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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진단-2> 러시아가 본 북한 핵문제
정경NEWS | 승인 2013.03.11 18:36|(156호)

[정경뉴스=박종수 중원대 초빙교수/ 前러시아 공사] 러시아는 북한의 제3차 핵실험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유엔 안보리 제재에 동참했다. 그러면서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다분히 이중적 입장으로 비친다. 우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북한의 핵개발이 러시아의 기술 및 시설 지원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평화적 이용’이라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렇지만 북한은 러시아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를 무기화한 것이다. 어쨌든 러시아는 북한 핵개발의 원인제공자로서 결자해지할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북한 정권은 핵개발을 위해 언제, 어떻게, 어느 정도 러시아와 협력을 했는가. 북핵 지원국이요 핵종주국인 러시아가 그동안 견지해왔던 입장과 북핵 문제의 근본적 해법은 없는가.

   
▲ 북한이 지난 2월 12일 오전 11시 57분경 북한 함북 길주군 핵실험장에서 3차 핵실험을성공적으로 진행했다는 소식이 뉴스속보로 나오고 있다. (사진=YTN 화면 캡처)

러시아 없는 북핵 없다

2차대전 말 일본 본토에 투하된 핵폭탄의 위력은 빨치산 대장 김일성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천왕의 항복을 받아낸 이 가공할 만한 신예무기의 정체는 무엇인가. 김일성은 전율과 함께 이신예무기에 대한 호기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정권 출범과 함께 김일성이 착수했던 주요 프로젝트 중의 하나가 바로 핵개발이었다. 1946년 설립된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김일성대학에 핵개발의 이론적 기초를 다지는 물리수학부가 개설됐다.

도상록 교수가 초대 물리수학부 학부장을 맡았고 여기에 서울대 리승기 교수와 연세대 한인석 교수가 합류했다. 이들이 소위 북한 핵연구 1세대의 3인방이다. 이어서 정근, 최학근, 서상국 등 러시아 유학파 3인방이 핵개발의 2세대를 이룬다. 정근 교수는 러시아에서 핵개발과 직결되는 원자로 물리학을 연구했다.

1955년 핵물리연구소를 창설하고 이듬해에 소련과‘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협력협정’2건을 체결했다. 모스크바 북방 110km에 위치한 두브나연구소에 연수생을 본격적으로 파견한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북러 간 과학협력이 중단된 1990년까지 약 30년간 북한 과학자 250여 명이 이곳을 거쳐갔다.

1985년 12월에 북소 간 북한 내 핵발전소 건설협정 체결 및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으로 양국 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분야에서 협력할 근거가 마련됐다. 소련 측이 그간 거부해온 발전소 건설문제도 탄력을 받게 되어 1986년 1월 영변 핵물리연구소에 5메가와트 실험용 흑연원자로가 도입됐다.

이와같이 북한은 정권 수립과 동시에 핵개발을 위한 장기계획을 진행시켜왔다. 핵이론 연구에서 핵연료 무기화에 이르기까지의 전(全) 공정을 망라한 것이다. 핵개발 속도는 전적으로 러북 간 과학기술 협력에 좌우됐다.

   
▲ 사진은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1시간 경과 후의 장면

물론 핵기술은‘평화적 이용’이라는 전제가 있었고 어떤 경우든 무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국경 인접국 소련의 입장이었다.

소련은 핵무기 응용 전술과 전략을 북한군 장교들에게 전수했지만 핵탄두 개발에 대한 직접적인 기술지원은 차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지속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핵기술과 무기급 핵물질을 획득하기 위해 이중 용도의 흑연원자로를 이용함으로써 핵프로그램을 군사용으로 전용하는 데 성공했다.

핵의, 핵에 의한, 핵을 위한 정권

소련의 서울올림픽 참가 및 한국과의 수교는 북한에 적잖은 충격이었다. 소련은 1991년 4월부터는 대북 교역 전반에 걸쳐 경화결제를 요구했고 북한에 대한 지원도 대폭 축소했다.

북한은 특유의 중소 등거리외교의 관행에 따라 중국으로 고개를 돌렸다. 2년 뒤에 중국마저도 한국과 수교해버리자, 김정일은 아연실색했다.‘ 정신적 원자탄(주체사상)과 물질적 원자탄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과 함께 핵폭탄을 개발해 강성국가를 지향하겠다는 강한 집념을 보였다. 북한 측은 소련 붕괴의 혼란기를 틈타 러시아로부터 고급 두뇌와 핵물질을 불법으로 반입해갔다.

또 한편으로 미국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핵협상과 관계개선을 병행 추진했다. 북한은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미국과 기본합의문을 채택함으로써 핵문제를 미국과 직접대화의 수단으로 이용했고 자국이 목표했던 안보와 체제보전, 경제원조를 부분적으로 관철시켰다.

반면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는 더욱 첨예화되었다. 북한에 체류 중인 러시아 핵과학자들이 철수했고, 소련의 도움으로 완성된 8메가와트 연구용 원자로의 연료봉 연료 수송과 원자력 플랜트 건설협력도 중단됐다. 이러한 불협화음 가운데 러시아는 4자회담과 경수로 건설에서 배제됐다.

그러나 직접당사국인 러시아 없는 4자회담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도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접촉을 견제하려다 오히려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수모를 당했고, 경수로 건설비용만 부담하게 됐다.

2002년 10월 미국의 켈리 특사가 북한을 방문해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를 제기하면서 제2차 북핵위기가 시작됐다. 이의 해결을 위해 6자회담이 출범했으나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북미 간 입장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2005년 5월 전승 60주년을 계기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미 정상회담에서 푸틴은 부시에게‘북한을 궁지로 몰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라이스 국무장관은 귀국 후‘북한이 주권국가임을 인정한다’면서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공할 의도가 없음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그해 9월 미국은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북한 계좌 2,500만 달러를 동결시켰다.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당장 목줄을 조이는 형국이 된 것이다. 미국은 이 조치가 북한을 압박하는 더할 나위 없는 카드라면서 김정일의 백기투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6자회담은 1년 이상 답보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북한은 2006년 7월 미사일을 발사하고 10월에는 핵실험을 단행했다. 러시아는 북한의 핵실험 계획을 2시간 전에 외교채널을 통해 사전 통보받았다. 반면 군사 동맹국이요 최대 교역국인 중국은 핵실험 20분 전에 통보받았다.

지하 핵폭발 실험은 러시아 국경으로부터 170km 지점에서 행해졌다. 러시아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강경했다. 이바노프 국방장관은 북한이 10월 9일 오전 5시 35분 26초(모스크바 시각)에 핵실험을 실시했다고 푸틴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각료회의에서 북한의 핵실험이 NPT 규정을 위반한 것임을 지적했다.

러시아는 대북 제재를 위한 유엔 안보리 1718호 결의에 동참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대북 핵미사일 기술 및 사치품 수출을 금지하고 핵미사일 개발·추진과 관련되는 북한 인사들의 러시아 입국을 불허했다.

“북한은 9번째 핵 보유국이다”

지난 2월 제3차 핵실험으로 북한이 핵보유국이냐의 여부가 논란거리다. 그렇지만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때 러시아 이바노프 국방장관은 각료회의에서‘북한은 폭발규모 5~15kt의 대규모 핵실험을 성공시켜 9번째 핵 보유국이 됐다’고 발표했다. 러시아가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한 배경은 자체 평가한 내용을 근거로 한다.

1990년 KGB 의장 클류치코프(КрючковВ.А.)는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보고서(No.363-k)에서‘영변에는 최초의 기폭장치 개발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핵무기 제조 사실을 은폐하기위해 현재로서는 그의 실험을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3년 후 KGB 후신인 러시아 해외정보부(SVR)는『냉전 후 새로운 도전: 대량살상무기 확산』제하 백서에서“현재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있다. 다만 상당기간이 경과하면 북한은 핵분야에서 군사용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것이다”고 했다.

   
▲ 지난 2005년 1월 11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펜타곤에서 회담을 마친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오른쪽)과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이 건물 밖으로 나오고 있다.

1992년 IAEA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은 기술적 이유 때문에 원자로를 폐쇄했다고만 밝혔으나 아마도 이때 일정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했거나 가공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러시아 정보기관의 우려대로‘상당기간이 경과하면서’북한은 반복된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제3차 핵실험 이후 러시아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내부적으로는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분위기다. 다만,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을 뿐이다. 이젠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적재시킬 만큼 경량화했느냐가 관심거리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을 두 가지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다. 즉‘정치적 핵’과‘물리적 핵’이다.‘ 정치적 핵’은 문자 그대로 핵개발을 빙자하는 외부용, 특히 미국을 겨냥한 협상카드다.

북한은‘핵의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대미 협상을 지속한다. 고도의 심리전이다. 모호성의 정도가 높을수록 협상용 핵의 가치는 커진다.

그래서 미국은‘완전하고도,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CVID)’을 주장했다. 북한은 핵 포기단계를 최대한 잘게 자르고 기간을 최대한 늘리면서 각 단계마다 최대한의 보상을 요구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북미 간 핵 불능화 협상을 진행시키면서‘정치적 핵’은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두 번째는‘물리적 핵’개발이다. 북한은 1차 핵실험 이후 현재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세 차례의 지하 핵실험을실시함으로써경제적손실도적지않았다.

핵개발에 의한 정권 유지가 오히려 핵개발로 인해 휘청거릴 위험성마저 있다. ‘물리적 핵’개발은‘정치적 핵’의 효력이 극대화되는 순간에 포기 될 수 있다. 그래서 북핵 문제는 고도의 외교력을 요구한다. 주변 당사국들이 북한과의 협상을 진행시키는 데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괄타결안’도 유효한 해법이다

2002년 말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자 러시아는 핵종주국으로서, 북핵 지원국으로서, 그리고 국경 인접국으로서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무엇보다도 북핵 문제 해결이 지연될 수록 북한의 핵 보유 가능성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로슈코프(Лосюков А.П.) 외무차관은 6자회담의 수석대표로서 당사국을 분주히 들락거리며 해법 마련을 위해 고심했다.

2003년 1월 푸틴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김정일과 진솔한 의견을 나눈 후 중재안으로 일괄타결안을 제시했다. 핵심은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한반도의 비핵화를 보장한다. 둘째로, 당사국 간 양자 또는 다자 간 대화를 통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한다. 셋째로, 북한에 대한 인도적·경제적 지원 프로그램을 재개한다. 즉 북한의 완전한 핵개발 포기와 서방의 대북 안전보장 및 경제적 지원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대북 압박으로 일관했다. 결국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에야 미국은 일괄타결안을 부분적으로 수용해 2.13 합의에 이르렀으나 이행과정에서 양측 간 불협화음으로 가시적인 진전이 없었다.

2·3차 핵실험으로 이어지면서 북한 핵의 해결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특히 북한이 3차 실험 후 핵 보유국임을 전제로 6자회담 당사국들에게 핵감축 또는 미북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해올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는 6자회담 출범 이후 북핵 문제가 답보상태에 처하거나 위기상황으로 치달을 때마다 객관적인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중 G2의 그늘에 가려 러시아 카드가‘적시에, 제대로’활용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러시아가 10여 년 전에 제안했던 일괄타결안은 여전히 유효하고 바람직한 대안이다. 러북 간 최대 장애요인이었던 북한의 대러 채무(80억달러) 문제도 지난해 타결됨으로써 양국 간 경협의 지평을 넓혔다. 푸틴 정부는 3기 출범과 함께 본격적인 동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 중심에 한반도 안정화와 북핵문제 해결이 있다. 북핵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러시아의 중재역할이 절실한 상황이다.

 

정경NEWS  news@m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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