레슨식 수업으로 자상하게 학생을 지도해 주시고 필자에게도 같이 연주할 기회를 주셨다. 앞서의 사립학교들과는 달리 국립학교로 연 학비가 800 유로(한화 약 107만 원) 정도로 저렴하고 프랑스 음악원들은 동네마다 거의 하나씩 있어서 학생을 많이 받지 않기 때문에 총 학생이 다 합쳐야 20~30명 내외인 것이 특징이었다. 1년에 36,000 달러(한화 약 4천만 원)가 넘는 학비를 받으며 수천에서 수만 명까지 학생이 넘치는 보스턴의 사립대학교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 파리 남부 아뀔-까샹 지역의 파리 국립음악원

파리 남부 외곽의 로마시대 상수로와 같은 모양의 거대한 아치형 수로를 가운데 놓은 두 개의 마을, 아뀔-까샹(Acueil- Cachan)지역의 경계에 위치한 파리 국립음악원(Conservatoire National de Musique)은, 오래된 역사의 고성과 같은 스타일의 아담한 건물이 멋스러웠다. 재즈와 클래식 음악교육을 병행하는 국립학교이며 저렴한 학비로 재즈음악을 전공하고 있는 몇몇의 한국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훌륭한 교수진과 함께 수년간 개인 지도 선생님 밑에서 집중적으로 배우는 시스템이 장점이었지만, 매 학기마다 치러지는 시험에서 교수진들의 만장일치 심사통과를 받아야하기 때문에 졸업이 결코 쉽지 않다고들 했다. 하지만 1,000 유로(한화 약 134만 원)정도의 저렴한 학비로 다른 유수의 파리 음악원들에 출강하는 뛰어난 교수진들에게서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학생이 졸업하고 들어갈 자리만 난다면 유학자금 문제로 고민하는 유학생들에게 이러한 국립음악원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이 된다.

▲ 파리 아메리칸 아카데미에서 작업 중인 학생들.

마지막으로 방문한 패션전문 교육기관인 파리 아메리칸 아카데미(Paris American Academy) 역시 졸업하면 3년 과정의 학사 과정과 동일한 자격이 주어지는 사립학교로서 패션 디자인보다는 주로 옷을 직접 만드는 과정에 주력하고 있다. 물론 패션 디자인 과정과 비즈니스 과정, 순수미술 과정 등을 수강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학비는 에스모드와 비슷할 정도로 비싼데, 1년에 12,500 유로(한화 1,680만 원) 정도이다. 다른 학교와는 달리 불어뿐 아니라 영어로도 진행되는 수업들이 있다는 장점이 있어 영어에 훨씬 더 익숙한 한국인 유학생들한테는 유리한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급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을 적용하는 에스모드와는 달리 파리 아메리칸 아카데미는 직접 손으로 하나하나 재료가 되는 천을 초크질 없이 바늘로 고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벽에 전시된 학생들의 작품들을 보니 더 자연스럽고 실용적인 옷을 만들 수 있게 하는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미국 서부 L.A.에서 공부하러 온 학생이 작업을 하고 있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미국 내 최고의 패션 도시인 뉴욕보다는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파리의 최신 패션 스타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장점이라고 했다.

프랑스 유학의 가장 큰 난관, 불어

프랑스는 이처럼 비교적 저렴한 학비와 함께 미국과는 달리 유학생도 학비와 생활비 조달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허용하고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오랜 역사를 통한 훌륭한 문화적 자산의 바탕 위에 국가 및 사회의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저변 아래서 유학생들이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유학생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문제, 즉 불어다. 한국인들은 한국전쟁 이후 주로 미국의 영향 하에서 미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왔다. 정서상으로는 한국은 역사와 전통, 휴머니티, 감수성, 미묘한 뉘앙스, 다양한 음식문화가 살아 있는 유럽문화에 더 가깝지만 성장하면서 자주 접하게 되는 헐리웃 영화들과 드라마, 미국식 패스트푸드, 미국의 팝/재즈 음악 등이 더 친숙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교육과정에서도 영어는 완전 의무교육이지만 불어는 제2 외국어로서 선택사항인 것만 봐도 한국인들에게 불어는 생소하고, 또 생활언어와 학문을 위해 익히는 것은 생각보다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리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영어는 웃고 들어가서 울고 나오지만 불어는 울고 들어가서 웃고 나온다’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 많이 공부하는 미국 영어는 구어체 어법의 변형이나 유희가 심하다. 또 영어는 영국의 역사를 놓고 볼 때도 여러 국가의 침략으로 다양한 문화의 혼재와 더불어 너무 유연성이 좋다보니 매년 새로 생기는 단어가 있을만큼 끝도 없는 어휘 확장으로 점점 더 어려워지는 반면, 불어는 고어인 라틴 어에 바탕하고 있어 안정적인 언어이고 매일 일정 시간 반복하면서 익숙해지고 나면 점점 언어구사가 수월해지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프랑스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어학원을 6개월에서 1년 과정으로 등록한 뒤 입학허가서와 비자신청 서류를 작성한 뒤 한국에서 학생비자를 받고 가야 한다. 어학원 비용은 천차만별이지만 저렴한 경우 1년에 3,000 유로(한화 약 400만 원)가량 든다고 한다. 어학원 등록 후 2년 안에 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면 정부에서 외국인 추방 통지서가 오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생활비 역시 천차만별이지만 물가는 한국의 두 배 정도 되는 미국과는 약간 더 비싸거나 비슷한 수준이고, 집세는 혼자 사는 스튜디오(우리나라에서 흔히 ‘원룸’으로 부르는 주방이 딸린 개인실) 기준으로 최저가 700 유로 내외이며,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경우 유학생도 200~250 유로 정도의 국가지원이 주어져서 실재 부담금은 대략 500 유로(한화 약 67만 원) 정도이다. 물론 한국의 물가에 비하면 비싸지만 학생신분으로 일을 하면 비싼 유럽의 물가만큼 인건비 역시 비싸기 때문에 부지런히 생활하면 학비와 생활비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

파리의 대표적인 명소인 루브르 박물관의 앞마당에는 화려한 유리 피라미드 옆에 말을 타고 있는 한 영웅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스스로 ‘태양’ 역을 맡은 세계최초의 발레리노가 되어 태양왕으로서 자신의 어린 시절 반란을 일으켰던 신하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전 세계의 예술가들을 초대해 파리를 세계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예술의 도시로 탈바꿈시킨 매력적인 절대군주, 루이 14세다. 그는 예술이 가진 정신의 힘을 알고 그것을 가장 세련되게 정치에 이용한 아티스트였다.

라파예트 백화점의 눈부시게 화려한 명품가게들, 로마 시대 이후 파리의 시작이 된 시떼섬 루브르 박물관의 끝도 없는 예술 작픔들의 향연, 1,000여 년 전 파리의 시작이 된 세느강의 시떼섬 위에 고고하게 서있는 노틀담 성당의 웅장함, <오페라의 유령>의 무대가 된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의 황금빛 위엄, 영화 <풍네프의 연인들>의 배경이 되기도 한 500년 역사의 퐁네프 다리의 낭만과 유럽의 모든 왕실을 압도하고도 남는 베르사유 궁전의 탐미적 스케일, 며칠을 대강 훑어만 봐도 몸살이 난다는 루브르 박물관의 끝도 없는 세계유물의 향연,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빛의 마술사들인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 밤이면 더욱 자태를 뽐내는 에펠탑과 프랑스 군대의 승리를 상징하는 샹젤리제 거리의 개선문이 아니더라도, 파리는 수세기에 걸친 역사적 가치만으로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는 도시다.

‘후기 산업사회’라는 용어를 만들고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의 세계를 강도 높게 비판해 온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이자 세계적인 석학인 알랭 투렌(Alain Touraine)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명예 교수는 “삶의 질로 말하자면 파리가 뉴욕보다 다섯 배는 나을 것이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그만큼 이곳의 지성들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파리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경험할 수 있는 멋진 도시라는 인상이 들었다.

한국의 유학 지망생들이 파리를 선택한다면 인문학, 건축, 음악, 영화, 미술, 패션, 사진 등 다양한 방면에서 저렴한 학비로 학문을 갈고 닦을 수 있음과 동시에 중세 유럽문화 최대의 수도가 전해주는 깊이와 영감을 마음껏 흡수하며 각 분야의 세계적인 인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진호 특파원  mjknews@m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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