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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가나안묵상] 여호와는 진정 '전쟁의 신'인가?

 
광복절을 앞두고 묵상하고 싶은 것은 해방(저항)에 따르는 폭력과 비폭력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폭력과 비폭력은 ‘여호와는 전쟁의 신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다른 종교로부터 공격을 받는 빌미를 주기도 합니다.

몇몇 성경학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의 신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전쟁을 싫어한다고 해석하여, 마치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 분인 양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다가 개신교가 ‘저항’을 뜻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불렸으니 자칫하면, 저항이란 말이 폭력과 전쟁을 지지하는 것인 양 오해받을 수도 있지요.

그러면 정말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을 즐기시고 폭력을 묵인하실까요? 교회에서 자주 말하는 ‘여호와 전쟁’은 하나님이 폭력과 살인을 즐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 몇 군데 그런 표현이 나오지만, 이는 아담이 타락한 뒤 인간에게 나타나는 죄의 결과가 전쟁이라는 것과, 그래서 악이 득세하고 전쟁이 들불처럼 확산되는 데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처음 에덴동산처럼 전쟁이 필요 없는 하나님 나라와, 전쟁만을 일삼는 사탄의 나라가 싸울 때 그 최후의 승자가 여호와이심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방법입니다.

   
▲ 하나님이 전쟁을 싫어하셨다는 증거는 출애굽에서도 나타납니다. 당시 애굽 ‘바로왕의 교육’은 ‘폭력과 살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싫어하셨다는 증거는 출애굽에서도 나타납니다. 당시 애굽 ‘바로왕의 교육’은 ‘폭력과 살인’이었습니다.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와 반대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의 저항은 비폭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 2:23).

그들의 저항은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히브리 백성이지만 바로왕의 교육을 받은 모세가 등장합니다. 40년간 바로왕궁에서 애굽의 최고 교육을 받은 모세는 어느 날 자기 민족의 고통을 보고는 애굽인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춥니다(출 2:11, 12). 40년간 배운 바로왕의 교육은 결국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도망해 미디안 광야에서 또 다른 40년을 보내며 이번엔 ‘하나님의 교육’을 받습니다. 80세가 되어 이스라엘을 해방하기 위해 부름 받은 모세는 40년 전 바로의 칼과 창으로 살인 교육을 받은 모세가 아니라,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민 12:3)으로 변해 있습니다.

바로왕의 교육의 결론이 칼과 창이었다면 하나님의 교육은 ‘지팡이’ 하나였습니다. 애굽에 저항하고 이스라엘의 해방을 이끄는 지도자의 무기치고는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저항 정신의 최고 수단으로 여깁니다. 결정적 장면은 홍해 앞에 섰을 때입니다. 뒤에는 칼과 창으로 살인교육을 받은 잘 훈련된 바로왕과 그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 손에 든 지팡이를 쓰십니다.

   
▲ 하나님이 전쟁을 싫어하셨다는 증거는 출애굽에서도 나타납니다. 당시 애굽 ‘바로왕의 교육’은 ‘폭력과 살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사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출 14:16).

나무지팡이가 칼과 창을 이긴 내용입니다. 모세의 비폭력이 바로의 폭력을 이겼습니다. 홍해를 건너며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처럼 이런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그렇다면 비폭력 저항이란 무엇일까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비폭력의 행동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줄 몰랐던 근원적인 힘과 용기를 발견해 서로에게 인간애를 불러일으켜 존경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비폭력 저항정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비폭력 저항’을 ‘무저항’과 혼동합니다. 무저항은 폭력 즉, 악에 대한 굴복이요 동조입니다. 비폭력주의자 간디가 “만일 우리가 어느 상황에서 비폭력으로 행동할 수 없다면 굴종보단 차라리 폭력이 낫다”라고 말했는데, 폭력보다 더 나쁜 건 저항정신을 갖지 않는 것이란 뜻입니다. 비폭력 저항은 적극적으로 상대방을 폭력에서 해방시키는 개인의 엑서더스, 곧 출애굽입니다. 비폭력은 눈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쯤이라기보다 생활방식이어야 하며, 최종 목적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비폭력이란 단순히 우리가 원수를 이기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원수조차도 의로운 사람이 될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 놓는 나의 자세를 뜻합니다.

   
▲ 비폭력주의자 간디가 “만일 우리가 어느 상황에서 비폭력으로 행동할 수 없다면 굴종보단 차라리 폭력이 낫다”라고 말했는데, 폭력보다 더 나쁜 건 저항정신을 갖지 않는 것이란 뜻입니다. 비폭력 저항은 적극적으로 상대방을 폭력에서 해방시키는 개인의 엑서더스, 곧 출애굽입니다.

67주년 광복절을 맞아 나와 우리 민족, 아직도 속박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전쟁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한번 생각했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함”(눅 4:18)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노래, 이스라엘의 노래가 모든 민족의 노래가 되기를 소망하며 광복절 노래 첫 소절을 불러 봅니다.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김종원 (목사, 자유기고가)

김종원  webmaster@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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