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뉴스 문화
영화 아유레디를 통해 보는 ‘우리’'아유레디'를 향한 몇 가지 우려와 몇 가지 칭찬
본 칼럼과 관련해 필자(윤환철)는 유코리아뉴스에 다음과 같은 사과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유코리아뉴스의 독자 여러분 및 허원 감독님을 비롯한 제작진께 사과드립니다. 본인이 지난 10월 14일 유코리아뉴스에 발표한 영화평 <영화, ‘아유레디’를 통해 보는 ‘우리’>에 본인의 착각으로 인해 몇 가지 오류(오류 내용은 칼럼 맨 아래 ‘수정 내용’ 참조)가 있었던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아울러 유코리아뉴스에서도 면밀한 사실검토 없이 칼럼을 게재해 아유레디 제작진과 독자 여러분께 피해를 끼친 점에 대해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유코리아뉴스 대표 김성원 백.
 

 

□ 영화의 출발점, 종착지, 그리고 경로
영화 ‘아유레디’(Are You Ready, 2013, 허원 감독)는 평자로 하여금 그 내러티브의 출발점과 목적지, 그리고 경로를 나눠서 사고하도록 했다. 뭔가 칭찬할 지점과 충고하고픈 욕구를 자극하는 지점들이 그렇게 배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 아유레디에 나오는 북한 학교의 수업 장면

출발점에서는 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았고, ‘복음의 서진’ 혹은 ‘백투 예루살렘’ 이라는 목적지 역시 기독교 세계관 내에 존재하는 분파 혹은 선교관 가운데 하나지만, 보편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관객이 이 영화를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면 일부의 문제는 전체의 문제일 수 있다. 반면 영화의 부분들을 취사선택하고 분석적으로 본다면, 동시대의 구성원인 ‘우리’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논점들을 던진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대목은 영화를 만들고 알리는 이들의 태도가 좌우한다. 누군가 보낸 홍보문자에서 “북한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담은 영화입니다”라고 단언을 하기에 좀 불편하였다. 이는 영화가 갖는 메시지를 통째로 받아들이라는 것인데,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 출발점에서 느끼는 문제
영화의 첫 장면은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뱀이 등장하고 이국적인 여인이 나신(裸身)의 하와를 연기한다. 뱀의 대사는 내레이션으로 대신한다. “네가 역사의 주인이 될 거야”라는 사탄의 유혹이 바로 북한의 ‘주체사상’이라는 설명이다. 이 내러티브는 ‘인본주의’가 곧 반신(反神)적 사상이라는 메시지로 확대된다. 이 첫머리에서부터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의 ‘주체사상’이 하나의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국교(國敎)가 없는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기독교 유신론적 잣대를 들이대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은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인본주의’를 대표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그러한 세계관은 반신적이라는 것인데, 그러한 잣대로는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어떤 다종교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도 ‘적그리스도’의 성격을 피해갈 수 없다. 실제로 인간과 그들의 땅에는 적그리스도적 성격이 곳곳에 배어 있기에 어떤 특정한 집단을 ‘적그리스도’로 몰고 가는 것은 부당하거나 부질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둘째, 나신의 하와를 유혹하는 뱀의 모습은 타락 이전의 에덴의 형상에 대한 상투적인 오해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뱀이 여자와 원수가 되고 배로 기어다니게 된 것은 인간을 유혹한 이후라고 창세기는 기록한다(창 3:14~15). 그러나 이 영화에서 하와는 이미 배로 기어다니는 뱀의 유혹을 받는다. 어느 성화(聖畵)가 이러한 이미지를 고착되도록 했는지는 모르지만 본문에 충실하지 못한 이미지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매체의 특성상 그러한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확산될 것이고, 또 누군가는 교정 작업에 나서야 할 것이다.

셋째, ‘주체사상’은 북한에서도 종교적이라고 할 만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며, 선언적․실제적 퇴조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김일성이 주도한 포괄적 범위의 사상을 공적(公的)으로 폐기하거나 뒤집기는 어렵다. 다만 ‘fade out’이라는 장면 기법과 유사하게 그것을 언급하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그 대체물이나 그 연장선에서 떠오른 것으로 취급되는 것 - 예컨대 ‘선군사상’ - 들의 등장횟수가 늘어나는 식으로 ‘교체’ 국면에 접어드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선군’ 조차도 다른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세 번째 세습독재자 김정은은 북한 곳곳에 ‘유희장’(놀이공원), ‘선상 관광식당’, ‘잔디심기’, ‘스키장 건설’ 등 겉모양의 현대화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데, 이러한 건설에 동원되는 인력은 바로 ‘군인 건설자’ 들이다. 이러한 변화가 계속되는 북한을 두고 주체사상을 하나의 교리로 보는 접근을 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허공을 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인본주의’는 교회의 성경 중심성을 해치는 한 기독교의 경계대상이 될 수 있지만 세속에서 기독교의 정신을 실현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활용되는 사조라는 점이다. 인권을 논할 때나 민의에 기초한 국가 건설과 기본적 사회구조를 논할 때 인본주의적 기반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 개인들의 중요성과 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영화가 명시적으로 ‘인본주의’를 적대시 하는 것은 과녁이 빗나간 것이며 잘못하면 교회 밖 세상으로부터 기독교가 사회적 가치를 저버리고 있다는 평가를 자초할 수 있다.

영화는 ‘신사참배’의 죄악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국가행사’가 아니라 ‘우상숭배’였으며, 오늘날의 분단과 질곡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한다. 이 부분은 광범위한 동의를 얻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우상숭배인 일제하 신사참배와 오늘날 북한의 주체사상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려고 했다면 그것은 위와 같은 이유로 작위적 접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동감과 한계를 모두 보여주는 ‘경로’
출발점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매우 중요한 논점을 다루면서 교회 - 조선, 대한제국, 남북한을 통틀어 - 가 숙고하고 반성해야 하는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전도단의 오대원 목사, 고(故) 대천덕 신부, 성현경 목사 등의 입을 빌리고 내레이션이 받으면서 전달된다. 교회가 사회적 부정의를 도외시한 것이 공산주의가 득세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라는 점, 선교가 제국주의 침탈에 악용되었다는 점,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 토지와 소작료 문제와 같이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대해 교회가 대안을 내지 못한 것을 분단의 한 원인이었다는 지적에도 공감한다. 한국 교인들이 간과하기 쉬웠던, 매우 핵심적인 내용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다. 이 부분에 대한 통찰이 더 상세하게 다뤄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 아유레디에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피터양 선교사.

한 가지 칭찬을 더 한다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희생당한 웨일즈 출신의 토마스 목사를 지나치게 미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분명 선교를 위해 조선 땅에 왔지만 그 방법이 무례하고 강압적이었다는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족적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그의 의도와 성경이 전해진 사실에 주목하고, 그가 택한 경로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현함으로써 균형 잡힌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주로 성현경 목사의 입을 빌어 지적하는 오늘날의 교회 문제에 대한 지적들도 거의 공감하게 된다. 금권선거와 이단 문제로 최근 주요 교단총회에서 속속 관계단절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한기총’ 문제를 지적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경로 부분에서 보여주는 아쉬움 혹은 불편함은 북한의 지하교회에 대한 극찬이다. 영화는 드로잉 애니메이션과 사역자의 변조된 육성을 통해 지하교회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전한다. 주님을 향한 순전한 열심, 종말론적 신앙, 극단적 결핍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눈물나게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러나 영화가 노정하는 문제점은 이를 일반화 하고 신화화 하는 것이다. 이는 남한 교회 교인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기제로 도입되었다. 마치 북한의 지하교회가 유독 순수한 신앙을 보존하고 재림을 고대한다는 식의 언술은 자기반성에 목마른 관객들의 마음을 적셔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일반적 현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아직도 그 존재양식이 불분명한 북한의 지하교회에는 순전한 신앙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알고 침투해 있는 공작원들도 있으며 그들을 통해 돈과 정보가 유출되기도 한다. 북한만큼은 아닐지라도 종교의 자유가 제한된 사회의 공인받지 못한 교회들이 흔히 그러하듯, 주술적 신앙과 자의적 교리 등으로 인한 문제점도 우려된다. 북한에 존재하는 지하교회 혹은 비공인 교회의 현실을 요약하자면 ‘연약한 교회’ 정도의 표현이면 족할 것이다.

□ 영화의 종착지, 복음은 서진(西進)하는가 종횡무진(縱橫無盡)하는가
이 영화가 대중들에게 개봉된 만큼, 시대의 고민을 대변하는 것과 제작자의 신념을 표현하는 것 사이에서 겪는 긴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의 종착지점에서 보여주는 제작자의 강한 신념은 ‘복음의 서진’과 ‘백투 예루살렘’이라는 선형(線型)이자 회귀형(回歸型)인 선교관과 역사관이다. 그러한 생각이 주로 서진(西進) 방향의 선교 동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북한의 개방과 선교는 이러한 서진을 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의미로 강조되고 있다. 이 대목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에 위치한 것은 북한과 통일 문제가 이 패러다임을 완성하기 위해 동원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 아유레디에 나오는 북한 지하교회 성도. 구술형태로 등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의 선교 구상일 수도, 선교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는 ‘백투 예루살렘’ 패러다임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수 있는 조건이며, 그러한 조건을 앞당겨 실현하는 것이 재림을 고대하는 신자의 도리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지역 혹은 유대인들이 성경이 말하는 그 이스라엘이라는 세대주의적 사고를 전제로 한다. 물론 세대주의적 사고는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관점에서도 드러났다.

그러나 복음의 전파가 특정한 방향성을 갖는다거나, 성경에서 말한 이스라엘이 오늘날의 현실 국가인 예루살렘이라는 생각 혹은 신념이 충실한 성경 해석과 역사에 대한 숙고를 바탕으로 세워진 것 같지 않다. 평자는 2010년 로잔 대회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복음은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from everywhere to everywhere) 전파된다는 인식이 더 합당하다고 본다. 영화가 스스로 말하듯 북한 지역은 한반도에서 비교적 먼저 복음이 들어왔던 지역이고, 종착지로 지목된 예루살렘 방향에 있는 나라들, 혹은 마을들 중에서도 과거 복음이 전해지고 여전히 흥왕하거나 혹은 쇠퇴한, 지극히 정상적인 진퇴가 역사 속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는가.

□ ‘북한’을 가리키는, ‘우리’가 드러나는 영화
영화는 북한과 남북관계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와 ‘세계선교’를 중심으로 연관된 이슈들에 대한 이해와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영화가 가리키는 초점은 ‘북한’이다. 이 과정에서 동시대의 동료 신앙인들인 제작자, 출연진들의 제 문제에 대한 이해가 드러나는 것은 필연일 뿐 아니라 영화의 내용 자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솔직히 필자는 이 영화를 통해서 ‘북한’ 보다는 이 동료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하나의 사회적 문제인 한반도 문제는 동시대인들의 광범위한 이해 속에서 해법을 찾아나가야 하고, 그 중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대로 ‘우리’는 북한을 바라보는 출발점을 잡는데도, 이 영화를 포함하여 사람이 만든 무언가를 남에게 권장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북한이라는 실체와 역사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도, 그리고 교회의 문제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교회 안팎의 대중들에게 안정감을 선사할 형편이 못된다. 어찌 보면 이 영화의 제작자들은 문제를 진단하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할 형편이라기보다는 더 배우고 숙고해야 할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에너지가 제작자들을 추동하였을까.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시작하면 누군가 보완할 것이라는 어떤 믿음이었을까. 누군가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도 그것을 활용하여 영상이든 글이든 짓지 아니하고 묵혀둔 이(들)가 있다면 이 영화는 그(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로 다가갈 것이다. 대중들의 이해와 동의가 필요한 문제를 대중매체를 통해 표출하지 않고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평자 역시 이러한 자기반성에서 비켜설 수 없다.

지금은 이 모든 형편을 ‘우리’라고 이해하고 싶다. 마이크든 메가폰이든 통일 문제로 말께나 한다는 사람들간에 피상적 친밀성과 불충분한 소통조차 이 과제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함께 관람했던 누군가의 소망처럼 가운데 부분의 좋은 관점들이 한국 교회에 건전한 논의를 촉발하고 부족한 것은 부족한대로 숙고되기를 바란다. 이 영화를 분석적으로 볼 능력 자체도 ‘우리’의 현주소로 평가될 것이다. 이 영상과 그 막후의 현실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들이 이런 것들이고, 그것들을 두고두고 풀어나가야 하는 일상이 영화관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윤환철/ 미래나눔재단 사무국장(facebook.com/goodngo)

*기사 수정(10월 15일 05시 45분): "다만, 제국주의 선교의 문제점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고니시 유키나카(少西行長, 세례명 아우구스티누스, 1555-1600) 부대가 십자가 깃발을 단 가톨릭 군대였다는 것을 예로 든 것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고니시와 같은 가톨릭 세력은 일본 내에서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당시 침략한 부대들 중에는 불교 정체성을 가진 집단들도 있었는데, 이들의 문제점은 ‘제국주의 선교’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신앙 정체성과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과 약탈이라는 행위 사이에 연관성을 갖지 못한 점이라고 생각된다. 역사적 비중으로 보자면 제국주의 선교의 전형은 서구 기독교의 타 대륙 선교에서 찾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다." 삭제

이 부분을 삽입하게 된 것은 영화의 최종본을 개봉 전인 9월 7일 시사회에서 상영된 별도의 영상을 본 영화의 내용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허원 감독의 지적이 있었고, 이를 인정하여 삭제하였습니다(필자 주).

*기사 추가 수정(10월 15일 09시 43분):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작자들은 결과적으로 완고했다는 느낌이다. 평자나 다른 전문가들이 개봉 전에 전달한 조언들에 대해 제작자들은 한 차례의 피드백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지인들을 통해 홍보문자가 들어오고, 유력한 분들을 방문하는 상황, 그런 분들이 이걸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질의가 평자 앞에 속속 들어왔다." 삭제

*기사 추가 수정(10월 15일 11시 17분): "만일 제작과 홍보의 주체들이 겸손하게 ‘현재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 해 보았습니다. 같이 생각을 다듬어나갑시다’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더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작자들은 결과적으로 완고했다는 느낌이다. 평자나 다른 전문가들이 개봉 전에 전달한 조언들에 대해 제작자들은 한 차례의 피드백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지인들을 통해 홍보문자가 들어오고, 유력한 분들을 방문하는 상황, 그런 분들이 이걸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질의가 평자 앞에 속속 들어왔다." 삭제.

필자는 지난 1월 편집본 상영시 출연자 중 한분에게 영화에 관한 의견을 전달하였고 그 출연자분은 제작진에게 어떠한 의견도 전달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9월 7일의 시사회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PD 한분이 계신 것을 알고 공개토론 장소에서 의견을 표명하였지만 실제로는 제작진에게 영화수정과 관련한 어떠한 조언이나 문서를 전달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필자뿐 아니라 제가 글에 언급한 어떠한 전문가들도 <아유레디?> 제작진에게 조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에 필자가 쓴 글이 근거없는 글임을 인정하여 삭제하였습니다(필자 주).

"고(故) 대천덕 신부는 토지와 소작료 문제와 같이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대해 교회가 대안을 내지 못한 것을 분단의 한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에서 '고 대천덕 신부는' 삭제,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는 '원인이었다는 지적에도 공감한다'로 수정.

이 부분의 화자(話者)가 대천덕 신부님이 아니라는 허원 감독의 지적이 있었기에 수정합니다(필자 주).

윤환철  hwancheol@gmail.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