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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의 올바른 이해국군의 날 특집 ④ 국방정책… 전문가가 본 허와 실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전 국정원 1차장 | 승인 2014.10.13 17:54|(175호)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됐을 때 우리는 독일 국민들보다 더 기뻐하고 환호했다. 우리의 통일도 멀지 않았겠구나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 때의 환희와 감격은 사라지고 우리 사회에는 통일기피 심리가 널리 퍼져가고 있다.

독일통일은 20세기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독일통일을 보면서 통일의 의지를 다지기보다는 통일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어서 올바른 대북/통일의식 정립을 위해서는 독일통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 동서독 분단 경계지점이었던 파리저광장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은 현재 독일의 상징물과 같아서 전 세계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독일의 통일 여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시까지 동독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독은 세계 11대 공업국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9,700달러에 달하는 공산권 최고의 선진복지 국가로 인식돼 왔기 때문이다. 서독인들의 통일의식도 매우 미약했다. 서독 기본법에는 통일을 헌법적 의무로 규정하고 있었으나 서독 사람들은 사실상 통일을 포기하고 유럽통합에 더 관심을 가졌다. 국민들의 통일의식도 매우 미약했다, 1988년 통일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 국민은 0.5%, 통일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3%에 불과했다.
 
통일에 대한 동·서독의 입장도 달랐다. 서독은 통일을 헌법적 의무로 규정하고 있었지만, 동독은 서독과는 별개인 ‘사회주의 독일’건설이 국가목표였다. 교류·협력을 보는 입장도 달랐다. 서독은 분단을 이어주는 ‘다리’로 생각했으나 동독은 분단을 공고히 하는 ‘벽돌’이라 생각했다.
 
더욱이 독일은 1952년 독일조약에 따라 통일시에는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영국, 소련이 독일통일에 동의할 가능성은 없었다. 따라서 통일을 바라는 것은 ‘평생의 망상’이라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언급은 만고의 진리처럼 여겨졌다.
 
   
▲ 지난 2009년 11월, 독일 통일 20주년 기념 행사에서 독일 국민들이 기뻐하고 있다.
독일통일의 과정
 
독일통일은 동독 주민의 시위로 동독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자유선거에서 체제선택의 기회를 갖게 된 동독주민들이 서독에의 편입을 선택했으며, 서독 정부가 기민한 외교로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를 받아 냄으로써 가능해졌다.
 
독일통일 과정은 1989년 5월 헝가리 개혁정부가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 철조망을 제거한 것으로 시작됐다. 헝가리 여행이 자유로웠던 동독인들이 헝가리를 통해 매일 2천 명씩 서독으로 탈출했다. 이때 탈출한 동독인의 평균 연령은 27세로 대부분 기능 보유자여서 동독사회가 마비되기 시작했고 동독주민들은 탈출열풍에 휩싸였다.
 
이 와중에 10월 7일 동독 공산정권 창설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동독의 개혁을 공개적으로 촉구하고, 시위의 유혈진압을 반대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의 촛불시위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결국 10월 18일 호네커가 사임하고 에곤 크렌츠가 서기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시위는 더욱 확산됐고 11월 9일 여행규제 완화계획을 발표하던 공보담당 정치국원 샤보프스키가 “이제부터 장벽을 개방한다”고 잘못 발표함으로써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 후 8개월 동안 58만 명의 동독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하고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주민들이 자유선거의 기회를 갖게 됐다. 1990년 3월 18일 실시된 인민의회 의원 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독일연맹’이 승리했고, 4월 12일 출범한 로타 드메지에르 정부가 서독과의 협상을 통해 7월 1일 화폐·경제·사회통합조약을 발효시키고 8월 30일 통일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0월 3일 통일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서독정부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영국, 소련을 설득하는 한편, 2+4회담을 통해 전승 4대국의 동의를 받아내 통일이 가능해졌다. 통일 후에는 서독법을 동독 지역에 적용하고 동독의 행정체제를 신속히 서독체제로 개편함으로써 체제통합이 이루어졌다.
 
독일통일의 성공 배경
 
독일통일이 성공한 직접적 요인으로는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과 동유럽 포기, 동유럽의 민주화 열풍, 동독경제의 파탄, 콜 서독총리의 과감한 노력과 적절한 조치, 미국의 적극적 지원 등이 지적될 수 있다. 특히 콜 총리는 미국의 요구조건인 통일독일의 NATO 잔류와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의 인정을 초기부터 수락하고 기민한 외교를 펼쳐 2차 대전전승 4대국의 동의를 얻어 냈다.
 
장기적 요인으로는 서독이 동독주민의 동경대상이 된 점, 기본법 제23조(영토조항)와 제116조(국적조항), 친미·친서방 정책의 유지, 대가 없는 대동독 지원불가 방침 등 원칙을 고수한 서독의 정책, 철저한 과거 청산을 통한 주변국의 신뢰확보, 동독주민의 서독 TV시청이 가능했다는 점 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잘못 알려진 독일통일
 
우리는 독일통일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무척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음 일곱 가지가 지적될 수 있다.
 
①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독일통일의 원동력이다?
 
우리는 브란트의 동방정책,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이 독일통일의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동독과 화해·협력하고 동독의 안정을 도우면 동독 공산정권이 변해서 언젠가는 통일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정책이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동·서독 간의 교류협력을 확대시켜 분단의 고통 완화와 민족의 동질성 유지에 기여했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독일통일은 서독의 ‘접근’으로 동독 공산정권이 ‘변해서’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동독주민의 시위로 동독 공산정권이 ‘망해서’ 통일이 된 것이다. 그리고 동독시위는 사민당이 철저히 외면한 동독 민주인사들의 주도로 성공했다.
 
교류·협력 확대로 동독주민들이 서독의 발전된 모습을 보게 된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런 논리로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에서 탈공산화 혁명이 먼저 성공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더욱이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사민당 주장대로 동독 탈출자의 수용을 제한하고 동독에 대규모 경제지원을 하면서 국가연합방식의 통일을 추진했다면 통일은 불가능했거나 훨씬 지연됐을 가능성이 많다.
 
1년 후 고르바초프가 실각하고 소연방이 15개 나라로 해체되어 통일을 위해서는 이들 나라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화해협력 정책이 독일통일에 미친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볼 수 있다.
 
②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기민당의 ‘힘의 우위’ 노선
 
우리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역할은 과대평가한 반면, 독일통일이 서독 기민당이 ‘자석이론’에 따라 추진한 ‘힘의 우위’노선이 거둔 성과라는 점은 전혀 알지 못하고 지내왔다. 기민당의 ‘힘의 우위 정책’은 서독이 정치, 경제, 군사, 도덕적으로 우위에 서면 자석에 쇠붙이가 끌려오듯이 동독이 이끌려와 통일이 된다는 이른바 ‘자석이론’에 바탕을 둔 정책이다.
 
그리고 기민당 정부가 이 노선에 따라 추진한 친서방·친미 정책과 서독을 동독주민의 동경대상으로 만든 것이 통일의 원동력이 됐다. 또 고르바초프가 술회한 것처럼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과 소련의 변화에는 레이건 행정부 이후 미국이 추진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화해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독일통일은 화해·협력 정책 때문이 아니라 ‘힘의 우위’정책이 거둔 결실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③ 독일통일은 하늘이 준 선물이다?
 
우리는 독일통일이 소련의 변화로 가능해졌다고만 생각했지 콜 정부가 추진한 과감한 노력과 미국의 적극적 지원이 독일통일의 가장 핵심적 요인이라는 점은 거의 주목하지 못하고 지내왔다. 콜 정부는 1989년 8월 헝가리 정부와의 비밀교섭을 통해 10억 마르크의 차관제공을 약속하고 헝가리 정부가 동독과의 여행협정을 파기토록 하여 동독주민의 대량탈출이 가능해졌다. 콜 총리는 서독 정치인들이 ‘민족, 국가, 통일’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는 것도 꺼리던 시절에 베를린장벽 붕괴 3주 후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해 통일의지를 분명히 했다.
 
베를린장벽 동독탈출민을 모두 수용함으로써 동독인들의 ‘발로 이룬 혁명’이 가능토록 했다. 동독 자유선거 10일 전까지도 동독주민들이 통일을 주저하자 1:4 이상의 가치차이가 있던 동서독 화폐의 교환비율을 1:1로 결정해, 동독인의 통일열기를 부추겼다. 콜 총리는 사민당이 화해·협력기조의 손상을 우려해, 동독탈출자의 수용 제한, 대규모 경제지원 및 국가연합 방식의 통일을 주장하자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동독주민의 좌절과 불만을 통일 에너지로 전환시켜 나갔다.
 
우리는 독일이 ‘돈으로 통일을 샀다’고만 생각했지 소련이 독일통일을 막으려고 필사적 노력을 하다가 결국 서방의 압력에 밀려 독일통일을 수용했다는 점은 전혀 알지 못하고 지내왔다. 이렇게 볼 때 독일통일은 하늘이 준 선물이 아니라 콜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④ 서독은 동독에 적극적 경제지원을 했다?
 
우리 사회에는 서독이 대규모 경제지원으로 동독주민의 마음을 샀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해졌다면서 우리도 북한의 경제발전을 적극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전된 연평균 20억 1,400 달러의 금품 가운데 77%는 서독 주민과 교회가 동독 친지와 교회에 직접 보내준 물품들이다.
 
서독 정부가 동독에 지불한 3억 1,600만 달러(전체의 15.7%)는 우편·철도 사용료 정산금, 통과여행 일괄지불금, 정치범 석방 대가, 서베를린 쓰레기 처리비 등 동독이 제공한 서비스에 대한 반대급부들이다. 서독이 동독 고속도로 건설비를 두 번 지원해 준 것도 서독인의 서베를린 여행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83년과 1984년 동독에 제공한 19억 5천만 마르크의 차관은 통과여행 일괄지불금을 담보로 서독은행 컨소시엄이 제공한 5년 만기 상업차관이었다. 그리고 무상지원은 한 푼도 없었다. 더욱이 서독은 동독에 대한 경제지원이 동독 공산정권 강화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항상 경계하면서 경제관계를 유지했다.
 
⑤ 독일 사람들은 통일비용 부담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 사회는 독일통일 후유증 때문에 통일기피 심리가 널리 퍼져 있다. 독일이 통일 후 15년간 GDP의 4~5%, 연방예산의 25%, 총 1조 4천억 유로(2,540억 원)의 통일비용을 지출해 재정적자 확대, 성장 둔화, 실업증가로 어려움을 겪었고 ‘유럽의 병자’라는 조롱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독일은 2006년부터 통일후유증을 완전히 극복해, 지금은 ‘유럽의 엔진’ 또는 ‘유럽의 지갑’으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더욱이 독일은 통일비용의 70% 이상을 재정차입으로 조달해, 각 가정의 통일비용 부담은 소득의 2~3%에 불과했다. 따라서 통일비용 부담이 힘겨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독일은 통일비용 조달과정에서 선진병을 완전히 극복해 이제부터는 통일의 혜택을 영원히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⑥ 독일통일은 우리의 반면교사이다?
 
우리 사회는 독일정부가 통일 후 여러 가지 실책을 저질러 통일후유증이 증폭됐으므로 우리는 독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후유증 없는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공사례로서가 아니라 실패사례로서의 독일통일에서 교훈을 얻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독일정부의 ‘실책’은 실책이 아니라 신중하게 선택한 차선책들이다.
 
화폐교환 비율을 1:1로 책정한 것은 동독주민의 통일열기를 부추기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몰수재산 처리에 반환우선 원칙을 적용한 것은 사유재산권을 존중하지 않으면 통일조약이 위헌판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헌법재판관들의 조언 때문이다.
 
경쟁력 없는 동독기업을 보조금으로 유지하지 않고 폐쇄한 것은 잘한 조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반면, 우리는 미흡한 세금인상, 주택부문 과도투자, 단기간의 서독제도 이식 등 독일정부가 저지른 ‘진짜 실책’에는 전혀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⑦ 우리는 독일보다 훨씬 심각한 통일후유증을 겪는다?
 
우리는 남북 간의 적대감, 인구격차는 작은데, 소득격차는 동·서독보다 훨씬 크다는 점 등 때문에 우리가 독일보다 훨씬 심각한 통일후유증을 겪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독일보다 사정이 훨씬 좋은 것들도 많다. 독일은 동독 국유재산 매각 대금이 2,564억 마르크(154조 원)의 적자를 기록해, 통일비용 조달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동독 지역은 통일 후 소연방 붕괴로 기존시장을 모두 잃어 경제가 급속히 붕괴됐다. 또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 인접국들의 투자여건이 훨씬 좋아 동독 지역이 투자유치에 실패해, 경제회생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 국유재산과 지하자원이 통일비용 조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고, 투자유치 경쟁대상국이 없으며 중국, 일본 등 거대시장이 있어 투자유치에 유리하다.
 
또 통일 초기 고용효과가 큰 관광산업 여건이 좋고, 독일에 비해 사회복지 수준이 높지 않아 사회보장비 지출이 적다. 그리고 우리 국민의 역동성의 이점이 있어 북한경제 재건전망을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제라도 독일통일을 바로 알기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외에도 동서독 정상회담의 성과, 서독의 동독인권 문제처리방법, 동독의 방송개방 배경, 2+4회담의 역할 등 우리가 독일통일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열 가지 정도는 더 있다. 소수의 인원이 오랜 시간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고, 다수의 사람이 잠시 동안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우리가 20년이 넘도록 집단오류에 빠져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독일통일 초기, 독일통일의 내막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시기에 봇물처럼 조사단을 보내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이 화근의 씨앗이 아닐까 싶다. 이제라도 독일통일 바로 알기 노력을 다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전 국정원 1차장  mjknews@m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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