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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과 평화통일론몽양 여운형 선생 70주기 추모강연회에서 언급 - 강만길 명예교수 “북미 수교가 북핵문제 해결의 지름길”

1947년 7월 19일, 미소와 남북, 좌우가 대립하던 혼란의 한반도에서 좌우 합작을 통해 남북 통일과 완전한 자주독립을 열정적으로 추진해 나가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의문의 피살을 당했다. 그가 추구했던 좌우합작운동이 무엇이고, 그것이 오늘 통일운동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되새기기 위한 70주기 기념 강연회가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주최로 18일 저녁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렸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평화통일시대에 다시 보는 몽양 여운형’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우리 민족이 처한 가장 큰 문제는 분단 문제”라며 “이 문제에 천착하다보니 자연스레 몽양 선생을 연구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강 교수는 “6·25전쟁을 겪음으로써 이 땅에는 평화통일론이 발붙이지 못할 것 같은 때가 있었고, 평화통일론은 곧 이적론으로 간주되기도 해서 조봉암 같은 이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며 “아직도 여러 가지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어떻든 이제는 평화통일론이 일단 정착되기는 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18일 저녁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몽양 여운형 선생 70주기 추모강연회에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평화통일시대에 다시 보는 몽양 여운형'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강 교수에 따르면 이 땅에서 평화통일운동의 시발점은 1946년 여운형,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운동이다. 여운형에 대해 강 교수는 “독립운동 혐의로 일제에 체포된 뒤 수감생활 뒤엔 언론운동을 했고, 조선인 중에서 해방을 가장 먼저 준비한 분”이라고 밝혔다. 해방 전 독립운동가들의 공통된 숙제는 ‘해방을 어떻게 맞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일본과 직접 싸워서 해방되는 것이었지만 형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독립군을 국내로 보내서 그들이 게릴라 활동을 하는 동안 독립이 된다면 우리의 지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해방 전 여운형은 만주군관학교 출신 박승환, 조선독립동맹군의 무정 등의 조직을 국내에 진공시켜 게릴라 활동을 하게 하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1944년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해방이 되자마자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해 강 교수는 “이름은 인민공화국이지만 이승만을 수반으로 해서 만든 것”이라며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해) 흔히 좌익이라고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좌익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진보라고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몽양 여운형

하지만 미소 연합국은 여운형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건국준비위원회나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한반도엔 38도선이 그어지고 미소 분할 점령에 돌입하게 된다. 강 교수는 “미소 분할 점령과 좌우 정치세력의 극심한 대립으로 통일국가 건설의 길이 험로에 빠지자 여운형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과 함께 평화적 방법에 의한 남북통일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한 정치단체로서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해 해방 후 역사상 최초의 평화통일운동의 길에 나서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좌우합작위원회에는 미군정을 비롯한 범국민적인 지지가 있었다. 미군정은 공산주의 지배를 막기 위한 목적에서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지했다. 언론과 타 정치사회단체도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다. <조선일보>는 1946년 6월 12일자 사설에서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어떠한 사상과 어떠한 의도에서든지 남북통일, 좌우합작이 아니고는 조선의 완전독립이 될 수 없음은 상식화한 국민의 총의이다. ... 우리는 국민으로서 좌우합작을 강행할 시기가 왔다”고 했고, 김구와 한국독립당도 “좌우합작의 성립은 민족적 양심과 민족적 열의로 보아 8·15 이후 최대의 수확”이라고 확고한 지지 입장에 섰다. 심지어 김일성도 이 같은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에 지지와 후원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제 정당·사회단체를 끌어들여 발족한 좌우합작위원회는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에 의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임시정부 수립 후 자주독립정신에 의한 신탁통치 문제 해결 △임시정부 수립 후 6개월 내 보통선거에 의한 전국민대표회의 소집, 국민대표회의 성립 후 3개월 내 정식 정부 수립 △완전한 보통선거 실시를 위한 전국적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의 자유 보장 △정치·경제·교육 등 모든 제도 법령의 균등사회 건설목표를 위한 국민대표회의 △임시정부 수립 후 친일파 민족반역자 정치를 위한 특별법정 구성 등의 원칙을 제시했다.

이처럼 좌우합작위원회가 탄탄하게 출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탄타한 국민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청 여론국이 1946년 8월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당시 설문 문항은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3개 중 어느 쪽을 찬성하는가?’라는 거였고, 이에 대해 자본주의가 14%, 공산주의가 7%, 사회주의가 70%였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강 교수는 “미소 분할 점령의 해방공간에서 극좌노선과 극우노선이 아닌 온건노선, 중간노선을 택한 사람이 많았고, 그 노선이 민족분단을 막고 통일조국을 실현할 수 있는 노선이라 이해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좌우합작운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 테러를 경험했던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살해되고 만다. 이에 대해 강 교수는 “이 적극적 민족운동가 살해범의 배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며 “그가 주도했던 평화통일운동단체 좌우합작위원회도 같은 해 10월 6일, 출범 1년 5개월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결국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일어났고, 분단은 고착되고 말았다. 강 교수는 “하지만 여운형의 평화통일 의지는 역사 위에 영원히 살아 있다”고 강조했다.

이 땅에서의 평화통일운동과 관련 강 교수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과 2000년 6·15 공동선언을 언급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의 두 지도자가 독재체제 강화를 위해 활용한 측면이 강했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평화통일’ 이야기가 남한사회에서 자연스러워졌다는 것이다. 6·15 공동선언에 대해서는 그 전까지 남측의 1민족 2국가 2체제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1민족 1국가 2체제의 연방제안이 ‘상당 기간 1민족 2국가 2체제안으로 가자’는 남측의 안을 북측이 수용하면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으로 귀결됐고 이 과정에서 통일논의가 상당히 진척됐다고 했다.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남북의 왕래가 잦아졌고, 노무현 정부의 10·4 정상선언은 개성공단을 넘어 해주공단, 중국이 아닌 북한을 통한 백두산 관광도 가능하게 했다. 강 교수는 이를 “국토가 통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우리의 분단 과정을 보면 1945년 국토가 분단됐고, 48년 정부 수립으로 국가가 분단을, 6·25전쟁으로 민족 분단을 맞았다”고 말하고, “통일 과정은 민족 통일이 먼저 되어야 한다. 6·15 공동선언은 여태까지 적이었던 남북이 서로 화해하고 협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족이 하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철도도 연결되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국토가 통일됐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강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유럽에서 평화를 말했는데 이걸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용기와 국민이 따라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청중의 질문에 클린턴 정부 때인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던 때를 회고하며 “그때 북미 수교가 이뤄질 뻔 했다. 그대로 갔으면 (국교가) 이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올브라이트의 방북 다음달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수교 얘기까지 나오던 북미 관계는 ‘올 스톱’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강 교수는 “북미 수교가 바로 북핵 문제의 지름길이라고 하면 문제가 생길까?”라고 청중들에게 반문한 뒤 “아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몽양 여운형 선생 70주기 추모강연회 참석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강만길 명예교수의 강연에 앞서 이부영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조국의 현재 상황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며 “70여년 전 몽양 선생 돌아가시기 전에 조국을 위해 엄청 고심하던 때와 지금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해도 미소 냉전이 가파르게 치솟던 그때와는 비교가 안된다. 몽양 선생이 나서던 때의 자세와 우리의 자세를 비교한다면 우리를 게으르다고 탓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강연회는 조광 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 등 200여 명의 각계 인사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김성원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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