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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마이클 김 아저씨의 가슴 아픈 이야기[미국취재.03] 국경수비대에 쫓기고 늑대와 마주치고..험난한 난민 생활
  • 미국LA=이범진 기자
  • 승인 2012.06.20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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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난민의 날’을 이틀 앞둔 18일, 미국 LA의 한 식당에서 만난 마이클 김 아저씨는 제가 만나본 탈북자 중 가장 키가 컸습니다. 180cm가 넘는다 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2m나 되었다고 합니다. 식당 주인분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가만히 엿들으니, 건강이 많이 안 좋은가 봅니다. 두통이 심하여 몇 번 씩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도 있다는데, 병원에 가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머리가 많이 어지러워요. 잠도 잘 못 자겠고요. 사람 만나기가 싫고, 접촉하기도 두렵고 해요. 나 자신을 용서 못하겠어요. 뭐랄까…. 죄책감 같은 거랄까요?”

그렇습니다.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김 아저씨는 꿈을 꿨습니다. 딸이 미국까지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집밖에 와서 문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꿈에서 깬 아저씨는 꿈인지 생시인지 하여, 문 밖으로 나가 봅니다. 그러나 딸은 없고, 땀에 흠뻑 젖은 자신을 발견하고는 다시 잠 들지 못합니다.


   
▲ 13년 전입니다. 당시 13살이었던 딸과 헤어진 것이요. 1998년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릴 때, 김 아저씨도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형님네 딸을 맡기고 떠났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지는 몰랐습니다. ⓒ유코리아뉴스 이범진


13년 전 딸과 헤어져

13년 전입니다. 당시 13살이었던 딸과 헤어진 것이요. 1998년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릴 때, 김 아저씨도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형님네 딸을 맡기고 떠났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지는 몰랐습니다. 중국에서 일을 하던 아저씨는 그만 공안들에게 붙잡혀 6개월을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1년 만에 돌아온 북한에 딸은 없었습니다. 밥을 많이 먹는다고 구박을 받았는지, 집을 나가 소식이 없었다고 합니다. 수소문해보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중국으로 넘어갔다면 분명 살아있을 겁니다. 지 엄마 닮아서 얼굴이 예쁘장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있을 겁니다. 그런데 애가 너무 호리호리해서, 두만강을 넘어갔을 수 있으려나….”

탈북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딸의 얼굴이 아른거려 떠날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중국행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일하며, 기회를 모색하기로 합니다. 얼마간 일했을까, 아저씨는 또 포승줄에 묶이어 북송 버스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이기 때문에 이번에 붙잡혀 가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는 딸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합니다. 신이 도운 걸까요? 오르막길에서 차가 고장났습니다. 58년에 만들어진 차입니다. 운전자는 꼼짝없이 운전석에 있어야 하고, 나머지 한 명은 차의 상태를 봐야 합니다. 그때 그들의 눈에 띈 사람이 가장 약해보이는 김 아저씨였던 겁니다.

“돌을 구해와. 도망치면 바로 쏴 버릴 거야!”

포승줄이 풀리고, 김 아저씨는 돌을 고르는 시늉을 하다가 3미터 벼랑으로 뛰어 내립니다. 놀란 경비병이 쫓아와 총을 쏩니다. 두세 방 발사 소리가 들렸는데, 다행히 아저씨를 맞추진 못했습니다. 그렇게 도망친 곳이 북한쪽이었답니다. 다행히 중간에 만난 분들이 중국 방향을 가르쳐주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한족이 운영하는 만두집에 취업한 아저씨는 누구보다도 진실되게 일했습니다. 하루는 식당에 있던 돈뭉치를 발견하여 사장님께 그대로 전해준 적이 있습니다. 2년 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그일에 감동을 받은 사장님은 아저씨의 사진을 찍어, 신분증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북송될 염려 없이 일만 열심히 하면 되었습니다. 딸만 찾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일하다가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먼저 탈북을 하여, 미국에 정착한 이였습니다. “미국으로 오라”는 말이었습니다. 2007년이었습니다.


미국행 결심..그러나 멕시코에 발 묶여
국경수비대에 쫓기고 늑대와 마주치고..험난한 난민 생활

딸과 헤어진 지 9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딸을 가슴속에 묻고 미국행을 결심합니다. 더 이상 가짜 신분증에 의존하여 피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수용소 경험으로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습니다. 새 삶을 찾아가는 여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태국, 아르헨티나, 파라과이를 거쳐 멕시코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마중을 나와야 할 사람이 보이질 않습니다. 알고 보니 영어로 이름을 들고 서있어서 서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사소한 엇갈림은 아저씨를 1년 6개월이나 멕시코에 묶어 두었습니다.

우연히 한국 사람을 만나 멕시코 농장에서 일하게 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농장주는 농사일에는 베테랑이었던 김 아저씨를 계속 농장에 일하게 하기 위해서 보내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저씨 덕에 농작물들은 무럭무럭 잘 자랐지만, 아저씨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어차피 난민의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망 다니는 삶은 이제 그만 하고 싶었습니다.

1년 반 동안 일한 임금은 무려 20불. 먹여주고, 재워주고, 경찰에 보호해준 대가를 뺀 금액이라 하였습니다.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난민의 신분, 도망자의 처지였으니까요. 2008년 2월, 미국 국경을 넘기로 결심합니다.

3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아시아 사람은 아저씨 혼자였습니다. 입을 옷 말고는 다 버리고 10명씩 배에 올랐습니다. 생수 4병을 나눠 마시고, 빵 7개를 나누어 먹으며 도착한 곳은 사막이었습니다. 소변을 받아먹으며 근근이 버티었습니다. 이튿날 국경수비대가 들이닥쳤습니다. 본능적으로 흙탕물 속에 뛰어든 아저씨는 주변의 풀을 이용해 위장도 하였답니다. 남미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살려 달라’ ‘풀어 달라’ 하는 흐느낌이었을 겁니다. 3시간이 흘렀을까, 인기척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저씨는 풀숲을 헤치고 나왔습니다.

   
 

늑대도 만났습니다. “진흙이 묻어있어 맛이 없어보였는지, 그냥 지나가더군요.” 지금은 웃으면서 말씀하시지만, 당시는 오금이 저려 혼났답니다. 한 시간을 내리 걸으니 주유소가 보였습니다. 멕시코에서 받은 임금 20달러로 담배, 콜라, 빵을 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미국으로 부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가 걸리는 것을 보고서야 ‘여기가 미국이구나’ 알았답니다. 이렇게 ‘구출’된 아저씨는 내리 이틀을 잠만 잤다고 합니다.

그리고 ‘난민’임을 인정받기 위해서 까다로운 인터뷰를 거쳤습니다. 난민임을 인정받아, 영주권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정착하여 살기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쉽지 않았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았고, 몸은 더 아파지는 것 같았습니다. “북한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살려고 했는데, 여기서는 의지가 약해지네요” 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한 적도 있답니다. 연락이 안 되는 것을 이상히 여겨 방문한 친구가 아니었다면 ‘성공’했을 거라 합니다.

의심도 많이 생긴답니다. 병원에 매달 가야 함에도 최근 3개월은 가지 않았습니다. 병원을 계속 이용하면 나중에 시민권을 주지 않을 거라는 유언비어 때문입니다.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해주어도 의심은 더욱 심해집니다. 영주권 기간 10년이 지나면 다시 북한에 보내지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저씨는 성실한 것으로는 이 동네(?)서 소문이 났습니다. 몸과 마음의 아픔을 다잡고 매일 쉬지 않고 일을 나갑니다. 미국에 온지 이제 4년째입니다. 차도 구매하였고요. 무엇보다도 표정이 밝습니다. 처음 보는 저에게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정도로 여유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내 집 같지가 않고, 어디로 다시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 아마도 찾아야 할 가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그러나 아저씨는 “내 집 같지가 않고, 어디로 다시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 아마도 찾아야 할 가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코리아뉴스 이범진

이야기를 마친 아저씨는, 다른 탈북자분의 이사를 도와야 한다며 일어났습니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도, 이웃을 돕기 위해서 나서시는 겁니다. 비슷한 처지의 분들에게 기꺼이 ‘가족’이 되어주고자 하는 거지요. 그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고 계시기 때문일 겁니다.

김 아저씨의 딸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살아 있다면 26살이고요. 아저씨의 말로는 아주 아름답다고 합니다.


* 이 콘텐츠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진흥기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미국LA=이범진 기자  poemgene@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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