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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만이 나뉨을 막을 수 있습니다[북한방문 기행문] 이번 여행,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눈물….

감사로 시작한 여행

   
▲ 박상진 LA 기윤실 실무간사

인생을 살다보면, 잊지 못할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2012년 9월이 그러한 순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 하지만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LA 기윤실과 함께 중국과 북한을 돌아보는 북방선교여행에 동행한 것입니다. 짧은 일정과 제한된 경험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귀한 기회를 가지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번 북방선교여행은, 참가자들의 일정으로 인해 LA 기윤실이 후원하는 러시아, 중국, 북한 3개국 중, 중국의 연변지역과 북한의 라진,선봉 (줄여서 라선이라고 부릅니다)만 방문하였습니다. 여행의 목적은 중국 연변 지역의 조선족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태환장학금 수여식에 참가하여 아이들을 격려하는 일과, 북한에 들어가 LA 기윤실이 진행하는 사랑의 빵 공장 현황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운영방안을 논의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교회개혁 관련 단체 및 대북지원 단체와의 협력사역을 위해 미리 엘에이를 떠났던 저는, 9월 12일 인천공항에서 반갑게 일행들을 만났습니다. 약간의 흥분과 긴장감을 안고 연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두 시간의 비행 후 연변 땅을 내려다보며,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만날 사람을 만나고 필요한 일을 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여정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랑과 희망을 전하는 태환장학회

한국의 어느 시골 역 같은 연길 공항에 도착을 하니 사랑의 빵 공장 일을 맡아서 하는 조선족 직원 분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국과 북한의 모든 일정에 동행하며 운전과 안내로 수고를 해 주어 감사했습니다. 연길 시내로 들어오니 한국의 변두리 같은 풍경이었지만,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곳곳에 건물과 도로를 세우고 급속히 발전해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연길, 도문, 훈춘, 용정시 등로 이루어진 연변조선족자치주 60주년을 맞아 대규모 경축행사가 있었고 곳곳에 축하 표어와 기념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 (중국의 동북지역인 연변의 고구려, 발해 등의 한반도 관련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한민족의 숨결이 살아있는 이 지역을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한 때는 200만명 가까운 조선족이 살던 연변 지역이, 현재는 100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고 그 자리를 한족들이 채우고 있었습니다. 수십만이 넘는 조선족이 돈을 벌러 한국에 나가 있다고 합니다. 조선족 인구의 감소와 가족의 해체는 중국동포사회의 심각한 사회문제입니다. 많은 가정의 자녀들이 엄마나 아빠가 없이 자라고, 조부모의 손에 크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탈북한 여성들이 낳은 아이들입니다. 굶주림으로 북한을 탈출한 많은 북한주민들이 아직도 중국 곳곳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고 탈북여성들은 살기 위해서 한족이나 조선족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한 채 헤어지는 경우가 있고, 그 사이에 낳은 아이들은 방치되거나 버려지고 있습니다.

 

   
▲ LA 기윤실이 돕는 북한의 고아원 아이들 ⓒLA 기윤실(자료사진)
   
▲ 중국 조선족 학생을 돕기 위한 태환장학회 ⓒLA 기윤실(자료사진)

 

태환장학회는 바로 이러한 아이들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장학금 수여식이 열리는 국제호텔에 도착을 하니, 아이들과 선생님, 그리고 관계자들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 살아가는 조선족 학생들과 탈북 고아 11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품고 자랄 수 있도록 교육하는 자랑스런 선생님들을 시상하고 격려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행사의 표어가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행사 후, 참석한 사람들과 아이들이 함께 호텔의 뷔페식당에서 맛있는 밥을 먹었습니다. 할 수 있는대로 아이들을 많이 안아주고 격려해 달라는 관계자 분의 부탁을 기억하며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함께 밥을 먹은 아이들 6명 중, 4명이 고아였고 나머지 둘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인솔해 왔던 선생님이, 처음 이런 곳에 온 아이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의 행색이 초라하긴 했지만, 음식을 먹으며 서로 조잘대고 웃고 떠드는 모습이 밝아 보였습니다. 아이들을 안아주며 “너희들은 참으로 소중한 사람들이다. 너희들을 기억하고 돕는 손길이 있으니 꿈을 잃지 말고 살아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이 아이들에게 희망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내일의 일정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하루

둘째 날 아침 일찍 북한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북한의 통관소에서 소지품을 검사한다 하여 최소한의 짐만을 가지고 갔습니다. 연길에서 두 시간 정도를 달려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중국 세관인 권하 국경 출입국 사무소에는 긴 차량의 행렬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북한에 들어가 장사를 하거나, 관광을 하려는 중국인이었습니다. 라진,선봉 지역이 경제특구가 된 후, 많은 중국인들이 이 곳을 통해 북한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밀려드는 중국인의 행렬을 보며 북한이 급속히 중국화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습니다.

한 시간이 넘는 수속을 마치고, 드디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중국과 북한을 가르는 두만강을 바라보니 먼 길을 돌아서야 올 수 있는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느껴졌습니다. 두만강 다리를 건너며 나눔, 협력, 평화, 통일 같은 단어들을 떠올렸습니다. 북한의 원정리 출입국 사무소에 도착하자 해외동포처와 대외사업국에서 나온 안내원 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0대의 젊은 관리들이었던 두 사람은 북한에서의 일정 내내 우리들과 함께 다녔고, 친절히 대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국경에서 라선까지는 약 50분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지난 4월에 도로가 새롭게 포장되어 편하게 갔는데 이전에는 비포장 된 도로를 두어시간 걸려 갔다고 합니다.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어야 했기에 도로 양 옆으로 펼쳐지는 북한의 풍경을 눈으로 담았습니다. 남쪽의 어느 시골길 같은 정겨운 산천이 이어졌고, 드문드문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소 달구지를 끄는 사람, 밭에서 일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엄마 손을 잡고 가는 아이... 차 창을 사이에 두고 눈길이 마주친 이들은 흉작으로 말라있던 옥수수 밭처럼 삶에 지쳐 보였습니다. 특히 키가 160cm도 안 되어 보이는 인민군 복을 입은 젊은이들은 ‘고난의 행군’이 끼친 굶주림의 상흔을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선봉을 지나 라선 시에 들어오니, 첫 인상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생경했습니다. 흐린 하늘 아래의 잿빛 도시, 그 안의 사방 곳곳에 빨간색으로 칠해진 ‘선군정치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와 같은 구호들을 보며 마치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영화 속에서 보던 한국의 60년대로 돌아간 느낌도 들었고, 거리의 초췌해 보이는 사람들은 얼굴에 활력과 생기가 없어 보였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을 지닌 도시였다고 할까요.

하지만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고 사람들의 삶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 광장에 나와 웃음을 주고받던 젊은 연인들, 친절하고 씩씩하게 손님을 대접하던 식당의 ‘접대원’ 여성 동무들, 한 손은 먹을 것을 들고 한 손은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던 아버지, 어리광 부리는 아이를 조용히 타이르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화사한 빛깔의 옷을 입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젊은 여성들과 핸드폰을 손에 쥔 남자들을 보며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음을 느꼈습니다.

라진시의 중심에 있는 남산호텔에 짐을 풀은 일행은 바로 방문의 목적을 위해 움직였습니다. 먼저 미국에서 보낸 후원으로 운영되는 빵 공장을 둘러보았습니다. 라진 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사무실, 기숙사, 공장, 식당 등이 갖추어진 깨끗하고 현대적인 시설이었습니다. 현재는 빵 생산이 중단된 상태인데, LA 기윤실이 이 시설을 사용할 수 있을지 협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선봉시에 있는 작은 규모의 빵 공장을 방문했는데, 100g 크기의 빵을 매일 만들어 지역의 소학교에 공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재미동포들이 모은 사랑의 정성이 이렇게 쓰여지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습니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그들이 ‘찰리 선생’이라고 부르는 미국인과 재미동포 이 박사가 운영하는 제약회사도 방문했습니다. 4년 전에 라선 인민위원회로부터 인수하여 성공적으로 운영 중인 이 제약공장은 현재 약 17종의 양방, 한방 약을 생산하여 북한 주민들에게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지역의 79개 모든 소학교에 의무실을 세우고 약을 공급하려고 계획 중인데, 현재는 40군데에 약을 공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학교의 의무실 운영비가 약 100달러이고, 매달 8,000달러면 지역의 모든 소학교에 필요한 약을 공급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처음 시설비가 400달러 정도 별도로 듭니다) 열정적으로 이 일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설명하는 파란 눈의 미국인을 보며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북한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직접 그곳에 들어가 묵묵히 맡겨진 일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을 보며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곳에 들어가 북한주민과 함께 사는 이들이 미래를 앞당기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어둑해 질 무렵 숙소인 남산호텔로 돌아왔습니다. 호텔 앞에는 큰 광장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호텔 정문 위에 설치된 야외전광판에서 흘러나오는 조선중앙티비를 보고 있었습니다. 선전선동과 같은 뉴스가 끝나고 만화영화가 시작되니 아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큰 화면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만화를 보는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만화영화가 끝나자 또 다시 선전선동가가 흘러나왔는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자리를 뜨고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당국에서는 끊임없이 선전선동을 할지라도 사람들은 무관심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상징적인 장면을 보는 듯 했습니다. 길었던 하루는 그렇게 저물고 피곤한 몸을 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셋째 날, 아침 일찍 창밖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거리를 누비는 선전선동 차량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습니다. 김정은에게 충성을 바치자는 내용과 김일성부자를 찬양하는 노래가 1시간 정도 반복적으로 들려왔습니다. 소음공해와 같은 이러한 소리도 매일 들으면 무디어질까 궁금했습니다. 중국 관광객들로 붐비는 호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라선 해외동포처 책임자와 환담을 했습니다. LA 기윤실과 같은 해외동포들의 북한지원 사업을 관장하는 기관의 총 책임자였던 이 사람은, 우리에게 무산지역과 함께 라진에도 빵 공장을 세워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빵 공장의 후보지로 어린이에 관련된 모든 물품이 모이고 나누어지는 탁아 물품 보급소를 보여주었습니다. 낡은 건물과 조악한 물품들을 보면서 이 곳의 어려운 사정을 짐작했습니다.

그 후 라진시에서 가장 크고 좋은 시설인 라진유치원을 방문했습니다. 해외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곳임에도 건물과 시설이 낡아 보였습니다. ‘위대한 김정은 장군님의 참된 아들 딸이 되자’와 같은 표어로 이어진 복도를 지나며 북한 어린들이 수업하는 광경을 둘러보았습니다. 작은 교실에서 음악과 웅변같은 수업을 듣는 아이들의 얼굴은 밝았습니다. 식당에서 점심식사가 준비되어 살펴보니, 쌀밥과 된장 국, 감자 몇 알, 김치와 같은 반찬이었습니다.

그 후 라진 대극장에서 열리는 북한 어린이의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아이들의 노래, 기예, 웅변 등으로 이루어진 약 50분의 공연은 주로 북한의 동요와 김정은을 찬양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약 300여명의 관객들은 거의 중국관광객이었는데, 중국인들 앞에서 재롱을 떠는 북한 어린이들을 보며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왔습니다. ‘물품방’이라고 불린 기념품 가게에 들러 몇 가지 기념품을 사고, 관광지인 비파섬에 방문하여 라진의 아름다운 해변을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은 북한주민과 어린이들의 일상생활을 느낄 수 있는 곳을 보길 원했으나, 두 안내원 동무는 북한 주민과의 접촉을 가급적 줄이고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곳으로 안내하길 원했습니다. 어쩌면 손님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길 원하는 마음은 당연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존심 강한 그들은 더욱 그러했겠지요. 관광에 큰 관심이 없었던 저는, 그들이 보여주려는 것 이면의 사회를 보려했고 오고가는 길에 스치는 북한 주민의 삶을 느껴보려 애썼습니다.

많은 북한 주민들을 만난 곳은 장마당이었습니다. 재래시장인 라진시장을 둘러보았는데 적어도 2,000여명이 넘는 상인들과 거리를 메운 사람들로 가득했던 큰 규모의 시장이었습니다.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은 주민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농산물과 수산물, 그리고 거의 중국제인 생활용품을 팔고 있었습니다. 생김새가 다른 우리 일행을 중국관광객으로 여겨 중국말로 흥정을 하기에, 우리말로 대답을 했더니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북한주민들과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어 보았습니다. 가격을 흥정하다 농담을 던졌더니 순박하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겨웠습니다. 말씨는 달라도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디서나 반갑습니다. 일부러 돈을 더 주고 싱싱한 송이버섯과 나진의 특산물인 털게를 사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안내원과 함께 호텔 앞의 광장을 산책하며, 하루 일 마치고 밤바람을 쐬던 북한 주민들 틈에 머물러 있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나눔만이 나뉨을 막을 수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역시 선전선동 차량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잠을 깼습니다. 북한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생소한 경험이 계속되었던 2박3일의 일정이 아쉬웠습니다. 호텔 앞의 광장에서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북한 주민들을 바라보며 저들에게 속히 밥과 자유가 주어지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털털거리는 차를 타고 몇 일전 왔던 그 길을 따라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안내원들과 기념사진도 찍고 북한의 세관에서 우리들의 물품을 일일이 검사받고 다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중국 땅에 들어오니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우리를 안내하며 (동시에 감시했던), 안내원의 눈길이 사라진 탓인지 긴장이 풀렸습니다. 말없이 흐르는 두만강과 그 너머에 잠시 전까지 머물던 북한 땅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답답하고 안타까운 북한의 현실이 전해 준 엉킨 실타래 같은 머릿속의 상념 때문이었겠지요.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겪었던 경험은 진실의 일부일 수 있겠지만, 보고 왔던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니 그저 한숨과 눈물이 나왔습니다. 왜 이토록 힘겹게 살아가야만 하는지... 북한 주민들은 새로운 지도체제인 김정은 치하의 통제되고 억압된 사회 속에서, 생존권을 보장 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수도인 평양은 그나마 사정이 좀 낫겠지만, 평양 다음으로 발전한 경제특구 라선이 이 정도라면 다른 지역의 상황은 더욱 열악할 것입니다. 지난 시절 겪었던 극단적인 ‘고난의 행군’은 극복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힘겨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생존 자체를 위해 사는 모습도 마음 아팠지만, 자유의 날개를 잃은 채 살아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니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저 땅을 어찌해야 할까요.

이번 여행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눈물일 것입니다. 고통으로 눈물 흘리는 이들을 바라보며 함께 흘리는 공감의 눈물 말입니다. 어쩌면 눈물도 마르고 자존심만 남았을 그들이 “우리를 도와 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헤어진 지 60년, 서로를 잊고 살았지만 여전히 같은 음식, 같은 말, 같은 전통을 간직한 채, 같은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북한을 돕는 일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과 시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은 먼저 건져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왜 빠졌는지를 탓하는 것은 그 다음이 아닐까요. 주리고, 헐벗고, 목마르고, 갇힌 자를 돌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나눔만이 나뉨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번 여행은 이런 저런 이견을 넘어 북녘의 형제들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비록 부족한 역량이지만, 더욱 지혜롭고 투명하고 올바르게 이 일을 감당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글을 마치려니 노래 하나가 떠오릅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손잡고 이 노래를 부르는 꿈을 꿉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박상진(LA 기윤실 실무간사)

박상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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