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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강가에서 비로소 분단을 느끼다중국 평화발걸음 동행기(4)

8월 5일(주일). 오늘은 단동의 한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서울의 한 교회가 운영하는 이곳은 한인 선교사들을 위한 영적 힘의 공급원이자 연합의 매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한다. 그 교회는 이밖에도 창춘(長春), 베이징, 칭다오(靑島), 다렌 등에서도 교회를 통해 이 같은 사역을 펼치고 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된 ‘한 교회’의 역할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최근 한인들이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으로 많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교인 숫자도 자연스럽게 줄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는 대구에서 온 청소년 팀 40여명도 예배에 참석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관광객을 뺀다면 50명 미만이 매주 예배를 드리고 있는 셈이다.

   
▲ 압록강단교에서 바라본 단동 시내(위)와 신의주(아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신의주가 훨씬 잘 살았지만 지금은 완전 역전된 모습이다. ⓒ유코리아뉴스 김성원

예배 후 압록강단교(斷橋)로 향했다. 6.25전쟁 중 UN 군의 공격으로 다리가 끊겨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압록강단교는 1908~10년 일본이 중국 쪽에서 물자를 빼내기 위해 건설했다. 압록강이든 두만강이든 강의 중간이 북중 국경이라고 한다. 현재 압록강단교 중간까지는 일반 관광객도 돈만 내면 걸어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북한 쪽 단교는 교각(다리를 떠받치는 기둥)만 남아 있다.

각종 개발에 관광객들로 들떠 있는 단동과는 달리 교각 건너 북한 땅 신의주는 조용해 보였다. 간혹 수영하는 아이들, 자전거를 타고가는 사람들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둥그렇게 돌아가는 전망대는 꼼짝 않고 서 있고, 여객선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1년에 한 번, 시커먼 어린이들을 가득 채운 여객선이 이 일대를 한 바퀴 돌지만, 중국 쪽 관광객들에겐 마치 ‘동물원 원숭이 구경거리’로 인식될 정도로 초라한 수준이라고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단동보다 훨씬 잘 살았다는 건너편 신의주.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돼 보였다.

일행은 배를 타기 위해 수풍댐 근처까지 버스로 달렸다. 가는 길에 오른편에 보이는 호산장성(虎山長城). 호랑이가 누운 꼴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 산성은 고구려 당시 박작성이라고도 불렀다는 곳이다. 원래 수많은 한국 관광객이 오르는 곳이지만 시간을 단축하느라 호산장성은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호산장성을 지나자마자 끝없이 펼쳐지는 언덕과 평야. 북한 땅이다. 원래는 두만강만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지금은 철책선까지 막고 있다.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해 중국측이 지난해부터 쳐놓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철책선 너머, 두만강 건너편 북한 땅을 바라보며 ‘나는 저 땅의 회복을 위해 무얼 하고 있는가’하는 자책과 각오가 동시에 밀려왔다.

   
▲ 압록강 건너편 삭주군 청수면 풍경. 강 속에서 뭔가를 채취하는 사람들과 무너질 듯한 건물들이 안개로 인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유코리아뉴스

길 오른편은 지금은 마음으로만 가야 하는 북한 땅이지만 왼편은 온통 중국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순박하게 생긴 범부(凡夫)가 골목에서 나오면서 복숭아를 한 입 깨물어 먹는 모습. 우리네 시골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곳이 옛 고구려 땅이었음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장면이다.

압록강변에서 배를 탔다. 조그만 배에 일행은 우리밖에 없다. 압록강 폭은 약 100~150미터 남짓 되보였다. 배는 이내 북한 땅 가까이 접근했다. 옥수수밭, 낡은 집들, 물고기 잡는 사람들, 초병들, 북한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북한의 삭주군. 그래도 이 마을은 형편이 괜찮아 먹고 살 만하다니 나머지 내륙 지역의 형편은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 군인 쯤으로 두 사람이 배에 탄 일행이 손을 흔들자 활짝 웃어보이고 있다. 앉아 있는 사람은 한참 동안 손을 흔들기도 했다. 배는 '청수'라고 찍혀 있는 것으로 봐 삭주군 청수면에 등록된 배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 여인은 수영을 하는지 고기를 잡는지 물속에 계속 머물러 있다. ⓒ유코리아뉴스

   
▲ 압록강 건너 삭주군 청수면에서 만난 소달구지. 잠든 한 사람을 태운 채 누런 소가 힘겹게 달구지를 끌고가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배는 마치 곡예운전이라도 하듯 북한 땅과 불과 10m 앞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수풍댐 근처 압록강은 늘상 안개가 피어올라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순식간에 안개가 걷히고 코앞에 펼쳐진 북한 땅은 마치 꿈결같다. 들판을 자유롭게 다니며 풀을 뜯는 젖염소들, 수영하는 아이들…. 간혹 손을 흔들어주는 북한 군인들, 아이들 모습이 정겹다. 안타까운 장면도 많았다. 식량 증산을 위해 강변 절벽에까지 밭을 일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산사태까지 난 곳도 있었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던 화학비료공장은 한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 공장 건물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폐허가 되어 있다. '몰락'이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이 안되는 풍경이다.

배는 1시간 반 가량이나 상류로 거슬러올라갔다. 멀리 대형 댐이 보인다. 수풍댐. 일제 시대 건설한 이곳은 당시만 해도 아시아 최대 규모의 수력댐이었다. 현재는 중국이 돈을 대고 거기서 나오는 전기는 북한과 중국이 반반씩 가져간다고 한다. 수풍댐 옆 북한 땅 삭주군 수풍면 산 중턱엔 ‘위대한 김일성-김정일 주의 만세!’라는 구호가 커다랗게 적혀 있다.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 초라한 현실을 견뎌보려는 발버둥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 수풍발전소 오른편 삭주군 수풍면 산자락에 있는 구호. '위대한 김일성-김정일 주의 만세!'라고 되어 있다. ⓒ유코리아뉴스

식사는 수풍댐 앞 압록강변의 쏘가리 매운탕 집. 조선족이 운영하고 있었다. 압록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건너편 북한 땅이 지척인 곳에서 되물었다. '북한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지만 압록강은 그저 말없이 흐를 뿐이었다.

해질녘이 되어서야 집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곳곳에 눈에 띄는 커다란 봉분. 마치 우리나라 경주에 온 느낌이 들었다. 원래 고구려 당시 봉분만 1만 3000개에 달했지만 보존된 것은 200여기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중국 측이 압록강을 개발하면서 수장(水漿)됐거나 훼손됐다고 한다.

집안은 고구려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터했던 곳이다. 지금도 고구려 당시 성터가 시내 한가운데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도시 인구 200만명 중 조선족은 2만명이 채 안된다. 동북3성 전체가 지금 조선족의 존폐 문제로 위기를 맞고 있다. 집안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한 불고기 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쌈장의 장맛이 일품이다. 한국보다 더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마치 고구려의 진수를 맛본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숙소에서 하루를 조용히 뒤돌아봤다. 압록강변에서 보았던, 아니 만났던 북한 사람들. 아무렇지 않게 물고기를 잡으며, 자전거를 타며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손에 닿을 듯 지척의 거리, 북한은 이리도 가까이 있는데 가까이 할 수 없는 현실.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현실, 그것이 이별이고 분단인 것이다. 남한에서는 별로 느낄 수 없었던 분단의 현실감이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배를 타고 만난 중국 국경에서 비로소 느껴지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단둥에서 집안까지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타며 차창 밖에 비친 냇가, 들녘, 산의 생김새, 집 모양,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고구려, 발해를 생각했다. ‘고조선의 정체성 회복’이란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만주를 제 집 삼아 누볐던 그들. 하지만 조선 이후 우리는 한반도로, 그리고 6.25 전쟁 이후엔 남한으로 쪼그라들었다. 이제 ‘동북아 평화공동체’라는 기상을 회복하는 일, 그것이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지 말아야 할 2000년대를 살고 있는 기성세대의 몫이 아닐까.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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