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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지혜를 보다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 프리모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1.

   
▲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레비 지음)
이 오래된 책이 다시 생각난 것은 탈북자들의 삶을 취재하면서부터다. 배고프다, 살고 싶다, 원초적인 생각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유일한 기준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한 프리모 레비의 기록을 펼치면 한 편의 시(詩)가 맞아준다.

(전략)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 진흙탕 속에서 고되게 노동하며 / 평화를 알지 못하고 /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 예, 아니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
생각해보라 이것이 여자인지. /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이름도 없이, / 기억할 힘도 없이 / 두 눈은 텅 비고 한겨울 개구리처럼 / 자궁이 차디찬 이가. /
이런 일이 있었음을 생각하라.

(후략)

수용소를 경험했다는 탈북자들의 삶도 다르지 않다.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인간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다. 물론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심장까지 내어줄 것 같았던 ‘교회오빠’가 군대에 가면 초코파이 하나 때문에 욕설을 퍼붓는다. 존경받던 대학교수도 감옥에 들어가면 방장의 눈치를 살피며 애교를 부린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가 가장 좋을 때, 그러니까 품격과 고상함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일 때의 자기의 모습이 진짜 자신인줄 알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잘 안 하는 것 같다. 이것이 인간이다.

2.
어쨌든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인간은 변한다. 하물며 죽음과 생명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 갇혔던 레비는 그곳에서 항상 같은 꿈을 꿨다.
‘내 집에 돌아와 친한 사람들 속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강렬하고 구체적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러나 청중들이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게 빤히 보인다. 그뿐 아니다. 그들은 완전히 무관심하다. 그들은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정신없이 나눈다. 누이가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떠난다.’

이것은 꿈이었지만, 사실이었다. 히틀러와 그의 선전장관인 괴벨스가 진실을 위장하는 데 전문가였다고 해도, 강제 수용소라는 거대한 기관의 존재를 독일 국민에게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히틀러에게 대항하는 것이 극도로 위험한 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나치스가 정권을 잡은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수십 만의 독일인들이 수용소에 갇혔다.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유대인, 프로테스탄트, 가톨릭교도들이었다. 온 나라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수용소에서 고통받다가 죽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용소의 존재를 몰랐거나 수용소를 요양원으로 알았던 독일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수백만의 독일인들은 불타는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와 진흙탕에 무릎을 꿇은 채 능욕당하는 남녀 유대인들을 구경했다. 이것이 인간이다.

3.
그럼에도 인간에게 희망을 갖는 이유는 ‘학대받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가해자를 증오하며 그것을 동력으로 살아가지만, 레비는 글을 쓰는 방법을 택했다. 죽어간 희생자들을 위한 작업이었단다.

많은 탈북자들도 북한 당국에 대한 미움을 동력으로 삶을 꾸린다. 대북지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북한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이 바닥에서 정통한 어느 전문가는 그들이 통일과정에서 “테러리스트”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언론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 중 일부일 뿐이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학대받은 자의 지혜’를 보여준다.

내가 아는 탈북자들은 북한이 수해를 당했다고 하면,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으로 북한을 돕는다. 북한의 지인들과 연락이 될 경우, 중국을 통해 현금을 보내주기도 한다. 월급을 고스란히 보내어 마을 하나를 살리기도 한다. 이것이 굶어 본 사람만이, 억압당해 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지혜는 훗날 남과 북을 화해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소설가 이외수는 시골 분교에서 소사로 있던 시절, 개구리가 숨어 있는 돌을 귀신같이 알아내는 아이를 보고 말로나 글로는 전달할 수 없는 심안이 있음을 깨쳤다고 하였다. “딱 보면 아는 경지를 말이나 글로 전달할 수는 없다. 심안에 비치는 것들은 심안으로만 전달된다”고 말이다. 생사를 넘나든 탈북자들의 심안도, 레비의 심안도 우리가 100%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훗날 레비는 “당신의 책에서는 독일인들에 대한 증오도 원한도 복수심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다 용서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의 대답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만일 내가 실제로 우리의 박해자들 중 한 명을, 아는 얼굴을, 그 오래전 거짓말을 다시 마주쳤다면 아마도 증오와 폭력의 유혹에 굴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나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을 쓸 때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나 복수심을 품은 사람의 날선 언어가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들을 사용하고자 했다. 나는 내 언어가 객관적일수록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을수록 신뢰를 주고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정당한 증언이 제 기능을 할 것이며 바로 그때 신판의 장이 마련될 것이다. 심판관은 바로 여러분이다.”

극한의 상황에 처해 본 레비와 탈북자들의 그것이기에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가장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지혜, 이것이 인간이다.

 

이범진 기자  poemgene@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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