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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남한을 그리워하며 사셨죠. 그런데 남한은…"뼈만 돌아온 '국군포로' 백종규 일병의 외손자 성원준 씨 인터뷰


26일 새누리당은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남북회담의 최우선 과제로 다루기로 의견을 모았다. 국군포로는 한국전쟁 시기 조선인민군이나 중국인민지원군에 붙잡힌 한국군 포로를 뜻한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연합군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포로로 붙잡히거나 실종된 한국군의 수를 8만 2천여 명으로 잡는다. 북한에 따르면 이들 중 대다수는 모두 스스로 북한을 택하여 ‘해방전사’로 편입되었다지만, 실제로는 ‘괴뢰군 포로’라는 딱지가 붙었다. 불발탄을 처리하거나 탄광의 발파공, 벌목공 등 위험한 일을 강요받으며 평생을 살아간다는 게 귀환 포로들의 증언이다.

지난 20일 국방부는 “국군포로 7만 3천여명 중 500여명이 북한에 생존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생존자 500여명 중 19명은 2010년 11월까지 진행됐던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통해 생사가 확인된바 있다. 나머지 480여명은 탈북자나 탈북 국군포로들의 증언을 기초로 명단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 지난 20일 국방부는 “국군포로 7만 3천여명 중 500여명이 북한에 생존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생존자 500여명 중 19명은 2010년 11월까지 진행됐던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통해 생사가 확인된바 있다.

실제로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귀환한 국군포로들은 1994년 10월 조창호 씨를 처음으로, 약 80여명이다. 국군포로의 가족으로서 입국한 이들이 약 400여명으로, 지난 4월 중국 내 한국 공관에서 3년간이나 체류하다가 입국한 탈북자 5명도 국군포로 고(故) 백종규 씨의 딸들이었다.

그런데 2004년 4월 고향땅에 들어섰던 백 씨는 이미 뼈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장녀인 영숙 씨가 그의 유해를 안고 입국한 것이다. 최초의 국군포로 ‘유골 송환’이었다. 살아서는 ‘괴뢰군 포로’로 살았지만,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히고 싶었던 백 씨의 사연을 들었다. 정치적 담론이나 의제로서가 아닌, 그들의 실제 삶을 들여다보기 위함이었다. 지난 5일, 외할아버지가 묻혀있는 대전 현충원 방문을 앞둔 외손자 성원준 씨를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무덤에서 외할아버지의 유골을 직접 빼온 인물이기도 하다.

-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는가?
탄광에서 일하셨다. 국군포로들만 따로 사는 마을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댁에 6살때까지 살았다.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외할아버지는 항상 말이 없으셨다. 맡겨진 일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모님들도 탄광차 운전공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도 외할아버지 동네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국군포로의 자손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지 않으셨다. 좌절할까봐 고민이 많으셨을 것이다. 입당도 어렵고, 차별도 많이 당하니까 말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 할아버지가 이 나라를 지킨 군인이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다. 사실은 그 상대편 군인이었는데 말이다.(웃음)

- ‘국군포로’ 집안이라는 것은 언제 알게 되었는지?
이모가 시집을 가려고 했다. 중매였다. 그런데 외할아버지, 할머니가 반대를 하더라. 알고 보니 상대편 집안이 북한군 장교 집안이었다. 결국에는 헤어졌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외할아버지가 국군포로였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을….

- (외할아버지의) 말년은 어떠셨나?
중학교 때 외할아버지가 우리집에 오셨다. 어머니(백영숙 씨)가 장녀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게 할아버지의 첫 외출이었다고 알고 있다. 일생에 처음 있는 여행이라고 했다. 흩어진 자녀들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께 여비도 조금 받아갈 계획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계속 전보가 왔다. 보위부나 안전부에서 할아버지 어디 갔느냐고 계속 찾는다는 거였다. 감시가 심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계획하던 여행도 하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으셨다. 전쟁 때 허리에 총을 맞았는데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서 항상 허리가 구부러져 계셨다. 고생도 많이 하셨다. 나중에는 미음을 드셔도 소화가 안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97년에 돌아가셨다.

- 그런 할아버지의 유해를 품고, 탈북을 결심하였다. 
할아버지의 유언이었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탈북을 몇 번이나 시도하였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께 첫째여서 그런지 마음을 많이 열었다. 아들처럼 의지하셨다. 남한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 고향이 청도(경상북도)라고, 그 동네를 자세하게 묘사하였단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싶다고 하며 눈물을 보이신 적도 있다. 그런 할아버지의 한(限)을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잘 알고 있었다. 맺힌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 할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는지?
어머니는 2002년 할아버지의 유해를 배낭에 넣고 중국으로 탈북했다. 그러나 중국 공안에게 붙잡혔다. 문제는 배낭에 담긴 할아버지의 뼈였다. 당시 묵었던 숙소에 그대로 방치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다행히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그 가방을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중국 감옥에 둘째 누나와 어머니가 갇혀 있을 때, 둘째 누나가 맹장이 아프다고 하여 간수들이 병원에 데려갔다. 만성맹장염이라고 하더라. 어머니는 그 기회에 둘째 누나만이라도 내보내야 할 것 같아서, 왜냐하면 할아버지의 일을 알고 있는 게 나와 어머니, 둘째누나였으니까 말이다. 둘째 누나가 탈출을 했다. 그런데 당시가 두만강 물살이 아주 셀 때이다. 행방불명되어서 아직 소식이 없다. 어머니가 6개월 즈음 감옥에서 지냈을 때 담당 간수가 예전에 어머니 신세를 졌던 분이라, 외출을 허락해줬다. 도망치라는 사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중국으로 도망하였다. 그때 할아버지의 유해가 담긴 가방을 찾아 중국땅에 묻었다. 공식적으로 땅을 살수도 없었기에, 몸을 펴드리지도 못하고 가방채로 땅에 묻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나의 인생에는 못하겠구나’ 포기했다. 그저 중국에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한다.

- 어떻게 탈북을 하게 된 것인지?
2004년도에 있었던 일이다. 먼저 탈북했던 분이 어머니를 찾아서 “도와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일도 국방부에 이야기하였다. 처음에는 믿지를 않더라. 그래서 중국에 와서 현장조사도 하고,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하여 DNA 검사도 하였다. 5사단에서 일병으로 복무한 기록도 확인했다. 외할아버지 고향인 청도에서는 제사도 지냈다. 그때서야 비로소 한(恨)을 푸신 것이다. 정말 오래 걸렸다.

   
▲ "나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 할아버지가 이 나라를 지킨 군인이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다. 사실은 그 상대편 군인이었는데 말이다." ⓒ유코리아뉴스 이범진

- 그때 원준씨는 북한에 있었는데, 가족이 탈북한 것 때문에 불이익은 없었나?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쪽이 아니라, 어머니쪽 일이니까 그냥 놔두더라. 국군포로의 자손으로서 회의도 많이 들었다. 국군포로 딱지는 평생을 간다. 1대에서 끝나지도 않는다. 2대, 3대, 4대까지 간다. 출세의 길이 막힌다. 그래서 2005년 탈북을 했다. 평소에도 중국 국경은 많이 가봤었다.

- 외할아버지의 유해를 직접 꺼내지 않았나?
사실 그때는 남한으로 가져갈 거라는 것은 몰랐다. 어머니가 말씀해주시지 않으셨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다. 손톱하나라도 빼지 않고 유해를 다 가져온 것 말이다. 거기다 할아버지의 공민증 사진을 뜯어서 같이 가져왔다. 그게 없었다면 신원조회도 힘들었을 것이고, 영정사진으로 사용할 사진도 없었을 것이다.

- 누나도 행방불명이 되고, 어머니와 원준 씨는 감옥생활도 하였다. 남한으로 외할아버지를 모시는 일에는 성공하였지만 희생이 너무 컸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대한민국 측의 대우는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그렇다. 피를 많이 흘리면서 이곳에 왔는데 국군의 유해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탄광생활하며 핍박받아온 사람의 명예를 그다지 높이 쳐주지 않았다. 너무 무관심했다. 살아서 귀환하신 분들은 연금을 주는 것 같은데, 돌아가신 분은 안준다. 그의 가족이라도 유가족으로 인정해줘야 하는데 보훈처나 그런 데서는 전혀 무관심하다.

- 4월에 입국한 이모와 친척들이 3년간이나 지체한 현실도 ‘국군포로’에 대한 무관심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다.
3년 동안 중국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조금 심하다. 일종의 무관심이다. 물론 중국 정부가 막은 것도 있지만, 자기 가족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방치했을까? 그래도 다행히 이번에 이명박 대통령과 후진타오 주석이 만났을 때 이야기가 잘 된 것 같다.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이렇다 쳐도, 다른 국군포로 가족들은 어떡하나. 이렇게 일이 진행되면 그 가족들은 어디에 기대나? 한국 외교부에서도 노력하고 있겠지만, 북한에서는 출신이 나쁘다고 무시당하고, 그렇다고 한국에 와도 환영을 받지 못하니 허탈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국군포로 가족의 삶은 다른 탈북자들의 삶과도 좀 다르다. 국군포로와 그 가족들의 아픔을 잘 모른다. 목숨을 걸고 온 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 아마 거의 모든 국군포로들과 가족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범진 기자  poemgene@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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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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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연 2020-02-04 10:34:54

    국군포로들이나 납북자들이 진보좌파정권에서 외면당했다고? 정답은 보수우파정권에서도 이용만했지 대체로 무관심했다는거~!!!!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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