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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김일성광장 부근에 있었던 교회유관지 박사의 ‘무너진 제단을 찾아서’④ 남문외(南門外)교회(평남 평양)

평양 남문밖교회는 1903년 10월 31일에 세워졌다(이 교회는 주소록에는 ‘남문외교회’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남문밖교회’라는 이름을 많이 썼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제목은 ‘남문외교회’로 하고, 본문에서는 ‘남문밖교회’라고 쓰기로 한다).

남문밖교회는 평양에 있었던 장로교회들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장대현교회에서 첫 번째로 분립된 교회이다. 평양에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이어서 제2교회라고도 한다.

장대현교회에서 그 다음에 분립된 교회, 제3교회가 창동(倉洞)교회이고 그 다음에 분립된 교회가 산정현(山亭峴)교회이다. 산정현교회가 세워질 때 남문밖교회 교인 일부가 산정현교회로 갔다. 당시에는 교회들이 교구제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 구글맵으로 본 평양 시가지. 가운데 빨간색 점이 남문밖교회 자리였던 김일성광장이다.


남문밖교회는 동은 대동강, 서는 보통강, 남은 한사강(寒寺江), 북은 대동문으로 가는 길, 이렇게 구역을 정하고 그 안에 사는 교인들은 남문밖교회에 출석하게 했다. 다시 창동교회가 분립했을 때는 동으로는 대동강, 서로는 기자릉(箕子陵), 남으로는 옛 관찰부 앞길, 북으로는 모란봉, 이 구역에 사는 교인들은 창동교회에 출석했다.

노일전쟁 중에 교회를 짓다
남문밖교회는 처음에는 판동(板洞)에 있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교회가 세워지고 나서 몇 달 안 되어서 노일전쟁이 일어났는데 일본 군대가 평양 중심가를 사용해서 교인들이 교회에 오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때 교회는 블레어(W. N. Blair: 邦緯良) 선교사와 스왈론(W. L. Swallen: 蘇安論) 선교사가 담임하고 있었는데 교인들은 블레어 선교사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블레어 선교사의 집은 남문 부근 중성리(中城里)에 있었다.

남문밖교회가 시작될 때 교인은 50여 명이었는데 계속 늘어 100명이 넘게 되어 집에서 예배 드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남문밖교회에서는 전쟁 중이라고 하더라도 교회당을 지어야 하겠다고 하고서 남문밖에 있는 대지를 샀다.

1049평의 대지를 샀는데 비어 있는 대지가 아니고 열다섯 채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이 대지를 사는 데 필요한 돈은 스왈론 선교사가 헌금했다. 교회는 서른세 칸 규모였는데 총 공사비는 3000원이 들어갔다. 공사비의 3분의 2는 장대현교회가 부담하고, 3분의 1은 선교부에서 헌금했다.

분단 후 북한을 방문한 불레어(방위량) 선교사
1913년까지는 선교사들이 남문밖교회를 담임했다. 처음에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블레어 선교사와 스왈론 선교사가 담임했고 1911년에는 홀드크로프트(J. G. Holdcroft: 許大殿) 선교사가 담임했다. 블레어 선교사는 형제가 한국에 선교사로 왔는데 동생의 한국식 이름은 방혜법(邦惠法)이다. 이 분은 평안북도 강계(江界)에서 많은 일을 했고 뒤에는 대구에서 일했다.

형 블레어 선교사는 아주 특별한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에 추방되었다가 해방 후에 돌아와서 대구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에 1947년 4월에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특별승낙을 받아 평양을 닷새 간 방문한 일이 있다. 38선이 그어진 다음에 서양인, 그것도 선교사가 북한을 방문한 일은 이것이 유일하다.

스왈론 선교사는 한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수고한 분인데 그 40년 가운데 33년을 평양에서 일했다. 제주 선교의 개척자로서, 처음에는 불량배였던 이기풍(李基豊)을 감화시켜 신학교에 들어가게 한 분이 바로 스왈론 선교사이다.

홀드크로프트 선교사는 한국에서 특히 기독교 교육사업을 많이 한 분이다. 일본 당국이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미국 선교부에서는 전권위원으로 홀드크로프트 선교사, 솔타우(T. S. Soltau) 선교사, 로드(H. A. Rhodes) 선교사를 선임했는데 홀드크로프트 선교사가 위원장을 맡았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못하겠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최초의 한국인 담임자는 이일영 목사
최초의 한국인 담임자는 이일영(李一永) 목사이다. 이일영 목사는 남문밖교회의 초대 집사였고, 장로도 하고, 조사로도 일한 분이다. 남문밖교회를 지을 때는 공사감독을 책임 맡기도 했다. 이 분은 1911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제6회) 바로 남문밖교회에 부임해서 처음 2년간은 홀드크로프트 선교사와 같이 목회하고 1913년부터 단독으로 담임하였다.

3·1 만세운동 때 평양 시민들은 숭덕소학교 교정에 모여 만세를 부르면서 시가지로 나갔는데, 이 때 이일영 목사가 만세를 시작하는 기도를 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몸이 아파 1년간 휴양생활을 했는데 주공삼(朱孔三) 목사가 대리로 교회를 담임했다. 주공삼 목사는 주자(朱子)․공자(孔子), 그리고 자기, 이런 뜻으로 이름을 공삼이라고 지은 분인데, 형제 문인인 주요한(朱耀翰)․주요섭(朱要燮)의 아버지이다. 요한․요섭은 모두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다.

이일영 목사의 건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아서 1923년에 다시 반 년 휴양하고, 1924년에는 사임을 하였다. 그 다음에 황보덕삼(皇甫德三) 목사가 부임했다. 황보덕삼 목사가 남문밖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남문밖교회는 예배당을 새로 지었다. 건평 140여 평의 기와집이었는데 앞에서 보면 3층이고 뒤에서 보면 2층이었다. 황보덕삼 목사는 뒤에 동평양교회를 담임하면서 그 교회의 예배당도 신축하였다.

1939년에는 이학봉(李學鳳) 목사가 남문밖교회를 담임하였다. 이학봉 목사는 황주, 원산, 함흥, 여러 곳에서 목회를 하고 남문밖교회에 부임했는데 해방후에 공산정권에게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학봉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는 예술가들이 많다. 장남은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지낸 이인범(李仁範) 교수이다. 외손자가 「순교자」라는 소설로 널리 알려진 재미작가 김은국(金恩國)씨이다.

“교회가 계속해서 부흥함으로…”
남문밖교회에서는 학교도 세우고 교회도 여럿 세웠다. 처음에 여학교를 세우고, 그 다음에 남학교를 세웠다. 처음에는 남녀 학생이 40명이었는데 두어 해 뒤에는 배로 늘어났다. 남학교는 나중에 숭덕학교, 여학교는 숭현학교에 합해졌다.

1909년, 교회가 세워지고 6년 뒤에 명촌(明村)교회를 세웠고, 1911년에는 연화동(蓮花洞)교회를, 1917년에는 강촌(康村)교회를 세웠다. 남문밖교회의 기록을 보면 “교회가 계속해서 부흥함으로” “교인들이 늘어남으로” “여전히 부흥함으로” 이런 문구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1912년 기록에는 “교회가 점점 더 진보함은 매년 두세 번씩 사경회와 6개월씩 성경 야학과 주일 공부와 기도회와 전도하기를 힘쓴 연유”라는 대목도 있다.

평양의 중심부에 자리잡다
1938년도 장로교 주소록을 보면 남문밖교회의 주소는 평양부 남문정(南門町) 21번지로 되어 있다. 이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평양 중구역 중성동(中城洞)이다. 중성동이라는 지명은 전에부터 있었는데 해방 전에는 중성리였다. 블레어 선교사의 집이 중성리에 있었다.

남문정이 해방 후에 남문리가 되었다가, 남문동이 되었는데 1972년에 중성동에 흡수되었다. 남문동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평양의 남문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문의 이름은 주작문(朱雀門)이다.

중성동이라는 이름은 평양성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북한에 대한 보도가 나올 때 김일성광장의 모습을 자주 볼 텐데 김일성 광장이 바로 중성동에 있다. 이것을 보아도 남문밖교회가 있었던 곳이 평양의 정중심(正中心)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계속)

유관지  yookj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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