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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의 흔적이 한반도에게 말해 주는 것WCC ‘평화열차 프로젝트’ 답사 동행취재기③
  • 베를린=최창민 기자
  • 승인 2012.07.1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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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베를린 선교회.

베를린에서의 셋째 날. 독일 교회와의 만남이 계획된 날이기도 하다. 통일의 경험을 가진 독일 교회의 입장은 평화열차를 성사시키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통일 과정에서 독일 교회가 보여준 평화에 대한 열정적인 태도와 헌신적인 기여는 여전히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 번째 거점지역이자 평화열차의 출발지인 베를린의 평화마당과 세미나도 통일 과정에서 진행된 독일 교회의 노력과 역할에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이른 아침 답사팀은 베를린 선교회(Berliner Missionswerk)로 이동했다. 독일 교회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독일 교회는 답사팀을 반갑게 맞았다. 테이블 위에 독일 과자와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와 소개를 주고받고 ‘평화열차 프로젝트’에 대한 협의에 들어갔다.

   
▲ 독일교회와 답사팀과의 베를린 회의 모습. ⓒ기독교연합신문 최창민 기자

먼저 평화열차 소위원회 위원장 나핵집 목사가 인사말을 했다. 나 목사는 “평화열차 프로젝트는 통일을 경험한 독일 베를린에서 시작해 한국 부산에 이르는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독일 교회와 함께 남북 분단의 벽을 관통하는 꿈을 꾸고 있다. 양국 교회가 함께 상상력을 가지고 논의하자”고 말했다.

평화열차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한 채혜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국 국장은 “이 프로젝트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고,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다”면서도 “한반도 분단은 전 세계가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다. 평화열차가 북한을 통과하는 것이 어려울수록 이 운동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며 중요성을 강조했다.

답사팀의 설명을 경청한 독일 교회는 다양한 질문을 쏟아냈고 활발한 토론을 펼쳤다. 양국 교회 관계자들은 여는 예배, 한반도 통일 세미나, 브란덴부르크 광장 촛불예배 등에 대해 논의했다.

독일 개신교협의회 아시아데스크 폴 오펜하임 국장은 “독일 교회는 한국의 분단에 대한 역사적인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며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평화를 주제로 한 한국 교회의 활동에 독일 교회도 동의한다”고 말했다. 폴 국장은 또 “평화열차 프로젝트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모든 의심을 극복하는 것”이라며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실현시킬 것인지 함께 고민하자”고 답사팀을 격려했다.

이날 독일 교회는 베를린 선교회 아시아 담당 크리스토프 타일레만(Christof Theilemann) 목사를 평화마당 행사를 위한 독일협력 책임자로 선정했다. 또 독일에서 진행되는 평화마당 행사를 위해 베를린 선교회가 행정적인 협력을 맡기로 했다. 독일 교회의 환대 속에 협의를 마친 답사팀은 거점지역인 베를린 분단의 벽, 화해교회 등 독일 통일의 역사현장을 돌아보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베를린장벽.

베를린은 분단과 통일의 경험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다. 도심 곳곳에 분단 당시의 상징물이 남아 있다. 여기저기에 세워진 박물관과 기념관이 분단 당시 고통스러웠던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분단의 기억, 통일 과정, 이후의 사회통합에 대한 경험과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독일은 분단과 갈등으로 점철됐던 분열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사회통합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듯 보였다. 베를린 시민들은 통일의 경험을 자랑스러워했다.

   
▲ 무너진 베를린장벽의 잔해. ⓒ기독교연합신문 최창민 기자

하지만 독일은 통일 이후 사회통합 과정에서 진통을 겪었다. 경제력이 강했던 서독 위주의 흡수통일이었던 탓에 경제적 격차와 생활수준 차이로 인한 동독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컸던 것이다. 서독 주민들 역시 과도한 사회통합 세금 등에 대한 불만이 존재했다. 지금도 구동독을 오시(Ossi, 게으르고 불평 많은 동독놈), 구서독을 베시(Wessi, 거만하고 잘난 척하는 서독놈) 등으로 부르며 서로를 조롱한다. 독일의 사회통합에 대해 연구한 김해순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 교수는 “정치경제적인 체제통합은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었고, 물질적 부분은 동서가 어느 정도 비슷해졌다”면서 “그러나 문화적 정신적인 통합은 아직도 요원한 거리에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독일은 분명 과도한 통일비용을 지출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평화를 얻었다. 설령 그것이 갑작스런, 농익지 않은 통일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한 도시를 가르던 선은 사라졌다.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면서 선을 넘어온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를 발판으로 독일 국민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통일 이후의 갈등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얻은 평화와 자유에 비교할 수 없는 이유다.

독일 통일에 대한 객관적이고 면밀한 검토는 한반도 통일 논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독일 교회는 분단과 통일의 경험, 그 과정에서 진행된 교회의 역할을 잘 기록하고 보존하고 있다. 여기에는 독일 화해교회 만프레드 피셔 목사의 노력이 있었다. 베르나우어 슈트라세(Bernauer Strasse)에 위치한 화해교회는 베를린장벽의 경계선 위에 세워져 있었다. 구동독 정부는 관측소를 가린다는 이유로 교회를 폭파했고, 통일 이후 재건된 것으로 유명하다.

피셔 목사는 통일 후 점차 사라져가는 분단의 흔적들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각별한 노력에 베를린 시는 화해교회 옆 장벽 일부를 영구 보존하기로 했다. 또 교회 옆에 베를린장벽기념관을 건립했고, 기념 공원도 조성했다. 이 공원에는 베를린장벽을 넘다가 희생당한 ‘장벽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도 설치되어 있다.

답사팀에게 독일 분단의 현장을 소개한 피셔 목사는 “우리는 베를린장벽을 보면서, 자유는 오랫동안 갇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며 “베를린장벽은 결국 자유를 향한 열망 때문에 무너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도 희망을 품으면 우리의 예상보다 빨리 분단의 벽이 허물어질 것”이라며 평화열차 프로젝트 성공에 대한 희망을 놓지 말라고 격려했다.

   
▲ 화해교회 전경. ⓒ기독교연합신문 최창민 기자

화해교회

베를린장벽에서 답사팀은 뜻밖의 기회를 얻었다. 분단의 현장을 지키고 아픔을 경험한 화해교회 만프레드 피셔 목사가 직접 답사팀과 동행하며 독일 통일의 역사를 증언했기 때문이다.

서독 출신인 피셔 목사는 1980년대 베를린장벽 바로 옆에 있던 이 교회에서 시무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어느 날 갑자기 교회 바로 옆에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아무도 지나다닐 수 없는 정찰로에 갇히게 됐다. 동독 정부는 교회가 장벽 옆에서 관측병들의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교회 폭파를 결정했다. 1985년 1월 22일 교회 건물이, 엿새 뒤인 28일 교회탑이 각각 폭파됐다.

교회탑이 쓰러지는 장면은 사진으로 기록됐고, 이 사진을 본 많은 독일 기독교인들이 분단된 현실을 놓고 기도했다. 교회가 폭파된 후 불과 4년여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피셔 목사는 “독일이 통일되기 1년 전, 1989년 여름까지만 해도 우리는 통일이 될 것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미친 사람이라고 했을 것”이라며 “통일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고 말했다.

   
▲ 교회가 베를린장벽에 위치한 이유로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감격을 모두 경험한 만프레드 피셔 목사. ⓒ기독교연합신문 최창민 기자

피셔 목사는 교회가 폭파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 현장에서 예배를 진행했다. 그는 “장벽이 생기고 교회가 폭파된 후부터 나는 장벽을 넘다가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약 28년 동안 136명의 사람들이 장벽을 넘다가 희생됐다고 밝혔다.

통일이 공식적으로 결정된 직후 화해교회는 옛날 교회 건물의 잔해와 당시 쓰였던 교회 용품(성찬기구, 세례용기, 성경, 성화, 종, 십자가)을 돌려받았다. 다시 모인 교회공동체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교회 재건 위원회를 구성하고 새로 지어질 교회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거쳤다. 그 결과 교회 터를 보존하고 교회 잔해를 모아 기념교회를 건축하기로 결정했다.

위원회는 여러 번의 회의를 통해 교회는 크게 짓지 않으며, 분단의 아픔을 기억할 수 있는 상징적인 건물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새로 지어진 화해교회는 구 교회 건물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에 지어졌다. 구 교회 건물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벽은 폭파된 교회 잔해와 진흙을 뒤섞어 만들었다.
건물 주위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무 살(가늘고 긴 널빤지)로 둘렀다. 교회와 나무 살 사이에 순례의 공간을 두고 있다. 이 공간에 서면 긴장감과 통일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순례자들은 바람이 부는 날에는 바람소리를 듣고, 화창한 날에는 햇살이 주는 따뜻함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날씨의 엄혹함으로부터는 그들을 항상 보호한다. 여기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어떤 부분은 분명하고 어떤 곳은 어둡다. 또 어떤 위치에서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풍경이 바뀐다. 움직일수록 많은 풍경을 볼 수 있기도 하다.

교회 내부도 조촐하다. 예배당은 흙벽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역시 흙벽으로 된 작은 강대상이 하나 보인다. 그 앞에 낡은 세례대가 놓여 있다. 천장에서는 채광이 통과되도록 설계되어 있고, 나무로 된 검은색의 제대 십자가가 멋들어지게 달려있다. 최후의 만찬을 그린 듯한 장면도 조각돼 있다. 화해교회 피셔 목사는 지금도 매일 정오가 되면 이 예배당에서 교인들과 함께 장벽 희생자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기도하고 있다.

교회 앞마당에는 구 교회의 터가 보존되어 있다. 또 한 쌍의 남녀가 무릎 꿇고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의 죄를 용서하는 ‘화해’(Reconciliation)라는 이름의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구 교회에 설치되었던 세 개의 종, 교회 폭파와 함께 떨어지면서 한쪽이 구부러진 십자가도 전시되어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교회 옆에 자리 잡은 녹빛 밀밭이다. 화해교회는 여기에서 추수한 밀로 빵을 만들어 성만찬을 한다. 피셔 목사는 “분단의 현장인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땅에서 자라난 생명의 빵을 함께 나누면서 희생된 이들보다 더 많은 생명을 살린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화해교회는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고, 통일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었다. 또 독일 시민들에게 화해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었고, 다시 생명과 평화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독일 한인교회

독일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과 닮았다. 독일은 2차 대전 패전 후 분단을 경험했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뤘다. 한국은 분단과 6.25 전쟁을 경험한 후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차이가 있다면 독일은 1990년 통일을 성취했고, 우리는 여전히 정전협정 상태라는 것이다.

답사팀은 조성호 목사가 시무하는 베를린기독교한인교회를 방문했다. 교인들은 정성껏 준비한 한식을 차려놓고 답사팀을 반겼다. 오랜만에 맛보는 집밥에 우리는 정신없이 허기를 채웠다.

여기에서 나는 1960년대 파독 간호사 출신 강경선 장로를 만났다. 40여 년 전 꽃다운 나이에 고향을 떠나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은 되돌아가지 않고 남았다. 강 장로는 “이주노동 비자로 체류했던 우리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독일 정부를 상대로 캠페인을 벌였다”며 “독일은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장기체류가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세월을 비켜가지 못했고, 지나간 과거를 반추하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40여 년 동안 변하지 않은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놓고 여전히 기도하고 있었다.

독일 교민들은 평화열차 프로젝트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또 독일에서 진행되는 평화마당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평화열차에 대한 소개와 간담회가 끝나고, 독일 교회 성도들은 누군가 시작한 ‘우리의 소원’을 구성지게 합창했다. 통독 과정을 지켜본 이들은 먼발치에서도 통일 한국을 그리고 있었다. 분단의 벽을 넘는 평화열차가 성사되어야 한다는 것이 더욱 명확해졌다.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민족에 대한 일체감 같은 감정이 밀려왔다.

31일 빌헬름교회

독일의 역사의식은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Kaiser Wilhelm Memorial Church)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당해 종탑과 건물이 파괴되었다. 베를린시는 도심 한복판에 폭격 맞은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 옆에 새로운 교회를 세워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답사팀이 방문했을 때 교회는 외관을 가린 채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파괴된 건물을 보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웅변하는 듯 했다.

   
▲ 베를린장벽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추모 조형물 ⓒ기독교연합신문 최창민 기자

우리는 국회의사당, 브란덴부르크광장, 유대인박물관을 둘러보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열차 길에 올랐다. 본격적인 평화열차 순례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평화열차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분단 현실에 도전하는 평화운동의 일환이다. 통일은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여정이며, 통일은 생각보다 가까울 수 있다.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면서 사람들을 깨우고 세워나가야 한다. 독일 교회와 독일의 한인 교회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기독교연합신문 기자>

베를린=최창민 기자  nrprin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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