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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와 북한선교 -라디오를 중심으로-유관지 북한교회연구원장 강의안 전문

 
들어가며

   
▲ 유관지 박사

강연자에게 주어진 강연의 제목은 “미디어(방송·신문·인터넷·잡지)와 북한선교”이나 그 가운데에서 방송, 방송 가운데에서도 라디오와 북한선교에 대해서만 말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①라디오를 통한 북한선교의 발자취와 기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고 ②라디오를 통한 북한선교의 현황과 기법(技法) 등을 말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다른 매체들에 대해서도 말하려면 주어진 시간(120분)으로는 불가능하고, 만일 그렇게 한다면 틀림없이 수박 겉핥기가 되고 말 것이며 ③강연자가 오래 종사해 온 분야가 라디오를 통한 북한선교이기 때문이다.

이 강의에서 라디오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한 것은 상당히 아쉬운 일이다. 북한주민들이 외부 정보를 획득하는 수단들 가운데 라디오의 순위가 점점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국방연구원(KIDA)의 박대광· 김진무 연구위원이, 2008년과 2009년에 탈북해 국내에 정착한 탈북민 71명(남 33명, 여 3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밝혀진 것을 보면 응답자들은 북한에서 거주할 당시 외부정보 획득 수단을 ①DVDㆍCD(21.8%), ②TV(18.3%), ③중국인(17.6%), ④라디오(15.5%), ⑤휴대전화(6.3%), ⑥전단지(5.6%) 순으로 꼽았다.(이 조사결과는 KIDA가 발간한 「국방정책연구」2012년 봄호에 “북한으로의 외부사조 유입 확대방안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어 있는데 연구자들은 탈북민들이 외부정보 획득 수단으로 국내 민간 대북방송이나 미국의 대북방송, 군에서 운영하는 자유의 소리 방송 등을 지목하는 비중은 아주 낮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참고로 이 조사내용을 좀 더 소개하면 북한 이탈 주민들은 북한 거주 당시 가장 좋아한 콘텐츠로 한국소식(22%), 드라마(19%), 중국(13%) 및 한국으로 가는 방법(10%), 음악(7%), 김정일에 대한 정보(6%) 순으로 응답했고, 감시와 단속이 느슨한 자정부터 오전 5시 사이에 주로 정보를 얻었다고 답했으며 외부정보를 듣게 된 동기는 호기심(48%)과 경제적 이유(30.1%)를 가장 많이 꼽았고, 빈도에서도 `수시로 접했다'는 응답이 52%에 달했다. 획득한 외부정보의 전파는 구두로 했다(31.5%)고 답했지만 혼자만 알고, 유통하지 않았다(56.3%)는 응답자도 많았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북한 정권과 체제에 대한 인식변화에 영향을 준 정보에 대해서는 문화정보(39.3%), 뉴스(22.6%), 경제정보(19.1%) 등의 순으로 답했지만 군사정보와 선전정보라고 답한 응답자는 각각 1.2%로 매우 낮았다.)

이는 많지 않은 인원을 대상으로 한 단회성(單會性) 조사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북한에 남한의 CD나 DVD 등 영상물의 유입이 늘고 인기가 있어서 이런 영상물들을 통해 ‘한류(韓流)’가 조성되고 있다는 사실이 꾸준히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계량화(計量化)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라디오는 이렇게 보편적인 영향력은 적어지는 미디어이기는 하지만 북한선교의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고, 지금도 선교적 효과가 크다는 사실이 꾸준히 입증되고 있어서 이번 기회에 라디오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1. 한국교회의 북한선교는 라디오로 시작되었다.

한국교회(남한교회)는 언제부터 북한선교에 대한 인식을 갖고 북한선교를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되었을까?
현재까지 발견된 자료로는 1946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방송(CBS: 이하 ‘CBS’라고 함) 설립에 관한 기록에 근거를 두고 이렇게 말하게 된다.

기독교방송은 해방 직후부터 미국의 일부 선교기관들에 의해 설립이 추진되었는데 그 주된 목적은 바로 북한에 복음을 전하려는데 있었다.「CBS 50년사」는 이 점에 대해,

기독교는 해방 직후부터 방송매체의 위력과 효용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남과 북이 나뉘어 있었고, 기독교 선교가 왕성했던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공산치하의 북한에 갇히게 된 기독교인들은 탄압을 받고 있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줄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전파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일본에 의해 본국으로 추방되었던 미국 선교사들은 시청각(Audio Visual)의 활용을 익혀 한국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어 더 한층 관심을 갖게 됐다.

라고 적고, 이어 1946년에 라벰코(RAVEMCCO: Radio Visual Education and Mass Communications Committee 라디오 및 시청각복음전도협의회)라는 기관에서 남한과, “교회가 없어졌다고 생각”되는 북한에 전도할 효과적인 방법인 방송을 위해 디캠프(O.E. De Camp 한국 이름 甘義道)선교사를 한국에 보내고, 한국기독교연합회 산하에 음영위원회가 설치되어, 1949년 6월 15일에 공보처로부터 방송 설립 허가를 받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사사편찬위원회, 「CBS50년사」(서울, CBS, 2004), 24-27.
북한선교에 대한 초기의 기록으로는 1946년부터 조선기독교연합회(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을 지낸 김관식(金觀植) 목사가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1947년 4월호에 영문으로 기고한 “The Christian Church in Korea"를 들 수 있다. 김관식 목사는 이 글에서 한국의 신학교육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는 신학생들의 표본으로 서울에 있는 장로교신학교를 언급하려 한다. 이 학교에는 306명의 학생들이 등록되어 있으며, 그들 중 80퍼센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며, 적게는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또한 교육의 일부를 따로 받는 여학생들 60명이 출석하고 있다. 학생 중에 대략 3분의 1은 북한에서 왔으며, 그들은 고향 땅에 복음의 메시지를 들고 돌아갈 수 있을 기회의 때를 대비하여 스스로를 준비하고 있다.(밑줄 필자)“라고 하였다. 이 ‘서울에 있는 장로교신학교’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장로교의 다른 신학교는 개교하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이와 같이 분단 직후부터 북한선교를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기독교방송의 개국은 6·25 전쟁으로 인해 지연되었다가 전후에 다시 개국작업이 진행되어1954년 12월 15일에 창사봉헌예배를 드렸다. 이 창사봉헌예배의 거의 모든 순서에 이 방송을 통한 북한선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였던 유호준 목사는 이 예배의 취지 설명에서,

(전략) 한국기독교연합회는 미국 교회의 도움에 감사를 보냅니다(중략) 이번에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특수상황을 고려하여 북한동포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교수단으로서 방송국을 설립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후원을 보내 주었던 것입니다.(중략) 공산정권 치하에서 예배의 자유마저 잃고 역사적 질곡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북한동포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통일에의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게 한다는 엄청난 사명 때문입니다. 기독교방송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국민정서 함양과 기독교가치관의 정립에 기여함은 물론 분단된 한반도를 복음에의 신앙을 통하여 다시 하나로 통일하는 민족의 역사에 동참할 것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의 모든 조직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기독교 교회와 하나님을 향한 민족적 신앙에서는 아직도 하나이며 지상의 그 어떤 권세도 이를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이제 기독교방송이라는 현대적 선교수단을 지원하고 활용하여 국내 선교는 물론 민족통일의 역사적 과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기독교방송을 이 땅에 탄생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뜻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믿어집니다.

고 하였고, 초대국장인 감의도 선교사는 취임사에서,

(전략)이 방송국을 통해 남한 동포들에게 일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더 큰 사실은 아직도 철의 장막 뒤에서 핍박과 고난을 받고 있는 북한의 형제들에게도 우리 주님의 위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후략)

라고 하였다. 브리스 주한미국대사와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이헌구 최고위원의 축사에도 통일과 북한복음화에 크게 기여할 방송이 태어난 것을 기뻐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축사순서를 맡은 한경직 목사는 전파를 통해서 방방곡곡의 우리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특별히 철의 장막 배후에서 신음하는 우리 동포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된데 대하여 무어라 감격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위의 책, “통계자료”편 74-79.)

CBS 창사봉헌예배는 이와 같이 마치 북한선교를 위한 모임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CBS가 이와 같은 설립취지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지만 한국교회의 북한선교는 라디오를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꼭 기억되어야 한다.
CBS에 이어, 1956년에 극동방송이 설립되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6·25의 후유증, 장로교 고려파 분립(1951년), 기독교장로회 분립(1953년), 통일교 발생, 감리교 총리원파와 호헌파 분열(1955년), 전도관 발생(1955년), 등 어렵고 어지러운 형편 가운데에서 별다른 일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극동방송은 북한선교에서 폭을 더 넓혀서 구소련·중국·몽골 등 공산권 전반을 선교대상으로 했고 (극동방송이 1956년 12월에 개국할 때의 이름은 ‘한국복음주의방송국’이었는데 1961년 1월에 ‘국제복음주의방송국’으로 바꿨다. 여러 언어로 해외 여러 나라(공산권)를 대상으로 방송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꾸었다.) 이에 적합한 지점에 원거리 방송을 위한 설비를 갖춘 송신소와 연주소를 건립하고 방송을 시작하였다.

다소 시간의 간격을 두고 1973년에는 아세아방송이 역시 공산권선교를 목적으로 하고 설립되어 강한 출력과 지향성, 공간파(空間波) 송출 방식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빼지 말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공산권선교를 목적으로 한국에 방송국들을 설립한 것은 한국교회가 아니라 외국선교단체들이라는 사실이다. CBS가 미국선교기관에 의해 설립된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 극동방송은 미국 TEAM선교부(The Evangelical Alliance Mission 복음주의동맹선교회)에 의해 설립되었고, 아세아방송은 미 FEBC(Far East Broadcasting Company 극동방송)가 설립했다. 이것은 당시 한국교회의 능력이나 형편으로 보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교회는 앞에서 잠시 말한 전후(戰後)의 어수선함과 계속되는 교회의 분열에 시달렸다. 당시 정부는 ‘멸공’, ‘승공’,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강력한 반공정책을 시행하였고 교회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북한선교를 생각하거나 말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는 라디오가 한국교회의 거의 유일한 북한선교 활동이었다.

1970년대에 당시 충현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창인(金昌仁) 목사에 의해 북한선교회가 조직되었는데 북한선교회의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가 라디오를 통한 북한선교였다.
1970년 1월 예장통합 북한전도대책위원회가 북한선교를 위한 교단차원의 공식적인 기구로는 최초로 발족되었는데 이 기구는 1972년 9월부터 영악교회의 지원으로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을 통해 대북방송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극동방송을 통한 대북방송은 극동방송이 ‘구원파 파동’ -극동방송이 영입한 방송전도부장이 ‘구원’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이를 추종하는 집단이 생겨 교계에서 물의가 일어났고, 이들이 극동방송의 운영권 문제에 까지 개입하게 되어 극동방송이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은 사건.-으로 교계에서 문제가 되자 1973년 6월에 방송이 중단되었다.)

2012년 4월에 북한기독교총연합회(약칭 북기총)라는 기구가 조직되었는데 북기총은 7월 9일에 열린 임시총회에서 구체적인 사업을 논의했는데 대북복음방송이 중요한 항목으로 거론되었다.
한국교회의 북한선교는 이렇게 라디오에 의해 시작되었고, 라디오를 중요한 방법으로 해서 진행되어 왔으며. 이 점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2. 라디오를 통한 북한선교는 많은 공헌을 했고, 지금도 공헌하고 있다.

“북한에서 과연 외부의 라디오 방송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가?”
북한선교와 방송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먼저 이런 질문을 만나게 된다. 이 질문 다음에는 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북한에서 외부의 라디오 방송, 특히 선교방송을 몰래 들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방송내용이 주민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북한에서는 외부의 라디오방송을 자유롭게 들을 수 없지만 몰래 듣는 사람들이 많다. 북한 주민들은 방송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선교방송은 북한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이다.
구소련에서 극동방송을 청취하는 신자들이 많다는 사실은 극동방송의 개국초기부터 확인되었다. 구소련의 신자들이 동경을 통해서 편지를 보내왔고,(유관지, 「극동방송40년사」(서울: 극동방송, 1996), 63〜68.)   

1965년에는 설립자인 탐 왓손 선교사가 극동지역을 방문하여 청취자들을 만났으며, 1971년 5월에는 당시 국장이었던 윈첼 선교사 내외와 소련어방송 담당자가 극동지역과 노바시비리스크, 이루쿠츠크 등지를 방문하여 청취자들과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위의 책, 130〜34. 윈첼 국장 일행의 구소련 방문기는 「크리스챤신문」 1971년 10월 2일에서 10월 30일까지 5회에 걸쳐 “쏘련에 가다”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으며, 한국방송공사 편 「한국방송사」935쪽〜38쪽에도 게재되어 있다.)

중국에도 청취자들이 많다는 사실이 중국개방 이후에 확인되었다. 중국이 “죽의 장막”이었던 1969년에서 1978년까지 10년 동안 중국에서 온 편지는 불과 177통인데 중국이 개방정책을 쓰면서 1979년 한 해에만 10,781통의 편지가 중국에서 왔다. 1979년 4월 23일에는 재중동포로부터 첫 편지가 왔는데 그 내용은 전파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방송을 잘 듣고 있으며 방송을 통해 큰 힘을 얻고 있다는 편지들이 답지(遝至)했으며 그런 증언들이 부지기수로 쏟아졌다.(위의 책, 256〜71.)

중국에서 극동방송을 이렇게 열심히 청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극동방송에 큰 활력소가 되었고, 한국교회를 공산권선교의 열기에 휩싸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은 중국에 비해 방송청취환경이 나쁘고 여러 가지가 엄혹하다. 그러나 중국도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때는 북한 못지않게 험악했는데 사람들은 그 때 더 열심히 외부의 방송을 들었다. S시의 한 성도는 “달과 별이 빛나는 고요한 밤에 반도체(트랜지스터)를 들고 들판에 나가 들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라는 시적인 편지를 보내왔는데 감시의 눈이 없는 곳에서 방송을 듣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으로 여겨진다. 강연자는 몇 해 전에 중국 D시의 한 성도 가정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 성도는 창을 가리키며 “문화대혁명 때는 저 창에 포단(담요)을 치고 방송을 들었지요.”라고 하여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라디오방송을 통한 북한선교의 효과는 북한의 폐쇄성 때문에 아직까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으나 라디오방송을 통한 선교가 북한에서도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으며 부분적으로는 확인되고 있다.

방송은 우선 들려야 하는데 국내의 중파방송(AM)들의 중앙사(키스테이션) 방송은 북한의 많은 지역에서 청취가 가능한 것이 확인 되고 있다. 특히 KBS의 한민족방송이나 극동방송의 경우에는 대출력, 지향성, 스카이웨이브(공간파) 등 북에서 잘 들릴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므로 더욱 문제될 것이 없다. 지역의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북한에서 CBS의 청취도 가능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요즘은 북한에 라디오가 많이 유입되고 있으며, 북한 주민들이 단파나 FM, MP3 등을 통해서도 외부의 방송을 듣는다는 사실이 종종 보도되고 있다.

강연자는 극동방송에서 23년간 근무했는데 주로 맡은 업무가 북방선교이었다. 그런 관계로 자연히 “북한에서 과연 외부의 방송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가?”는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 모로 알아보았는데 그 결과, 북한에서는 외부의 방송을 듣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몰래 남의 방송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80년대부터 탈북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는데 탈북민을 만나면 “북에 있을 때 남한의 라디오 방송을 들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빼놓지 않았다. 한 탈북민으로부터 “외부에서 라디오를 가지고 들어오거나 선물로 받았을 때는 사회안전부에 신고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안전부에서는 북한방송만 들을 수 있도록 다이얼을 땜질을 하고 봉인을 합니다. 그 봉인을 풀어주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도 그렇게 해서 땜질을 풀고 남한방송을 많이 들었습니다. 종종 불시에 검열을 나와서 봉인이 잘 되어있나 확인하기 때문에 봉인한 것을 그대로 두어야 하는데 여러 번 손을 대다보면 이것이 너덜너덜해지거든요. 저는 자동차 검사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검사를 마치면 봉인을 합니다. 제가 일하던 곳에서 사용하는 봉인이 라디오에 붙이는 봉인이 비슷해서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라는 말하는 것을 재미있게 들었다.

북의 고위층들은 라디오 청취는 물론 TV 시청도 자유로운 것 같다. 북의 체육계 중요인사였다가 탈북한 분이 “거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 참 시원하게 방송하더군.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그 사람들은 사라지고 싱거운 소리만 나오더구먼.” 하는데 그 내용과 어투에서 북에 있을 때 남한방송을 일상적으로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아무개”는 “노동당 간부들에게”를 비롯하여 라디오의 공산주의 비판 대북 프로그램의 마이크를 잡던 인사들이고, “어느 때부터인가”는 남한이 이른 바 햇볕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때를 말한다.

강연자는 여러 번 북한을 방문하였는데 2002년 월드컵이 진행되고 있을 때도 평양에 있었다. 그 때 관광총국에서 나온 중년의 여자안내원에게 “어제 한국대표팀의 8강 진출전이 있었는데 참 궁금하네요.” 했더니 김일성대학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안내원은 “한국이 이겼어요.” 했다. 의외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알아요?” 했더니 “나는 대진표를 그려놓고 이긴 팀은 O표, 진 팀은 X표 하면서 보고 있는 걸요.”했다.

두어 해 전에, 통전부에서 나온 안내원(참사)에게 남에서 간 일행을 소개하면서 “여기 이 분이 최근에 TV에 나와서 북을 많이 도와야 한다고 했지요.” 했더니 그 안내원은 “미리 알았으면 나도 볼 걸. 여하튼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평양은 남한의 텔레비전은 시청권에서도 벗어나고, 남한과 북한은 송출방식이 각기 NTSC 방식과 PAL 방식으로 달라서 남한 텔레비전 시청이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어서 역시 의외였으나 그 이상은 묻지 않는 것이 지혜로울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반면에 부정적인 대답도 있다. 교원대학을 나와 인민학교의 교사를 하다가 탈북한 한 여성과 많은 시간 대화를 나누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확인한 일이 있었다.

집에 라디오가 있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저희 집에도 없었어요. 처음에는 까벨선(케이블)을 깔아 라디오를 설치해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장이 나도 수리해 주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라디오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고 들을 필요도 느끼지 않고 듣는 것을 오히려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북한 주민들은 정치에 대해 관심이 없고 그런 말을 하면 탈나는 일이 많은데 라디오 같은 것을 듣고 정치에 대한 말 같은 것을 옮기다가 탈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부부가 남한 방송을 몰래 같이 들었는데 사이가 나빠져서 이혼을 할 때 부인이 그걸 고발해서 남편이 처형당한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은 있습니다. 탈북해서 중국에 있을 때 ‘나 사실 북한에 있을 때 남한 방송 몰래 들었다.’하는 사람들은 더러 만났고 최근에는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듣기는 했습니다.

여하튼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지만 북에는 남한의 라디오방송을 듣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에서 과연 외부의 방송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가?”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처럼 비교적 긍정적인 답을 얻을 수 있는데 “북한에서 외부 방송, 특히 선교방송을 몰래 들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방송내용이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떠한가?
북의 서해안 어느 도시에서 주민들이 극동방송을 듣고 집단회심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모두 수감되었는데, 감옥에서도 시간을 정해 기도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일부는 처형되고 많은 숫자는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보도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긍정적인 이야기들이 있지만 이 모두는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첩보’이고, ‘첩보’ 가운데에서도 신뢰도가 높지 않은 득문사항(得聞事項)이다.

강연자는 “호기심에서 들었으나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는 대답을 제일 많이 들었다. “‘무슨 이런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 거야?’ 했습니다.” 하는 대답도 있었다.

탈북자로서 북의 실상을 알리고 북한 주민의 인권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강철환 씨(「조선일보」기자, 「수용소의 노래」저자)가 2009년 10월 기독교통일포럼에서 강연을 하면서, 방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북에 라디오를 많이 보내야 한다고 하고, 북의 주민들, 특히 변방지역의 경비병들이 한 달만 남한방송을 계속해서 들으면 거의 대부분이 변화될 것이라고 역설하고 자기도 북에 있을 때 남한방송을 들었는데 극동방송도 들었다고 하기에 반가워서 ”극동방송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질문했더니 ”잠깐 들어서 잘 모르겠다. 다만 그 방송을 통해 ‘하나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는 간단한 대답이었다.

두어 분이 “방송을 들어도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합창(찬양)은 이상하게 감동적이었습니다.”라고 해서 대북 프로그램에서 찬양은 가급적 독창 대신에 합창을 사용하도록 조치한 일이 있었다.
예전에 신앙생활을 하던 나이 많은 분이나 지하교회 교인(북한의 지하교회는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존재였고 따라서 지하교회에 대한 이야기 역시 첩보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 존재가 점점 확인되고 있다. 특히 탈북민들 가운데 “북한에 있을 때 예배를 드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탈북민들은 남한에 오면 조사기관을 거쳐 안성에 있는 하나원(정식 이름: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에서 3개월을 지나며 교육을 받는데 이 하나원에는 하나교회(담임목사 이승재)가 있다.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탈북민들이 하나교회에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 북한의 지하교회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를 지하교회로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과의 면담이 가능하면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남한의 선교방송이 북한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라디오방송을 통한 북한선교의 열매들 가운데 하나로 탈북민 목회자인 심주일 목사(부천창조교회 담임)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심주일 목사는 평양 인근에서 6·25 전쟁 때 전사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성분의 덕으로 인민군 정치장교가 되어 중좌(중령)에 올랐으나 북한의 여러 모순된 현상에 회의를 품고 갈등을 겪다가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1998년에 탈북하여 중국을 거쳐 남한에 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2005년에 목사안수를 받은 분이다. 심주일 목사를 변화시키고 이끈 것은 친구로부터 전달 받은 성경과 제주극동방송이었다. 심주일 목사는 이에 대해,

그러면서 생각나는 것이 남조선이었다. 남조선에는 기독교방송국이 어디에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주파수까지도 알고 있었다. 지체할  것 없이 라디오에서 1566kHz를 맞추고 음량을 조절해보니 신통하게도 제주극동방송을 통해 한국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밤 1시경부터 새벽 4시 반 혹은 5시까지도 잘 들렸다. 나는 그때부터 평양을 떠나기 전까지 1년 동안 빠짐없이 제주극동방송을 들었다.  낮에 부대에서 일을 하면서도 밤을 기다렸고, 새벽 1시가 되면 이불 속에서 라디오로 한국의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었다.
윤덕수 목사님의 설교는 얼마나 정열이 넘치던지, 그리고 김동호 목사님은 북한 노동당의 힘 있는 일꾼들이 말씀을 전하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그때 한국에서는 IMF에 직면하면서 경제가 침체에 빠져들 때였다. 그때 김동호 목사님은 "우리가 지금까지 승용차를 탔으면 이제는 버스를 탑시다. 버스를 타고도 안되면 걸어 다닙시다"라고 설교하셨다.
IMF를 맞아 이렇게 설교한 한국의 목사님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말 그대로 나는 혁명적인 설교라고 생각했다. 김득중 교수의 4복음서 강의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목사님의 예수님의 양성에 대한 설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이며 신이었다는 설교는 나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는 첫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곽선희 목사님의 "여성들이 교회에 나올 때 너무 화려한 옷을 입고 나오지 마세요. 그리고 손톱을 길게 기르고 다니지 마세요. 나는 어머니가 어렵게 일하면서 손톱이 길면 일하기가 힘이 들어 손톱이 자라날세라 깎고 깎고 하시던 것을 보아서인지 손톱을 길게 기르고 다니는 여성들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나요"라는 설교를 들으면서 나도 나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나는 이 외에도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나의 영혼속에 믿음이 자리잡고 그것이 서서히 자라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늘 힘이 솟았다. 또 무엇 때문인지 나의 삶은 즐거웠고 기뻤다. 이전에 밀려오던 권태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불 속에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계속 울었다. 설교가 끝나고 나서 찬송이 흘러나올 때마다 그 찬송은 꼭 나를 위해서 만들어졌고 나를 위해서 불러주는 것만 같았다.
특히 찬송가 460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데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자니 몹시 괴로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내 손으로 직접 처형하거나 탄압하는 현장에 가담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무신론자로 살아왔다는 것이 죄송했다. 그러나 찬송가를 듣고 또 듣고 하면서 점차 '맞다. 내가 공산주의를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공산주의를 먼저 해보지 않았더라면 또 주체사상을 먼저 배우지 않았더라면 과연 내가 성경을 보다가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으며 또 목사님들의 설교가 나의 마음판에 와닿을 수가 있었을까'라고 생각하니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다.

라고 말하고 있다. (심주일 목사는 탈북하여 중국에서 생활할 때도 제주극동방송을 통해 힘을 공급 받았다. 심 목사의 이야기는 그의 수기 「멈출 수 없는 소명」(서울: 토기장이, 2009)를 볼 것. 인터넷 신문인 Ukoreanews를 통해서도 그의 수기를 볼 수 있다.)



3. 북한선교방송을 잘 하려면 이런 점들을 알아야 한다. 이 내용은 유관지, “떡을 물 위에 던지는 마음으로: 북한선교와 방송,” KWMA, 「한국선교 KMQ」2009년 봄호, 36〜45.를 재정리한 것임.


우선 자세면에서 필요한 것들이다.

①북한에 대한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방송요원들은 북한에 대해 알아야 한다. 북한주민들의 의식구조를 알아야 하고, 생활을 알아야 하고, 주체사상을 알아야 하고, 공산주의 이론을 알아야 하고, 행정구역을 알아야 하고 기념일과 절기들을 알아야 한다. ‘주체사상과 기독교가 비슷해서 놀랐다.’ ‘북한사회와 교회가 비슷해서 놀랐다.’고 말하는 탈북민들이 많은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도 알아야 한다. 알고서 방송을 해야 한다. 그래야 엉뚱한 소리를 하지 않게 된다. 방송에서 북의 실정을 모르는 이야기를 해서 북의 주민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인데 알고서 방송하면 그런 일도 예방하게 된다.

②복음의 효과적인 전달방식을 꾸준히 찾아야 한다.
대북설교를 할 때 남한의 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듯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북한용 복음이 따로 있고 남한용 복음이 따로 있나? 그저 복음만 전하면 되는 것이지!’ 하는 분들이 있다. 맞는 말이다. 복음은 하나이다. 말씀은 그 자체가 힘이 있어서 전하면 퍼져나가고 역사를 일으키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을 알고서 방송을 통해 북한에 복음을 전할 때  더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다. (필자는 탈북민조사기관인 대성공사 안에 있는 평화교회에서, 한국에 막 들어온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들을 모아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라는 제목으로 탈북민설교집을 낸 일이 있는데 효과가 퍽 컸다. 평화교회에서는 설교할 때 본문을 알려주고 그 다음에는 설교자, 순서담당자, 반주자 등 그 예배에 동참한 ‘남한 교인들’이 탈북민들 사이에 들어가서 본문을 찾아주어야 한다. 대부분이 성경을 찾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성경은 영락교회에서 한 권씩 기증하고 있다.) 평화교회에서 설교할 때는 그런 실정을 바탕으로 하고 설교를 준비했다. 그 설교집을 읽고 탈북민을 대상으로 설교해야 할 때, 또 북한동포들에게 방송으로 설교할 때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는 교역자들을 여럿 만났다. 이 일을 경험하면서 ‘북한용 복음은 따로 없지만 그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북한용 설교는 따로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③떡을 물 위에 던지는 마음이 필요하다.
성경에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라는 말씀이 있다. 난해구(難解句) 가운데 하나로 번역본에 따라 번역도 다르고 해석이 여러 가지이다. 어떤 주석은 떡을 물 위에 던지면 물고기가 그 떡을 먹고 살찌게 되는데 그 물고기를 잡아먹으면 몇 배의 이익이 된다.”고 풀이했다.
이 말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떡을 물 위에 던지는 것 같아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 같지만 뒤에 열매가 반드시 있게 된다.”라고 소박하게 풀이할 수 있는데, 방송을 통한 북한선교에 큰 가르침이 되고 격려가 되는 말이다. 우리는 부지런히 던져야 한다.

다음에는 기법(技法), 또는 실무면에서 필요한 일들이다.

①직접형과 간접형을 적절하게 배분하여 편성해야 한다.
국가, 또는 군대에서는 라디오를 심리전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심리전에는 전략적 심리전과 전술적 심리전이 있다. 전략적 심리전은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하거나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 이루어지는 대량 전달을, 전술적 심리전은 군사작전과 직접 관련되어 있으며,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 가장 흔한 형태이다. 이런 구분은 대북선교전문방송에도 적용된다. 대북선교전문방송은 이런 형태를 적절하게 배분하여 편성을 해야 한다. 강연자가 방송선교 실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 선교에서 군대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므로(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선교전략‘이라는 말이다. 북방선교의 경우에 이 말은 오해를 사거나 역공의 빌미를 주기 쉬우므로 ‘선교방법’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을 장기형·단기형, 직접형·간접형,(이런 용어들을 통해 프로그램의 내용과 성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는 A형· B형으로 바꾸어서 실무에 활용하였는데, 직접형·간접형이라는 말을 제일 많이 사용하였다.

②‘강하게 치고 빠져나가기’를 자주해야 한다.
‘강하게 차고 빠져나가기’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복음의 핵심을 짧고 강하게 전달하고 다시 일상적인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북한 주민들은 외부의 방송을 여유 있게 오래 들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됨으로 기독교 복음의 진수, 반기독교 이론의 잘못된 점들을 촌철살인(寸鐵殺人)식으로 자주 말하는 것이다.

③해방 전 북한지역 기독교의 역사에 대한 프로그램을 강화해야 한다.
“당신이 살고 있는 그곳에 과거에 이런 교회가 있었다. 이런 인물이 있었다. 그 교회가 이런 좋은 일을 했다.” 이런 것을 힘써 알려주면 상당한 효과를 거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주민들, 특히 젊은 층은 이런 점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이다. 북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일성광장의 위와 아래에 과거에 남산현교회와 산정현교회가 있었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 부근에 창동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북한주민이 몇이나 될까?
1990년의 일이다. ‘1995년이 되면 광복 50년(희년)이 되는데 어떤 특집을 준비할까?’ 생각하다가 “북녘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5년 간 방송하기로 하였다. 북한의 각 지역을 “현행” 행정구역에 따라 찾아가며(북한은 1952년에 ‘군면리대폐합’이라고 부르는 대 규모의 행정구역 개편을 실시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행정구역을 손질하고 있다.) 과거 그곳의 기독교 역사와 그곳에 어떤 교회가 있었고, 어떤 기독교 인사가 활동했으며 교회는 어떤 일을 하였는지 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방송기간을 5년으로 잡은 것은 한 주일에 한 지역을 찾아가는데 북한의 시와 군이 대개 250개 안팎이기 때문이다. 힘이 들었지만 보람도 컸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국내에서의 호응은 참 좋았다.( 이 프로그램의 원고가 「무너진 제단을 세운다」라는 책자로 발간되었다.) 북한에서의 반응은 물론 알 수 없었지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내친 김에 중국대륙 동북지역에 있었던 교회들도 다뤘다. 중국에 잘 알고 깊이 존경하는 노 목사님이 한 분 계신데 이 분은 말이 별로 없고 말을 할 때는 한 마디씩을 조심해서 하는 분인데 필자를 만난 자리에서 “그거 참 좋더군요.” 짧게 말하는 것을 듣고 큰 용기를 얻은 일이 있었다.

④북한의 기념일들에 맞춘 프로그램도 효과적이다.
5월 5일은 어린이날이기 때문에 어린이에 대한 내용을 많이 방송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어린이날(국제아동절)이 6월 1일이다. 북의 주민이 5월 5일에 어린이에 대한 방송을 듣는다면 “아, 남한에서는 5월 5일이 어린이날이고 어린이날이 되면 이런 행사를 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는 되겠지만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북의 어린이날에 맞춰 어린이에 대한 내용을 많이 방송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북에는 직업과 관계된 기념일이 많다. 기계절(2월 20일)·어부절(3월 22일)·탄부절(4월 24일)·건설자절(5월 21일)·광부절(7월 1일)·림업노동자절(8월 10일)·금속노동자절(10월9일), 그밖에도 수없이 많은데 이런 날들도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4. 북한선교전문 단파 라디오방송 설립을 제안한다.

몇 해 전까지는 국내에 들어온 탈북민, 또는 중국에 머물고 있는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남한의 방송 청취실태를 조사할 때 “어느 방송을 제일 많이 들었느냐?”라는 문항의 집계결과는 ①KBS 사회교육방송(현 한민족방송) ②아세아방송(현 제주극동방송) ③기타방송 순으로 나오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변하기 시작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참고로 자유아시아방송(RFA)의 방송지침을 소개하면 설교하지 말 것, 강의하지 말 것,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 방식을 피할 것, 주관적인 표현을 피할 것, 어떤 아젠다도 제시하지 말 것 등, 사실전달에만 힘쓸 것이라는 지침을 가지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미국의회의 지원으로 1996년부터 방송을 시작하였다.), 미국의 소리(VOA) 등 외국의 한국어방송을 많이 청취한다는 답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 후반부터 남한의 대북전문단파방송인 북한개혁방송·열린북한방송·자유북한방송·자유조선방송(이 네 대북단파방송 대표들은 2012년 4월12일, 대북방송협회를 결성하였다. 이 대표들의 대부분은 탈북민들이며 방송요원들 가운데도 탈북민들이 많다. 대북단파방송들은 미국 국립민주주의기금(NED)으로부터 자금 을 지원 받고 있다. NED가 2009년에 인터미디어에 의뢰해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자유북한방송의 수신상태가 좋고 청취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응답자들은 한 번 청취하면 적어도 30분 이상 지속해서 청취했다고 응답했다.) 등의 이름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대북단파방송”을 입력하면 단파방송을 수신하는 북한주민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이 여러 형태로 올라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참고로 대북단파방송 일람표를 별로로 작성하여 첨부하였음). 이들 대북단파방송들은 2005년부터 설립되기 시작하여 연륜이 짧다.

또 단파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수신기를 보유하는 것은 중파에 비해 쉽지 않다. 수신상태도 좋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퍽 의외이다. 필자는 그 이유를 ①자기들에게 친숙한 억양(대북단파방송은 탈북민들이 많이 마이크를 잡고 있다. 한 대북단파방송 대표에게 그 비율을 물으니 ‘60% 이상의 방송을 탈북민들이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②북한에 불만을 가진 계층이나 외부 소식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북한을 비판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대북전문단파방송들은 자기들이 북한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통해 주파수와 방송시간을 열심히 홍보하고 있는 것도 청취자를 늘이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보며 강연자는 북한선교에 뜻이 있는 이들이 북한선교전문단파방송을 설립하여 운영할 것을 제언하고 싶다. 북한선교를 중요한 목적으로 하고 있는 중파방송이 있고 그 방송에서도 북한대상 시간대를 정해서 방송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북한선교전문단파방송 설립은 옥탑방(屋塔房)을 지어 미관을 해치려는 이야기로 들리기 쉽다. 그러나 민간선교방송은 방송시간의 많은 부분을 외부의 교회에게 설교시간을 제공하고 헌금을 받는 TDP(Time Donation Plan Program)로 운영되는 등 집약성과 전문성을 발휘하는데 여러 제약을 안고 있다.

관계당국의 허가를 받아야하는 중파와 달리 외부의 주파수를 임대 받아 송출하는 단파방송은 설립과 운영이 비교적 쉬운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선교기구, 또는 규모를 갖춘 교회라면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는 이미 1995년에 개국한 북방선교방송(TWR)이 있다.

북한선교전문단파방송은 인터넷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 수신상태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전문성을 발휘하여 북한선교 활동의 표준과 규범을 보여주며 북한의 교회와 신자, 선교의 정보창고 역할을 할 수 있고 네비게이션의 기능도 발휘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대북방송들이 북한 관계의 일에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국내에는 북한에 복음을 전하고 싶어하는 크리스천 탈북민들이 여럿이고 탈북민 출신 교역자들도 많으며 연합체들도 있는데 북한선교전문단파방송은 그들을 잘 활용할 수 있고 그들의 선교욕구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마당도 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천 탈북민들뿐 아니라 라디오를 통한 북한선교에 뜻을 두고 있으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역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맺으며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한국교회의 북한선교는 라디오방송으로 시작되었다.
②한국교회는 라디오를 통해 북한선교(북방선교)에 많은 공헌을 했고, 하고 있다.
지금 라디오의 영향력은 감소되고 있지만 북한선교에 있어서 라디오는 여전히 중요하다.
③북한선교방송에는 유념해야 할 일들이 많다.
④북한선교전문단파방송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의지이다. “어떤 작품이 명작이냐, 어떤 작품이 졸작이냐 구분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겠다는 성실성이다”라고 말한 평론가가 있는데 이 말은 북한선교에 뜻을 두고 있는 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말이다. 라디오를 통해 북한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방송을 통해서 북한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의지이다. 이런 의지가 있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귀하게 사용하시며 길이 생기고 열매가 달린다. 강연자가 많은 실수를 거듭하면서 오랫동안 이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앞에서 대북단파방송을 청취하는 북한주민이 많은 이유들을 열거했는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대북전문단파방송을 하고 있는 방송요원들이 강한 의지일 것이다. 그런 의지가 그런 결과를 빚어내고 있다고 강연자는 확신한다. 북한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기도가 담긴 사역자들의 기도와 수고는 그와 마찬가지의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 본 강의안은 오픈도어선교회 북한선교학교(제2차) 제3주차 강의(2012년8월4일)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하였습니다.

유관지  webmaster@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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