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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북지방의 어머니 교회 광석동교회(함남 원산)유관지 박사의 '무너진 제단을 찾아서'②

원산은 전에는 함경남도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강원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어 있다. 원산은 기독교가 매우 왕성해서 ‘관북 제일의 기독교 도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1903년에 일어난 원산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게일 선교사의 집에서 시작되다

광석동교회는 그런 원산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이고, 원산을 ‘관북 제일의 기독교 도시’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교회이다.

광석동교회를 ‘관북지방의 어머니교회’라고 말한다. 광석동교회는 1893년에 게일 선교사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게일 선교사의 집은 봉수동(烽燧洞)에 있었는데, 봉수동은 원산 중심부에서 서북쪽으로 40리쯤 떨어진 곳, 원산 중심부와 송도원해수욕장 사이에 있다.

 

   
▲ 원산시 위치

게일 선교사의 집은 ‘예수집’이라고 불렸다. 게일 선교사의 한국 이름은 기일(奇一)로서, 한국을 깊이 사랑하고 많은 일을 했는데 특히 한국의 문화를 깊이 사랑했다.

광석동교회는 1899년에 상리(上里)의 갈대밭을 사서 예배당을 지었고, 뒤에 원산항 바닷가에 있는 상평창(常平倉) 앞의 갈대밭을 사서 예배당을 지었다. 상평창은 풍년 때 곡식을 사들여서 흉년이 들었을 때 팔 수 있도록 곡식을 보관하는 나라의 곡식창고였다. 창고 앞에 세워졌기 때문에 창전(倉前)교회, 또는 창앞예배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교회는 1917년을 전후해서 광석동에 새 예배당을 지었다. 이때 교회 이름이 광석동교회가 되었다. 이 곳에는 넓은 바위가 많기 때문에 광석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우리말로는 ‘너리골’이라고 했다. 그래서 광석동교회를 ‘너리골 예배당’이라고도 했다.

 

 

   
▲ 구글맵으로 본 원산시 모습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의 뒤를 이어 한국인 목사들이 담임하다

게일 선교사의 뒤를 이어 푸트(W.R. Foote; 富斗一), 맥레이(McRae: 馬具禮), 그리슨(R.G. Grieson; 具禮善), 럽(A.F.Robb; 鄴亞力) 등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이 광석동교회를 담임했다.

1911년부터는 한국인 목사들이 광석동교회를 담임했는데 박예헌(朴禮獻), 김영제(金永濟), 이학봉(李學鳳), 이승길(李承吉), 김상권(金尙權), 정재면(鄭載冕), 권의봉(權義鳳) 목사가 이어가며 이 교회를 섬겼다.

박예헌 목사는 아버지와 같은 해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서 같은 해에 졸업한 분이다. 아버지는 박정찬(朴楨燦) 목사인데 부자가 같은 노회에 있었다.

아들 박예헌 목사가 노회서기였는데 노회에서 출석을 부를 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기 거북하니까 조그맣게 ‘아버지’라고 했다고 한다. 노회원 한 분이 ‘여기가 무슨 가족 모임이냐?’ 항의 발언을 하니까 박예헌 목사가 당황해서 ‘박정찬!’ ‘박정찬!’ 아버지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승길(李承吉) 목사는 황해도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김구(金九) 선생님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고, 옥고도 여러 번 겪었고, 교회에서도 많은 일을 했다. 그런데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해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김상권(金尙權) 목사는 경상도 진주 출신인데 일본에서 공부를 여러 해 했고, 평양, 원산, 전남 순천 등 여러 지역에서 일했으며 교단본부와 선교기관에서도 일했다. 정재면(鄭載冕) 목사는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고향인 간도 명동촌(明東村)과 관계가 깊은 분이다.

명동촌으로 이주한 분들이 학교를 세웠는데 가르칠 분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을 때 정재면이 명동촌에 왔는데 ‘주민들이 모두 예수를 믿어야 교사로 일하겠다.’라는 조건을 내세웠다고 한다. 주민들이 이 조건을 받아들여 명동촌이 예수 잘 믿는 마을이 되고, 명동교회가 세워졌다.

정재면 목사의 무덤은 지금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 광석동교회 담임목사 가운데 한 분이었던 정재면 목사의 모습(앞줄 왼쪽). 이 사진은 문재린 목사(문익환 목사의 부친. 앞줄 가운데)가 1928년에 캐나다 유학을 떠날 때 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권의봉(權義鳳)목사는 경북 상주 출신인데 신앙문제 때문에 포항으로 옮겨서 살았다. 목사 안수를 받은 다음에는 광석동교회에서 설립한 석우동(石隅洞)교회를 담임했는데, 광석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정재면 목사님이 일본 당국의 압력 때문에 사임을 하게 되어서 광석동교회와 석우동교회를 겸해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

해방이 되니까 포항의 교인들이 ‘고향과 같은 포항에 오셔서 목회하십시오’라고 청했는데, 권 목사님은 ‘제가 섬기던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하고 계속 공산치하가 된 원산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공산당에 반대하다가 함흥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공산군이 후퇴할 때 공산당은 수많은 수감자들을 니켈 탄광에 몰아넣고 학살했다. 권 목사도 이 때 순교당했다. 

이호재 스님의 재산으로

안변에 석왕사(釋王寺)라 큰 절이 있는데 게일 선교사가 석왕사 구경을 간 일이 있었다. 이때 그 절의 스님들에게 기독교에 대해서 잘 말해 주었는데 그 스님들 가운데 이호재(李好宰)라는 분이 있었다. 이호재는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주지가 되었다.

그러나 게일 선교사에게 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잊지 않고 주지직을 포기하고 개종했고, 개종을 기념해서 많은 재산을 광석동교회에 기증했다. 이 재산은 석우동교회 개척설립, 광석동 새 교회당 건립, 신학생 장학금 등, 여러 면으로 유익하게 사용되었다.

광석동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원산의 중심부로서 원산항과 강원선철로 사이에 있는 곳인데, 강원선은 평강군에서 고원군을 연결하는 철로이다. 광석동 앞이 창앞예배당이 있었던 상동이다.

알려드립니다

다음은 탈북민인 김태진 전도사(광야횃불선교회 대표, 북한민주화운동본부 본부장, 총신대 신대원 졸)의 증언입니다(2013년 8월 22일).

“나는 청소년 시절을 원산에서 살면서 광석동에 있는 광석고중을 다녔다. 광석동에 ‘원산영화관’이 있어서 종종 거기에 가서 영화를 보았는데, 오늘 이야기를 나누어보니까 원산영화관의 위치, 건물 규모, 내부 모습으로 보아 그 건물이 광석동교회였던 것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계속) 

*유관지 목사. Ph. D. 연세대와 호서대 대학원에서 신학을, 중앙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극동방송 이사, 주옥감리교회, 목양감리교회 담임 역임. ‘평화통일과 북한선교’ ‘북한의 종교실태’ ‘기도가 흐르는 3천3백80리 강물’ 공저자. 현 북한교회연구원 원장.

유관지  yookj4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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