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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5·18 알았지만 시기 놓쳐 개입 못해"탈북자 강명도(김일성의 친척), 저서『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에서 주장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종편방송의 보도는 결국 '사과'와 함께 '고소 고발'로 이어질 전망이다.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은 지난 15일, 탈북자 김명국(가명)씨의 증언을 토대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내용을 방송했다.

TV조선 또한 지난 13일 '장성민의 시사탱크'에서 탈북자이자 전 북한특수부대 장교인 임천용씨를 출연시켜 "600명 규모의 북한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다"며 "전남도청을 점령한 것은 북한 게릴라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탈북자들은 대체로 채널A나 TV조선의 보도에 반대하거나 우려하고 있다. 탈북자인 '강명도'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난 1997년 출판된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저자 강명도)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북한개입설을 반박할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저자 ‘강명도’라는 인물이 대체 누구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강명도 씨는 김일성의 외사촌 친척이자 강성산 전(前) 북한 총리의 사위로 북한 최고 엘리트 그룹에 속했던 사람이다.

종편에서 ‘오월 광주’에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한 탈북자들에 비하면 엄청난 거물인 셈이다.

그의 저서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에서는 북한이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았지만 "신군부의 신속한 데모대 진압으로 개입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 있다.

북한의 통일전선부장 대남담당 지도총책 김중린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사태파악에 너무 열을 올린 나머지 개입할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의 주장처럼 북한군 특수부대가 광주에 남파됐다면 김중린이 사태파악에 공을 들일 이유가 없어 보인다.

만약 5·18 광주민주화운동 북한군 개입설이 사실이라면 광주에서 뿐만 아니라 전방에서도 북한군의 도발이 동시, 또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발생했어야 하지만 전방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있었다는 뉴스는 찾아보기 힘들다.

   
▲ 강명도 저 『평양은망명을꿈꾼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대응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다음은 『평양은망명을꿈꾼다』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내용 전문

북에서 본 광주민주화운동

“광주에서 전쟁이 터졌다.”

1980년 5월 18일 북한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 남조선 광주에서 계엄군과 학생 데모대가 충돌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일본 조총련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비디오 테이프를 확보한 중앙TV가 매일 그 테이프를 방영한 것이다. TV 화면에서는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을 마구 죽이는 장면이 나왔다.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공수부대원들이 최루탄 연기가 가득한 시가지에서 곤봉으로 죄 없는 시민들의 머리를 마구 내려치고, 학생들을 굴비처럼 엮어서 끌고가는 모습이 나왔다. 또 길거리에 사람들을 꿇어 앉혀놓고 군화발로 마구 짓밟는 장면도 나왔다. 또 복면을 쓴 시민군이 탈취한 계엄군의 지프를 타고 시가지를 달려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노동신문』은 해설을 통해 학생 시위가 광주사태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공수부대가 계엄군으로 출동, 엄청난 사태로 확대됐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공수부대 투입을 지시한 사람이 전두환이라고 보도했다. 내가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노동신문』은 전두환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답답한 나는 안면이 있는 국가보위부의 한 간부를 찾아가 전두환에 대해서 물어봤다. 보위부 간부인 그는 이미 전두환이라는 인물을 파악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전두환은 우직하고 포악한 사람”이라며 “스라소니(박정희)가 없어지니까 되레 사자가 나왔다.”고 말했다. 나는 TV에서 본 광주민주화운동 장면을 떠올리며 ‘전두환+포악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깊이 머리에 새겼다.

남조선에 파견된 간첩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김중린(金仲麟)은 3호청사의 전 부서에 비상을 걸었다. 김중린은 당시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대남비서였다. 김중린은 남조선에 구축해놓은 정보망을 총가동해 사태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김중린이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직후 정책 초점을 사태파악 및 분석으로 잡았다. 황금 같은 초기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후 5~6일이 지난 다음에야 김일성·김정일에게 최종 정세판단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는 “광주사태의 본질은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 양심적 인텔리 계급과, 매판자본가들을 등에 업은 군부세력 간의 충돌”이라고 정의하고, “따라서 양가간의 갈등관계를 증폭시킬 경우 이는 공화국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폭동이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문제”라며, “만일 우리가 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인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김중린은 비교적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의 실책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응용·활용보다 사태파악과 분석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것은 5월 18일이다. 그 후 사태는 22일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일 뒤인 27일 계엄군의 진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종식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단 9일간 진행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김중린이 정세판단서를 김일성에게 올려 수표(재가)를 맡을 때 쯤에 이미 광주민주화운동은 진압국면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당시의 예기를 당대외연락부 6과 지도원이었던 임만복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태가 터지자 김중린은 모든 대남 공작원들에게 비상대기령을 내렸다. 그러나 정작 3호청사 직속 청진 전투연락사무서(일명 121호연락소)가 상부로부터 대남 침투명력을 받은 것은 26일이었다. 북한 최대의 대남연락소인 청진연락소에는 전문 공작원만 1,200명이 있다.

명령을 받은 수십 명의 정예 공작원들은 남조선 침투에 대비해 쾌속정을 준비했다. 이 쾌속정은 일제 보트에 탱크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최대속도가 60노트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유서를 써놓고 쾌속정에 무기를 옮겨 싣고 있는 공작원들에게 돌연 작전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공작원들은 무기를 내려야만 했다.

김중린이 대응 시기를 놓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계엄군의 광주 도청 진압이 북한의 예상보다 빨랐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어쨌든 광주민주화운동을 놓고 진행된 김일성 대 전두환의 1라운드는 김일성의 패배로 끝났다.

3호청사가 광주민주화운동을 놓고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안 한 것은 아니다. 당시 나는 3호청사의 움직임을 내 친구 이화섭으로부터 자세히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화섭은 당시 통전부 제1부부장이었던 이동호의 아들이다. 그는 나와 학교 동기동창으로 그 이전에는 매일 만나다시피 했던 사이였는데,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는 좀처럼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치 않게 이화섭을 만났다. “뭐 하느라고 그렇게 바쁘냐?”고 묻자, 얼굴이 핼쓱해진 이화섭은 “말도 마라. 오줌 누고 뭐 볼 시간도 없다.”고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자 그는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대남선전 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던 것이다. 당시 이화섭은 3호청서 직속 101연락소 지도원이었다. 101연락소는 앞서 말했듯이 대남사업용 선전 삐라는 물론 위조지폐를 포함한 인쇄물 일체를 찍어내는 곳이다. 

범영수 기자  bumyungs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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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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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연 2016-01-15 23:10:33

    더러운 쓰레기 대북관을 지니고있는 강명도의 실체에 대해서는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에서 더 잘알게 될거다~!!!! 암~!!!! ㅡㅡ;;;;;; 이놈의 과거사에 대해서 방영되면 얼마나 좋을까?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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