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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힘들었니, 이젠 마음대로 하렴"영화 '가족의 나라'에 비친 북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조총련, 한덕수, 만경봉호…. 꽤 오래된 단어들이 기억을 더듬어 스멀스멀 살아옵니다. 이런 단어들이 뉴스에 떠돌던 그 무렵 저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렇게 기억 속에 지워진 단어들이 영화 <가족의 나라>를 통해 고스란히 되살아난 셈입니다.

1959년부터 20년 동안 ‘지상의 낙원’이라는 선전에 속아서 조총련계, 그러니까 재일본조선인연합회계 재일교포들이 ‘조국’인 북한으로 송환되었습니다. 일본 정부와 북한의 협정에 의해, 돌아오는 선택권을 박탈당하고 그곳에 갇힌 이들만 무려 9만 4000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영화 <가족의 나라>는 양영희 감독의 가족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양 감독의 세 오빠가 모두 북송선을 탄 모양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성호’는 그러니까 양 감독의 그 세 오빠를 모두 투영한 인물인 셈이지요.

그 오빠가 돌아오면서부터 영화는 시작됩니다. 25년 만에 가족과 만나는 오빠는 뇌종양을 앓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였으므로 일본에 사는 성호의 가족은 성호를 일본에 데려와 치료 받게 했습니다. 치료를 목적으로 일본에 석 달 동안 체류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까지 무려 5년이 걸렸고, 게다가 허락을 받기 위해 막대한 ‘자금’까지 쏟아 부어야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오빠의 조국입니다.

   
▲ 소년이었던 아들을 조국에 떠나보낸 뒤 엄마와 아버지는 늙었습니다. 소년이었던 아들은 처자식을 둔 중년의 남자로 돌아온 것입니다.

소년이었던 아들을 조국에 떠나보낸 뒤 엄마와 아버지는 늙었습니다. 소년이었던 아들은 처자식을 둔 중년의 남자로 돌아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건 그가 살고 있는 조국의 삶에 어느덧 익숙해진 오빠가 여동생에게 스파이가 되어줄 것을 요청합니다. 여동생은 분노합니다.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그런 걸 요구하는 오빠의 조국을 도대체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오빠의 조국은 또 병을 치료하고자 석 달의 말미를 얻은 사람에게 그 약속조차 지키지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귀국 명령을 내립니다. 이제 겨우 뇌종양을 확인하였을 뿐 치료에 대한 어떤 처방도 내려지지 않았고, 치료가 가능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오빠는 엄마와 아버지의 나라를 떠나야 합니다.

가족들은 기가 찹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세상이 존재하는 데 대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분노할 뿐입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오빠는 이런 조국의 삶에 익숙한 듯 돌아갈 짐을 챙깁니다. 조국이 명령하면 그저 따라야 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어.” 

여동생이 그렇게 말할 때 오빠는 오히려 웃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그 나라에서는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아. 사고정지랄까?”
그러면서 체념하듯 말합니다.
“난 이제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 하지만 너는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며 살아. 너의 인생이잖아. 너는 아무에게도 간섭 받지 마라. 매일 감동하면서 나를 위한 인생을 살아.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

오빠의 당부 속에는 오빠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간섭도 받지 않고, 하루하루를 감동하며 살고 싶었던, 오빠의 오래된 꿈이 여동생에게 전해집니다. 오빠의 꿈까지 함께 살아달라는 간절한 부탁처럼 들립니다.
여동생은 오빠가 가족의 나라를 떠나 조국으로 다시 떠나버린 날, 오빠가 갖고 싶어 하던 비싼 여행용 가방을 삽니다. 오빠의 말처럼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올 때 내 안에는 성호 씨처럼 그렇게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많은 성호 씨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가 또 그 세계를 떠나온 이들이 남한에서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 “그 나라에서는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아. 사고정지랄까?”

아, 그들은 그렇게 고단한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셈입니다. 그러니 ‘조국’인 그 땅을 버리고 떠나온 그들은 모두 성호 씨의 눈물과 고통과 체념이 일상이었던 시간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들에게 제가, 아니 남한에서 남한의 방식으로 살아온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말이란 건 그리 많을 리 없습니다. 성호 씨를 25년 만에 만나서 안아주던 늙은 엄마의 마음이면 되지 싶습니다.

‘그래, 잘 왔다. 얼마나 힘들었니. 이제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렴. 생각대로 살면 돼.’

그 말뿐이지 싶습니다.


 

박명철 <기독신문><뉴스엔조이><기독교사상>기자를 거쳐 <아름다운동행> 편집장으로 기독교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해왔으며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는 현장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알리는 데 매진해왔다. 현재는 프리랜서로 청소년 큐티잡지 월간 <Q> 및 CBS, <복음과상황><크리스채너티투데이> 등에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박명철  aimp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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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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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연 2016-09-30 08:49:34

    일본적십자사에 의해 북송되어 북한으로 거주중인 재일동포 여성들을 보면 그들의 옷차림이 당시 북한의 현지여성들과는 상반된 대조를 보이고 있다네요? 왜냐하면 그때가 1959년이었는데 그때당시 북한여성들의 옷차림은 그야말로 초라했거든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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