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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회고와 교훈’
정경NEWS | 승인 2014.05.14 14:13|(170호)

 

   
▲ 윤영미
평택대 외교안보 전공교수
1961년 집권한 케네디(F. Kennedy) 대통령은 남베트남에서 베트콩 활동에 대한 확고한 제재를 가했다. 1963년까지 약 17,000명의 미군사고문단이 월남에 파송되었지만 500명이 희생됐다. 미국은 부패한 디엠정권에게 경제원조도 감행했지만 남베트남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막을 수 없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 중반까지 한미관계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북한의 위협, 한미동맹의 위기관리(Crisis Management)와 재조정이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한국군의 참전 과정
1963년 11월, 남베트남의 디엠정권 붕괴 이후 북베트남은 장기전 태세를 갖추면서 정규군을 남쪽으로 보냈다. 미국의 맥나마라(McNamara) 국방장관은 12월 중순 2~3개월 이내에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남베트남은 공산주의자의 통제하에 놓일 것이라는 우려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미국 내에서는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의 공세를 봉쇄하기 위해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압력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제기됐다. 케네디 사후 집권한 존슨(L. Johnson) 대통령은 1964년 8월 초 미국의 구축함 매독스호가 베트콩의 공습을 받아 공격명령을 내렸다는 ‘통킹만 사건’을 발표했다. 사실상 전쟁 포고였다.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도미노 현상처럼 공산화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군사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우방국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른바 ‘자유세계원조계획’ 또는 ‘보다 많은 국기 프로그램’(More Flags Program)으로 불리는 정책에 입각해서 국제사회에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 과정을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미국은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의 동맹국 대상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SEATO는 1954년 9월 초,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대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영국, 뉴질랜드, 미국 등 8개국에 의해 조직된 반공군사동맹이었다. 이 기구는 NATO와 같은 강력한 군사동맹체제가 아니었다. 회원국들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인식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지 못했다. 미국을 제외하고 타이,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3국만이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다. 이어 존슨 대통령은 25개국에 참전을 요청하는 서한을 공식적으로 발송했다. 대만, 필리핀, 영국, 한국 4개국이 참전에 동의했다. 참전국 중 전투 병력을 파견한 국가는 미국, 한국, 타이,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였고, 나머지는 비전투병을 파병했다.

한국은 1964년 9월,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했고, 1965년 약 2,000명의 비전투부대와 1개 사단의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1966년 1개 사단의 ‘전투부대’를 남베트남에 파병했다. 한국은 약 32만여 명(평균 주둔 약 5만 명) 수준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이런 병력의 파병은 미국을 제외한 모든 다국적군 병사들을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미국과 파병 교섭과정에서 한국은 경제적 이익과 미국의 안보 공약 강화,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 확보 등 안전보장 측면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1965년 6월 중순, 한국의 전투병 파병 배경은 다음과 같다. 베트남 상황의 악화로 미국은 한국에게 1개 전투사단의 조속한 파병을 요청했고, 월남에 파견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주재한 특별 리셉션이 청와대에서 열렸다. 당시 김성은 국방부장관, 장창국 합참의장, 3군 참모총장과 공정식 해병대 사령관, 유엔군사령관비치 대장 등 한미 군 수뇌와 브라운 주한미군대사가 참석했다. 남베트남에 전투병을 보내려면 육군은 파병 장병 지원과 현지적응 훈련 등 최소 6개월이 소요됐다.

그런데 공정식 해병대사령관은 “우리 해병대는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지금이라도 출동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해병대로 구성된 청룡부대가 탄생했는데, 명칭에 대해 공정식 해병대사령관은 자신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에서 “청룡부대라는 이름은 내가 직접 지었다. 바다의 제왕인 청룡은 동쪽의 기운을 맡은 태세신의 상징이다. 좌천룡 우백호라는 말에도 청룡이 백호보다 우위임이 드러난다. 바다를 주름잡을 부대의 이름으로 동방과 바다를 함께 상징하는 동물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싶었다.”고 회고하였다.

1965년 9월 20일 출정식 행사가 거행됐다. 동년 10월 3일 청룡부대는 부산항을 출발해서 캄란 만에 상륙했다. 이어 육군의 맹호부대와 백마부대의 추가 파병이 이어졌다.

한국과 베트남의 새로운 관계 모색
1968년 3월 말, 존슨 대통령은 남베트남 지역 공습을 중단했고, 5월부터 평화 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이 시작됐다. 1973년 1월 27일, 베트남에서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파리협정이 미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베트남 남부공화임시혁명정부를 포함해 4자 간에 체결됐다. 동 협정에서 미군의 철수, 전쟁포로 송환, 정전, 남베트남에서의 사이공 정부와 임시혁명 정부 간에 연합정부 조직을 위한 협의, 정치범의 석방 등을 규정했다.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계속됐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각각 상대편이 정전협정을 수없이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1974년 남베트남은 방어할 수 없는 변경지역을 포기하기 시작했고, 북베트남은 여러 지방도시들을 점령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군사력을 단계적으로 감축시키고 1975년 완전히 철수했다. 1975년 4월 29일 남베트남은 패망했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은 하노이를 수도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시켰다.

1975년 한국은 베트남에서 대사관을 철수시켰다. 그후 1992년 4월, 김영삼 대통령은 양국 연락대표부 설치를 합의했고, 그해 12월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베트남 방문에서 양국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사과했고, 2001년 양국은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해서 호치민 묘소에 헌화하고 묵념을 했다. 2009년 10월 중순, 이명박 대통령은 베트남 방문에 앞서, 국가 유공자법 개정 과정에서 베트남 참전 유공자들을 6·25 전쟁 유공자와 동일하게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2013년 9월 초 박근혜 대통령은 베트남 국빈 방문을 통해 협력적 동반자 관계의 다양한 확대를 모색하는 등 세일즈 외교에 주력했다. 이런 양국 관계의 발전은 ‘국제사회의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는 현실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 적절한 사례가 된다. 탈냉전기에 양국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상호 국익 증진을 위해 다양한 협력을 더욱 더 증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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