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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유관지 박사의 ‘무너진 제단을 찾아서’⑤ 남부감리교회(경기도 개성)

개성은 서울에서 가깝고, 개성공업지구가 있고, 남북간의 회담이 자주 열리는 곳이고, 한때는 관광이 실시되었던 곳이어서 우리들에게 친근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남감리회의 개성선교
개성은 남감리회의 선교구역이었다. 미국교회에서 흑인노예 사용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달라서 결국 미감리회(북감리회)․남리회, 북장로회․남장로회로 갈라졌다. 그 다음에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 개성의 남대문. 1391~1393년에 세워졌는데 6․25전쟁이 치열하던 1951년 12월에 소실된 것을 1954년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개성시 북안동에 있다. 개성관광이 실시되던 당시 관광객들은 이 부근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 일은 ‘아, 교회가 갈라져 싸우면 세상도 싸우게 되는구나!’ 하는 교훈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6․25 전쟁도 그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남감리회는 미감리회보다 10년 늦게 한국에 들어와서 서울(공동선교구역)․개성․강원도의 춘천․철원․양구․이천(伊川)․지경대와 함남의 원산(공동선교구역)과 그 주변에서 선교를 했다. 남감리회의 개성선교부는 서울의 선교부보다 규모가 컸다고 한다.

남감리회의 콜리어(C.T. Collyer:高水福) 선교사가 1897년 11월에 개성에 와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한말의 뛰어난 지도자였던 윤치호(尹致昊) 선생과 그의 이모부인 이건혁(李建赫)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남감리회는 개성에서 교회들과 함께 호수돈(好壽敦)여학교(Holston Institute: 6․25 후 대전으로 이전), 미리흠(美理欽)여학교(Mary Helm School), 송도고보(6․25 후 인천으로 이전) 등의 기독교 학교들과 남성병원, 자혜병원 등의 의료선교기관들, 또 고려여자관 같은 사회사업기관들을 세웠다.

남부감리교회는 1899년 연말에 세워졌는데, 개성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이다. 고려의 선비들이 굴하지 않았던 것처럼 남부감리교회는 유시국(劉時國) 목사에 이어 강조원(姜助遠) 목사가 담임했다. 강조원 목사는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15년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나왔는데 한때는 서울의 종교(宗橋)감리교회(정부종합청사 옆)와 자교감리교회에서도 일했지만 주로 개성지방에서 사역하면서 개성 3․1만세운동 지도자 가운데 한 분으로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개성동지방 감리사도 역임했다.

강조원 목사와 함께 남부감리교회에서 수고한 분이 제임스 노리스(James Norris: 羅理壽) 선교사였다.

남부감리교회는 경기도 개성부 경정(京町) 199번지 1호였는데 이곳은 지금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관훈동(冠訓洞)이 되었다. 관훈동은 개성의 중심부로서 경의선(북한에서는 平釜線이라고 한다)이 바로 옆을 통과한다. 고려의 문인들이 조선왕조에서 실시하는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여기에 관을 벗어 놓았다고 하는데 거기에서 ‘관’을 따고 조선왕조 때 이곳에 훈련원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훈’을 따서 관훈동이 되었다.

   
▲ 구글 인공위성 사진으로 본 개성시내 모습.

관훈동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생각하면서 고려의 선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북한정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신자들이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남부감리교회는 70평 규모의 목조함석예배당과 열여섯 평 규모의 유치원을 가지고 있었다. 목사관은 열한 평 규모의 초가였다.

유관지  yookj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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