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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이미 북한의 빗장은 열리고중국 평화발걸음 동행기(6)

8월 7일(화) 넷째날.

아침 6시 30분, 일찌감치 기상했다. 빡빡한 일정 탓에 피곤할 법도 한데 일행 중 불평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발해 유적지 영광탑이 있는 장백의 뒷산에서 혜산시를 조망한다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세 대의 택시에 나눠타고 산길을 올랐다. 아침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연신 산을 오르내리고 있다.

정상에는 순식간에 도착했다. 어젯밤 불빛만 보였던 혜산시가 바로 앞에 활짝 펼쳐져 있다. 코앞이지만 갈 수 없는 땅, 그래서 더 애절한 마음이 드는 땅. 느보산 위에 올라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봤던 모세의 심정이 이랬을까. 일행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를 찬양하며 ‘저 땅에 복음이 흘러가도록, 회복과 약속의 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 장백 영광탑 앞에서 바라본 북한 혜산시 전경. ⓒ유코리아뉴스 김성원

가이드 최 선교사가 수년 전 장백에서 꽃제비를 만났던 경험을 들려줬다. 그 아이는 장백 쪽 압록강 곁 나무 밑에 토굴을 파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병으로 죽고 자신은 고아원에 있다가 너무 얻어맞아서 강을 건너 탈출했다는 것이다. 최 선교사가 알고보니 꽃제비는 밀무역의 훌륭한 수단이었다. 한번 배달해주고 중국 돈 5원을 받는다. 물론 북한 국경수비대 쯤은 뇌물을 통해 얼마든지 무사 통과였다. 한마디로 장백은 밀수천국이란 게 최 선교사의 설명.

오전엔 이 지역의 한 조선족 교회를 방문했다. 라면, 옷가지 등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평화한국이 지난 6월 13일부터 7월 3일까지 개최했던 세이레기도회에서 나온 헌금으로 구입한 물품들이다. 이 교회 목사는 어떻게 해서 꽃제비 사역을 하게 됐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1994년 여름, 김일성이 죽고 그 해 말부터 본격적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혜산과 장백을 잇는 밀수가 성행했다. 꽃제비들도 대거 몰려왔다. 극심한 고난의 행군기인 95~97년엔 꽃제비들이 장백의 거리나 시장에 몰려와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거나 하수도에 버린 음식 쓰레기를 긁어먹기도 했다. 그때부터 꽃제비들을 데려다가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했던 게 지금의 북한 사역이 됐다. 사명감을 가지고 북한 사역을 시작한 게 아니라 몰려오는 꽃제비들을 돕다보니 자연스럽게 북한사역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북한 사람들을 많이 돕다 보니 몇 년 전엔 중국 공안에 잡혀간 적도 있다.

현재 장백 쪽엔 경비가 없고 혜산 쪽엔 100m마다 하나씩 경비 초소가 있다. 하지만 중간중간 얼마든지 강을 건널 수 있다는 게 이 목사의 설명이다. 이유는 뇌물을 통해 국경경비대도 눈을 감아주고 있다는 것. 혹 중앙에서 감찰을 내려와도 뇌물만 주면 얼마든지 그냥 넘어가고 만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밀수를 통해 물질이 왕래하고, 사람이 왕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복음도 왕래하고 있다는 것!

꼭꼭 닫혔던 북한의 빗장이 열리기 시작한 것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90년대 중반부터다. 외지 사람들이 들어가기 힘드니까 하나님께서 북한 내부의 식량난을 통해 북한 사람들 스스로 밖으로 나오게 하셨다는 게 목사의 얘기다. 그는 “중요한 것은 3.8선이 아닌 압록강, 두만강 변경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며 “북한 고난의 행군 직전에 중국 쪽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 교회가 세워진 것도 북한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했다.

   
▲ 세이레기도회 헌금으로 구입한 물품을 장백의 한 교회에 전달하기에 앞서 기도하고 있는 일행들. ⓒ유코리아뉴스

북한 사람들에 대한 강한 기대감도 감추지 않았다. “저분들(북한 사람들)은 우리가 갖지 않은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DNA죠. 그들은 우리가 갖지 않은 충성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체질은 온실에서 자란 화초처럼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하지만 저 땅 사람들은 못 먹고 못 입어도 고난을 견딥니다. 우리는 오직 ‘나 자신’에 초점을 맞추지만 저들은 김일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 김일성을 예수로만 바꿔주면 됩니다. 저 사람들이야말로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북한을 바라보면 이해가 잘 안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 땅 사람들을 저토록 오랫동안 고난에 처하게 하시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연단을 받아 저 땅의 복음화를 위해 쓰임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를 나오는데 마당에서 조선족 교인들이 윷놀이를 하고 있다. 우리네 윷과 비슷하다. 바가지 머리를 한 네 살 배기 아이는 마치 60년대 남한의 시골 아이 같은 얼굴이다. 헤어지는데 조선족 교인들의 인사말이 인상적이다. “갔다오시오!” 인사말 한 마디에서도 그들은 우리 민족 고유의 친근함과 정감을 지켜오고 있었다.

이제부터 차는 백두산을 향해 계속 달렸다. 갈수록 나무는 더 키가 높고, 물살은 더 빨랐다. 백두산을 오르는 길은 동서남북 네 갈래가 있다. 동쪽은 북한 땅이기에 막혀 있고, 한국인이 주로 오르는 길은 북쪽과 서쪽 길. 그 중 우리는 서쪽 길(서파)을 택했다. 수많은 계단이 있는 길이지만 백두산 절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길이다. 다행히 날씨는 구름만 약간 끼었을 뿐이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백두산 중턱 계단 입구까지 차를 타고오면 될 정도로 중국은 편안한 백두산 코스를 만들어놨다. 하지만 우리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자기들 마음대로 불도저로 밀고 길을 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 중턱에서 바라본 백두산 아래는 끝없는 구릉과 산이 펼쳐져 있다. ⓒ유코리아뉴스

1000개가 넘는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면서 자꾸 위와 아래를 번갈아 봤다. 혹시나 구름이 끼어서 천지를 못보는 것 아닌가 하는 조바심과 백두산 위에서 저 너른 중국 땅을 바라보며 기상을 품었을 민족선배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다. 저질 체력 탓인지 절반도 오르지 않았는데 다리가 자꾸 후들거린다. 조금씩 조금씩 정상에 가까워졌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비도 몇 방울 내렸지만 백두산은 끝내 우리 일행에게 자신의 속살 천지를 선명하게 열어 보여주었다. 잔잔하고 푸른 천지 앞에서 일행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사진을 찍고 찬양을 불렀다. 춤을 췄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이었다. 깨끗한 천지 앞에서 마치 자신의 죄를 참회하듯 눈물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머문 1시간 동안 천지는 자신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줬다. 다시 백두산 아래를 쳐다봤다. 백두산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저 언덕과 산들을 바라보는 민족 선배들의 꿈은 어땠을까. 그 꿈의 사이즈, 깊이는 어느 정도였을까.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 일행 앞에 활짝 펼쳐진 백두산 천지. 이날 비록 먹구름이 끼고 날씨도 쌀쌀했지만 1시간이 넘도록 천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유코리아뉴스

   
▲ 일행들이 백두산 정상에서 찬양을 부르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길이 다리가 더 후들거렸다. 부드럽게 이어진 백두산 자락들을 따라 내려가며 또 다시 꺼이꺼이 백두산의 눈물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북한을 거쳐왔지만 이제 북한마저 쇠락했는데 너희는 도대체 뭣들 하고 있느냐.” 그것은 꾸짖음이라기보다 눈물의 호소 같았다. 돌무더기 광개토대왕릉, 풀섶 사이의 장수왕 무덤으로부터도 호통을 들었는데 또 다시 혼이 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역사에 대한 무지 속에서, 민족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다는 자책이리라.

남한에서는 멀게만 느껴지는 여기는 만주 땅. 만주에 선다는 것, 광야에 선다는 것, 그것은 다르게 살기로 결심한다는 것. 이전의 분단을 걷어 차버리고 화들짝 깨어 통일을 살고 고구려를 산다는 것. 복음으로 세계를 품는다는 것!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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