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뉴스 국내
“탈북자에 대한 낙인? 밝게 살려다보니 저절로...”남한 여성과 결혼하는 탈북 청년 박영철(우양재단 주임)씨

“보통 남남북녀가 많던데 북남남녀라? 쉽지는 않으셨을 것 같네요.”

“남한 청년들이 남자든 여자든 탈북자와 결혼하는 데 대해서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본인은 괜찮아도 부모님 반대를 많이 고민하는 것 같더라구요. 탈북자는 가족이 없으니까 명절 같은 때 어울리지 못할 것에 대해 우려하기도 하고.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고정관념은 ‘북한에서 왔다’는 거죠. 일종의 낙인이죠.”

오는 10일 결혼하는 탈북자 박영철(31‧우양재단 주임)씨. 배우자는 장미연(28). 남한 처녀다. 최근 서울 서교동 우양재단 사무실에서 박씨를 만났더니 자연스레 결혼 얘기부터 꺼냈다. 그렇다면 박씨는 어떻게 ‘탈북자’란 낙인 속에서 남한 여성과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을까.

   
▲ 우양재단 박영철 주임. 그는 잘 웃는다. 인생관도 '밝게 살자'다. ⓒ유코리아뉴스 김성원

박씨와 장씨는 안산동산고등학교 동창이다. 북한에서 고등중학교(중고등학교)를 중퇴한 탓에 2002년 6월, 안산동산고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그 1년 전, 함께 탈북했던 고향 친구가 먼저 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박씨와 장씨는 학교 다닐 때는 잘 모르는 사이였다. 두 사람이 알게 된 건 박씨의 탈북자 친구를 통해서다. 졸업 후 그 친구는 취업을 했고, 장씨도 그 친구와 같은 직장엘 다녔다. 북한 친구는 평소 장씨에게 친구 박씨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 그렇다보니 친구의 소개로 박씨와 장씨 두 사람이 만났을 때는 별로 거리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2010년 가을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2년만에 결혼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남한 처녀 장씨가 북한 청년 박씨에 대해 고정관념을 벗게 된 데는 탈북자 친구 때문이었다. 친구는 늘 진솔하고 성실한 모습이었다. 친구를 통해 숱하게 전해 들은 박씨도 비슷했다. 못생기지도, 과격하지도, 게으르지도 않았다. 남한 사람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굳이 ‘탈북자’로 따로 구분할 그 어떤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박씨의 말이다. “아내가 친구한테서 워낙 내 이야기를 많이 듣다보니까 처음 만났는데도 전혀 거리감 같은 게 없었어요. 한번 두 번 만나다보니 더 친해졌고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온 거죠.”

딸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장씨의 부모는 어떻게 애지중지 키운 딸을 탈북자 청년에게 줄 수 있었을까. 역시 박씨의 얘기다. “여자친구는 귀가하면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죄다 어머니(장모)와 얘기하는 스타일이에요. 북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이구요. 어머니도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니 결국 탈북자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지셨던 것 같아요. 나중엔 ‘북한에서 온 오빠의 친구를 만나고 있다’고 했는데도 어머니는 충격은커녕 ‘잘해 봐’라고 격려해주실 정도였어요. 그 얘길 듣고 저도 깜짝 놀랐어요. 남녀가 재미 삼아 한번 만나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건데 그걸 선뜻 허락해 주신 거잖아요. 마침 친구 중엔 여자친구 쪽 부모의 반대로 어렵게 결혼한 경우도 있었거든요.”

얼마 뒤 여자 친구의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박씨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대뜸 “남자 친구구나. 건강진단서 좀 떼어오라”고 했다. 비쩍 마른 박씨에게 딸의 일생을 맡기기엔 미덥지 않으셨던 것일까. 아무튼 박씨는 ‘이건 뭐지?’라는 황당함과 의구심을 안고 그 길로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는 모든 인체 기관이 ‘정상’인 자신의 건강진단서를 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가정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셨다. “내 아버지도 북한 북청 출신이야. 전란 중에 오셔서 무척 고생을 많이 하셨지. 자네도 남한살이가 결코 쉽지 않을 거야. 두 사람 앞으로 예쁘게 잘 사귀길 바라네.”

박씨는 남한에서 혈혈단신이다. 여덟 살 차이 나는 남동생 한 명이 있을 뿐, 아버지는 북한에서 죽었고, 어머니는 중국에서 살고 있다. 그런 박씨를 여자친구의 부모는 선뜻 사위로 받아준 것이다. “저도 놀랐어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부모님은 여자친구를 100% 믿는대요. 여자친구가 어딜 가든지 100% 믿어주고 밀어주는 그런 집안이더라구요.”

장씨에게는 탈북자와 남한 사람간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 얘기를 무수히 전해들은 장씨의 부모님도 봄바람에 눈 녹듯 어느새 탈북자를 향해 마음이 활짝 열려갔던 것이다. 탈북자에 대한 선입견을 벗은 남한 사람의 정보 유통, 그에 앞서 탈북자 스스로 선입견을 벗으려는 노력이 주효했다는 얘기다.

   
▲ 박영철&장미연의 결혼식 청첩장. "작은 통일"이라고 돼 있다.

“저는 여지껏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박씨는 2001년 가을 남한에 입국했다. 박씨의 이 말은 그때부터 시작된 쉴틈 없는 남한살이를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것이다. 그가 하나원을 퇴소한 건 이듬해 6월. 그는 곧바로 고등학교를 찾았다. 탈북 청소년들의 상당수는 한국에 오면 일반 학교보다는 대안학교를 먼저 찾는다. 여러 가지 문화적 차이로 일반학교 적응이 어렵기 때문이다. 박씨는 일반 학교 문을 두드렸다. 제대로 공부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먼저 찾아간 곳은 안산의 한 사립 고등학교.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는 담당 형사랑 같이 찾아갔다. 박씨에 대한 설명을 듣던 교장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서 온 사람에 대해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검토가 필요합니다.” 박씨는 ‘검토’라는 단어를 들으며 ‘이 학교는 아니다’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찾아간 곳이 안산동산고등학교다. 인상 좋은 교장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서 내려와 배우겠다는 사람을 못받을 이유가 없죠. 배움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그 누구든 우리 학교는 열려 있습니다.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을 막는 건 교육자가 아니죠. 내일부터라도 당장 등교하세요.”

그때 박씨 나이 21세. 모든 게 낯선 늦깎이 탈북 청년에게 교장선생의 그 한마디는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 교장선생은 이후 “부모가 없으니 나를 믿고 의지하라”며 박씨의 양부모가 되어줬다. 박씨는 명절이면 친구 탈북자와 함께 그 교장선생 댁을 찾아가 인사드린다. 그가 바로 예일여고 유화웅 교장선생이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박씨는 04학번으로 중앙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한번도 휴학 없이 4년 꼬박 다닌 끝에 2008년 2월 22일 졸업했다. 졸업 후엔 진로가 막막했다. 딱 한 달이다. 박씨는 집에 틀어박힌 채 인터넷으로 이곳저곳 입사지원서를 냈다. 20군데 정도 원서를 냈지만 연락이 온 곳은 두어 곳. 한 곳은 면접 보러 갔지만 마음에 안들어 나왔고, 한 곳은 신협이었는데 다행히 합격이 됐다. 일단 금융권이서 선망의 직업이었지만 박씨는 오래지 않아 그곳이 자신과는 맞지 않다는 걸 알았다. “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요. 일도 일이지만 사람 중심적이죠. 같이 어우러지고 자유롭고, 그래서 그것을 통해 에너지를 받아 열심히 일하는데 그곳은 너무 경직돼 있었어요. 사람들은 좋은데 일하는 분위기는 저랑 안맞았어요. 고객들에게 보험을 팔아야 하는데 장점만 이야기해줘야 하니까 괜히 사기 치는 것 같기도 했구요.”

박씨가 신협에 들어간 지 1년쯤 지났을 때였다. 학생 때 장학금을 받아서 알고 지내던 우양재단 국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부 얘기를 나누다가 ‘우양재단이 직원을 뽑으니까 지원해보라’고 했다. 고민하다가 2~3개월 후 다시 연락이 왔을 때는 마음을 굳혔다. 그때는 박씨가 이미 주윗사람들의 조언을 통해 ‘금융권에 있으면 지금은 당장 편해도 나중엔 사회적인 역할도 줄어들고 통일이 되어서도 기여할 부분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비록 처음엔 고달프겠지만 의미있는 일을 하자’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2009년 6월, 그는 두 번째 직장인 우양재단에 입사했다. 그는 재단에서 탈북자를 담당하고 있다. 형편이 어려운 탈북 청소년이나 청년을 선정해 장학금이나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탈북자들의 공통점은 죽음을 무릅쓸 만큼 고생했고, 그 고생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지금도 그 고생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박씨와 얘기를 나누면서는 고생이 고생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낭만처럼 들렸다. 무슨 이유일까. 툭하면 웃는 그의 얼굴 표정 때문일까. “분명 저도 고생이 많았죠. 그렇지만 제 주변엔 항상 좋은 분들이 많이 계셔서 커버가 된 것 같아요. 제 좌우명은 ‘밝게 살자’는 겁니다. 비관은 비관을 낳으니까요. 기왕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거죠. 일부러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밝고 유쾌한 사람들을 자주 만나서 얘기하다보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문제도 풀리거든요. 사회를 보는 것도 기왕이면 나쁜 쪽보다는 좋은 쪽을 보려고 하죠.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해요.”

   
▲ 유연한 생각, 편안한 말투, 평온한 표정의 박영철 주임과 얘기하다보면 어느새 그가 탈북자라는 걸 잊고 만다. ⓒ유코리아뉴스

그는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신앙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힘든 순간순간 고비고비엔 자신을 신뢰하고 밀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그들을 만나면서다. 인생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받쳐주고 밀어주면서 더불어 산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들의 삶을 보면서다.

박씨는 바쁜 재단 일 와중에도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모교인 중앙대 사회복지대학원이다. 석사 과정을 마치면 박사 과정까지 밟을 생각이다. 소외된 사람들을 좀더 체계적으로 돕고 싶기 때문이다. 박씨가 현재 구상 중인 석사논문 내용은 탈북자 정책과 일반 복지 정책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탈북자 정책이 지금 어느 수준이고 왜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자는 것이다. “2만 5000명의 탈북자들은 나중에 통일 되면 북한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남한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아는 탈북자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것을 알려서 탈북자들을 위한 예산이나 복지정책이 왜 필요한지를 잘 설득하는 게 제 역할인 것 같아요.”

통일을 향한 장기적인 비전을 묻자 그는 “아직은 밝힐 수 없다”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할 게 많다”고 말했다. 결혼 후 아내와 함께 통일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가겠다는 강력한 의지인 셈이다.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성원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 박혜연 2015-01-19 22:15:44

    이런 탈북자들이 많이있어야 통일이 될수있습니다! 종편방송이나 보수언론에 출연해 입만 나불나불해대며 말꼬라지가 개판인 유명탈북자들을 보면 상종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삭제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