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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언어는 과연 ‘이질화’된 것일까?

1.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 작가 라신은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자신의 불어가 통하지 않는다며 ‘마치 모스크바 사람이 파리에 온 것처럼 통역이 필요하다’고 그 고통을 호소한 바 있다. 요강을 달라니 풍로를 가져다주고 못 200~300개를 이야기했더니 성냥 세 갑을 내밀더라는 것인데, 그로부터 1세기 뒤인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아서 2,500만의 프랑스 인구 가운데 ‘국어’(langue nationale)로 말하는 사람은 300만에 불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실 근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현재의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가 사용되는 지역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고 속 라틴어에서 기원하는 이들 로만스 제어의 연속체가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적 현실과는 별개로 ‘균질적인 단일 언어 사회’를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이에 도달하려고 애쓴 국가와 민간의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도와 장치, 관습과 감각 등이 바로 ‘언어적 근대’를 이루는 것들이었다고 하겠다.

   
▲ 스페인의 언어지도. 스페인어(카스티야어) 외에도 지방에 따라 갈라시아어, 카탈루냐어, 바스크어가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병문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즉 ‘민족=국가=언어’라는 이 이상은 그러나 대단히 의식적인 실천이 개입되지 않고는 결코 달성될 수 없는 것이거니와(국가가 강력한 정책으로 추진한 예로는 프랑스가, 민간이 열정적인 운동의 형태로 전개한 예로는 독일이 대표적이다), 그 실천의 결과 역시 매우 불완전하다. 예컨대 스페인에서는 스페인어(카스티야어) 외에도 여전히 카탈루냐어와 갈리시아어라는 같은 계통의 소수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전혀 계통이 다른 바스크어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랑스 역시 지역에 따라 프로방스어(오크어), 브르타뉴어, 바스크어, 알자스어(알레만어) 등의 소수어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스코트어 외에도 영어와는 계통이 전혀 다른 게일어, 콘월어, 웨일스어 등과 같은 켈트어 계통의 소수어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
‘단일 언어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다른 나라의 이런 사례들이 신기할 수 있지만, 그러나 오히려 하나의 국가가 ‘단일 언어 사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적 근대’는 어찌 보면 유례없이 손쉽고 간단히 달성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19세기 말 드디어 ‘국문’으로 격상된 우리 글은 자주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이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으로 보였고 유길준, 지석영, 주시경, 최남선과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은 ‘국문’의 올바른 사용법과 새로운 문체에 대해 고민했다. 1907~1909년에 활동한 국문연구소의 연구보고서 ‘국문연구의정안’은 개화기 이래의 여러 고뇌가 모여 거둔 중요한 결과였다. 물론 정서법의 통일, 문법과 사전의 완성이 ‘언어적 근대’를 이루는 최소한의 기본 요건이라면 아직 갈 길은 멀었다. 그러나 주시경의 <국어문법>이 1910년에 출판되었고, 결국은 빛을 보지 못했지만 주시경과 최남선이 의기투합하여 벌인 조선광문회에서의 ‘국어사전 프로젝트’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역사의 시간표는 야속하기만 하다.

식민지 시기 내내 ‘비국민’의 신분으로서 우리가 강요당한 ‘국어’는 ‘조선어’가 아니라 ‘일본어’였으며 ‘조선어’는 그 ‘국어’의 지방어였을 뿐이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이른바 ‘조선어 말살 정책’이 진행되기 전까지 총독부는 ‘조선어’를 근대적인 눈으로 관리해왔다. 총독부가 설립되자마자 시행했던 정책 가운데 하나가 ‘구관제도조사사업’이었고 그 결과물로 나온 것 중에는 <조선어사전>도 있었다. 같은 시기 광문회에서 작업하던 <말모이>라는 우리 사전이 원고 뭉치로만 이리저리 전전하고 이후 조선어학회의 <큰사전>으로도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어의 표기법을 먼저 정비한 것도 총독부였다. 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제정한 이래 1921년과 1930년 두 차례 개정하게 되는데, 1930년의 ‘언문철자법’은 조선어학회 인사들도 개정 과정에 다수 참여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표기법에 상당히 근접하게 된다. ‘언어적 근대’의 문제에도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 개입될 여지가 생기는 대목이다.

   
▲ <말모이> 원고. 주시경의 주도로 조선 광문회에서 만들어지던 최초의 국어사전 <말모이>는 현재 'ㄱ~걀죽'까지의 원고가 남아 있다. ⓒ김병문

물론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는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 조선어사전편찬 운동, 그리고 맞춤법통일 운동이 대단한 호응 속에서 전개된다. 그 결과 1933년에 ‘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되고 그에 맞춘 사전편찬 작업도 착착 진행된다. 그러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인해 관련 인사들이 대거 투옥된 데다 그 사전 원고마저 압수를 당하게 되어 해방 이후에야 출판이 되는데, 이 <큰사전>이 완간된 것은 남과 북이 분단된 뒤인 1957년이다. 그리고 북에서는 1962년 <조선말사전>을 펴낸다. 물론 이때는 이미 서로의 표기법이 달라진 뒤였다. 조선광문회의 <말모이> 작업이 실패한 이후 이 땅의 전 지역을 포괄하는 ‘국어사전’은 따라서 여전히 미완인 셈이다. 표기법의 통일 문제 역시 그렇다. 근대가 여전히 성취의 대상인지, 이제는 극복의 대상인지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민족국가 수립이 근대를 구성하는 요건 가운데 하나라면 여전히 우리에게 근대가 미완의 과제인 것처럼, ‘언어적 근대’라는 숙제 역시 우리는 온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남과 북의 언어를 이야기하면 으레 등장하는 것이 언어 이질화 문제이다. 물론 남에서 쓰는 말과 북에서 쓰는 말은 다르다. 그러나 서울말과 부산말이 다르고 1910년대의 말과 2010년대의 말이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이를 두고 우리는 ‘이질화’ 운운하지 않는다. ‘남북의 언어 이질화’라는 표현은 현상을 무덤덤하게 기술하기보다는 대개 이를 하루빨리 해소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주장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이러한 다름이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다름의 책임을 다른 한쪽(일당 독재의 봉건 세습 왕조, 또는 친미 예속의 저질 자본주의)에 일방적으로 전가시키려고 하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서울말과 부산말의 차이, 그리고 100년 전의 말과 지금의 말이 다른 것이 사회와 제도의 문제를 떠난 완전히 ‘자연적’인 현상인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남북의 언어 차이를 유독 사회와 제도, 체제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돌려야 하는지 역시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방언적인 차이와 세월의 흐름에 의한 언어 변화를 제외한다면 남북이 채택한 체제의 문제는 의외로 ‘이질화’의 큰 요인이 못 되는 것일 수 있다.

   
▲ 제21차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위원회. 2009년 이후 중단되었던 회의가 4년여 만인 2014년 7월 재개되었다. ⓒ김병문

필자가 속해 있는 겨레말큰사전편찬사업회의 일로 평양에서 회의를 할 때의 일이다. 사회과학원 소속의 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을 듣고 “아, 장용남 선생님이시라구요.” 했더니 상대는 “아니요, 장용남입니다.” 한다. 그래서 “아, 네. 장용남 선생님이요.” 하니 다시 “아닙니다. 장. 용. 남. 입니다.” 한다. 이 웃지 못 할 해프닝은 결국 그가 연필로 자신의 이름을 ‘장영남’이라고 적어주고서야 끝이 났다. 평양말은 ‘어’와 ‘오’의 간격이 서울말보다 가까워 우리로서는 잘 구별이 되지는 않는다. 필자가 매우 무안해하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일 없습니다. 개성 사람들도 선생과 꼭같이 잘 못 알아듣습니다.” 한다. 개성은 방언 구획상 서울, 충청, 강원 등과 더불어 중부 방언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북은 ‘미 제국주의에 오염된 잡탕말’인 서울말 대신 평양말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문화어’를 제정해 보급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말은 ‘잡탕말’인 서울말과 같은 음운 체계를 견지하고 있는 셈이다. 남에서 역시 서울말 중심의 ‘표준어’을 보급한 지 한참이지만 동남(경상도) 방언 화자들은 여전히 ‘으’와 ‘어’를 구별해 발음하는 데 힘들어 하고 서남(전라도) 방언 화자들 역시 ‘민주주의의 의의’를 발음할 때면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음운과 문법의 체계는 강고해 어지간해서는 체제의 간섭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4.

   
▲ 북의 말다듬기. '샴푸'를 '머리물비누'로 다듬은 것을 알 수 있다. 사진은 평양의 양각도호텔에 비치되어 있는 용품을 찍은 것. ⓒ김병문

물론 문제는 어휘이다. 그러나 어휘상의 차이 역시 분단 이전부터 있던, 즉 분단과 무관한 지역적 차이가 꽤 있다. 예컨대 남의 <표준국어대사전>은 ‘게사니’라는 올림말에 대해 ‘거위의 북한어’라고 풀이하고 있다. 즉 북에서는 우리가 ‘거위’라고 일컫는 것을 ‘게사니’라고 하는데 이는 물론 단순한 방언적 차이일 뿐이다. ‘도루래’와 ‘땅강아지’, ‘망돌’과 ‘맷돌’도 그런 유이다. 우리가 ‘오징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이 ‘낙지’라고 한다는 사실이나 북에서는 ‘나비’와 ‘나방’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나비’라고 한다는 것도 체제와는 무관한 방언적인 차이일 뿐이다. 남쪽에서도 지역에 따라 ‘솔’과 ‘정구지’, ‘부추’란 말을 쓰듯이, 그리고 서울에서 ‘고구마’라고 하는 것을 남부 지역에서는 ‘감자, 감저’라고 하듯이 말이다. 물론 분단 이후에 생긴 차이들도 꽤 많기는 하다. 예컨대 남측에서는 ‘극장’에서 영화도 연극도 관람이 가능하지만 북측에서는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고 ‘극장’에서는 연극이나 가극 같은 것만을 관람한다. 또 우리가 ‘조연출’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저쪽에서는 ‘부연출’이라고 하는 듯하다. ‘대상, 대상자’란 말에 ‘결혼할 사람’이라는 새로운 뜻이 생긴 것도 흥미롭다(“저는 외국에 가 대상을 찾고 가정을 이루어 편히 살겠어요!”). 그러나 이러한 어휘적 차이 역시 체제의 차이와는 무관하다. 어느 한쪽에서 인위적으로 말에 손을 대서 생긴 변화도 아니다.

그러나 예컨대 콜라나 사이다 같은 ‘청량음료’를 ‘단물’로, ‘분유’를 ‘가루젖’으로 다듬은 것은 경우가 다르다. 이런 예는 분명히 인위적인 노력의 결과인데, 특히 북의 ‘말다듬기’는 1960년대 후반 이후의 정치적 상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나온 사전을 보면 기존의 ‘다듬은말’들을 다시 외래어로 되돌린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얼음보숭이’가 사라지고 ‘아이스크림’이 다시 사전에 오른 게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 다듬기’는 북에서만 한 게 아니라 남에서도 꽤 열심히 그리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 작업이다. 예컨대 예전에 ‘제형(梯形)’으로 쓰던 말을 우리는 ‘사다리꼴’로 ‘순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북은 아직도 ‘제형’이다. ‘분유’를 ‘가루젖’으로 다듬어 생긴 이질화 책임을 북에 돌린다면, ‘제형’을 ‘사디리꼴’로 순화해 생긴 이질화 책임은 남이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휘상의 차이 역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물론 분단의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 서로 ‘다른 언어’가 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상호 교류가 이어지고, 한쪽의 어휘들을 ‘박멸’의 대상으로 삼는 대신 짝을 이루는 어휘들을 동의어 또는 유의어로 인정한다면, 오히려 우리말의 어휘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긍정적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들 양쪽 어휘에 공식적으로 모두 시민권을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전이다.

5.
사실 남과 북의 말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표기법의 차이 때문일지 모른다. 북의 ‘로동’을 우리는 ‘노동’으로 적는다. 북에서는 ‘시내가, 나무잎’이라고 쓰지만, 남에서는 물론 ‘시냇가, 나뭇잎’이다. 북의 ‘나무군’과 남의 ‘나무꾼’도 그렇다. 무엇이 옳은가, 또는 무엇으로 통일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논하기 전에 왜 이러한 차이가 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우리는 ‘읽는다, 앞문, 학교’ 등으로 적지만 실제 발음은 ‘잉는다, 암문, 학꾜’로 한다. 그렇다면 왜 ‘잉는다, 암문, 학꾜’로 소리내면서 ‘읽는다, 앞문, 학교’라고 적는 것일까? 이는 ‘잉는다, 익꼬, 일거’와 같이 소리에 따라 제각각 적는 것보다는 원래의 형태(‘읽-’)를 고정시켜 주는 것이 글을 읽는데(특히 눈으로 읽는 묵독의 경우) 여러모로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컨대 ‘묻다[問]’와 같은 경우에는 ‘길을 물어 보다’에서와 같이 원래의 형태 ‘묻-’을 고정시키지 않고 받침을 ‘ㄹ’으로 바꾸어 적는다.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앞의 ‘읽는다-잉는다’와 같은 예는 그러한 환경이 되면(받침 ‘ㄱ’ 뒤에 ‘ㄴ’이 오면) 언제나 똑같은 음운현상(‘ㄱ’이 ‘ㅇ’으로 변함: 자음동화)이 일어나는 데 비해, ‘묻다-물어’는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받침 ‘ㄷ’ 뒤에 ‘-어’가 오는 똑같은 환경에서도 ‘길을 물어 보다’와 같이 ‘ㄹ’로 변하는 경우와 ‘항아리를 묻어 두다’와 같이 그런 변화가 없이 그대로 ‘ㄷ’인 경우가 있으므로 일정한 음운현상으로 규칙화할 수가 없다). 이런 방식의 표기법은 주시경이 이론화하여 주장한 것인데, 1933년 ‘한글마춤법통일안’ 이래 남과 북이 모두 채택하는 근본 원칙이다.

그렇다면 이 원칙을 따를 때 ‘노동/로동’은 어떻게 될까? 남측에서 이를 ‘노동’으로 적는 것은 두음법칙에 따른 것이다. ‘勞’는 ‘근로’에서와 같이 두 번째 음절 이하에서는 원래의 음 ‘로’로 소리 나지만, 단어의 첫음절에 오게 되면 ‘노’가 된다. 즉 ‘ㄹ’이 어두에 오면 언제나 ‘ㄴ’으로 소리난다는 것인데, 이는 ‘읽는다-잉는다’와 같이 매우 규칙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두음법칙을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규칙으로 인정한다면, ‘로동’으로 적는 것이 우리 말 표기의 근본원칙에 더 부합하는 것일 수 있다. 분단 뒤 나온 북측의 첫 언어학적 발언이 바로 이 두음법칙 문제였는데, 경성제대와 동경제대를 거친 일급의 언어학자 김수경은 <로동신문>에 발표한 논문에서 1933년 맞춤법의 취지대로라면 ‘노동’이 아니라 ‘로동’으로 적어야 함을 논리정연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남에서는 분명 두음법칙이 인정되지만, 북측은 표기만이 아니라 실제 발음도 ‘로동’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 2014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제22차 남북 공동회의. 사진은 공동회의가 열렸던 양각도호텔의 회의장. ⓒ김병문

즉 남에서라면 두음법칙이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규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물론 남측에서도 외래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남과 북을 아우르게 되면 이 규칙이 보편적이지도 필수적이지도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읽는다-잉는다’와는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묻다-물어, 묻다-묻어’와도 다른데 굳이 비교하자면, ‘덥다’를 어디에서는 ‘더워’로 어디에서는 ‘더버’로 소리내는 상황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때는 표기 이전에 발음의 통일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물론 발음은 복수로 두고 표기만 통일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그러면 상황이 좀 더 복잡해질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일단 ‘로동’으로 적(고 [노동]으로 발음하)는 것이 남측이 따르는 원칙에서 보더라도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 지적해 두고자 한다. ‘시내가/시냇가, 나무잎/나뭇잎’은 상황이 다르다. 이른바 ‘사이시옷’ 문제인데, 앞의 두음법칙과 달리 ‘사잇소리 현상’은 일정한 음운 규칙으로 일반화가 되지 않는다. 즉 동일한 환경이더라도 사잇소리가 덧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고무줄]-[빨래쭐], [회수](回收)-[회쑤](回數)’와 같은 예가 그렇다. 따라서 이 사이시옷 문제는 ‘읽는다-잉는다’가 아니라 ‘묻다-물어, 묻다-묻어’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결국 소리의 변화를 표기에 반영하는 남측의 방식이 한글맞춤법의 원칙에 좀 더 부합하다고 할 수 있겠다.

   
▲ 양각도호텔에서 바라본 평양 전경 ⓒ김병문

6.
남과 북이 함께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위에서 제시한 어휘나 표기의 차이를 해소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는 ‘게사니/거위’의 짝 중 하나만 살리고 나머지는 쓰지 말아야 할 비규범어로 보는 방법일 수도 있지만, 이 둘 모두에 공식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어휘도 그렇지만, 특히 표기가 통일되지 않은 사전이란 상상할 수 없다. 그 목적과 의도가 어떻든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해당 어휘의 형태와 의미, 그리고 그 문법적 특성을 일관된 기준과 방법론으로 기술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거기에 올라갈 어휘에, 그리고 표기에 남과 북의 차이가 있다면 이를 어떤 식으로든 해소하지 않고는 사전은 단 한 페이지도 만들어질 수가 없다.

<겨레말큰사전> 사업은 1989년 방북한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에게 ‘통일국어대사전’을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5년 2월 ‘남북공동편찬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그 뒤로 매년 네 차례 정기적으로 공동회의를 개최하여 사전 편찬과 관련한 여러 가지 기초 작업을 하였다. 마침내 2009년에는 실제 원고 집필에 들어갔으나 2010년부터 남북관계가 단절되어 4년 이상 사전 작업이 중단되었다. 다행히 2014년 7월 다시 편찬회의가 재개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경색된 남북관계로 인해 안정적인 회의 개최가 어려운 상황이다. 2007년 남에서 제정된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은 2013년 개정되어 편찬 사업 기간을 2019년 4월로 5년 연장한 바 있다.

   
▲ 김일성광장에서 필자 ⓒ김병문

이 글의 초반에 밝힌 바와 같이 ‘언어적 근대’는 단일 언어 사회라는 이상을 자국어 문법서와 사전을 통해 구현하려는 일종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념의 시대’가 지나간 지는 이미 오래다. 더구나 ‘단일 언어 사회’를 이상적으로 보는 관점 역시 이른바 ‘세계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비추어 보면 일종의 넌센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근대의 극복’ 역시 바로 그 ‘근대’라는 문제의식의 재검토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나 허공에 대고 내지르는 공허한 몸짓이 되고 말 공산이 크다. 아직도 ‘언어적 근대’의 문제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겨레는 우리 말고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늦어지고 지체되었으므로 오히려 ‘근대’가 만들어낸 수많은 문제점까지 함께 고민하며 작업해 나갈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는 있다. 따라서 <겨레말큰사전>은 미뤄두었던 숙제를 비로소 꺼내어 어떻게든 마무리하려는 뒤늦은 노력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전망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는 작업이다. 그런 노력들이 모여 결실을 거둘 때만이 ‘가장 늦은 통일’은 말 그대로 ‘가장 멋진 통일로’ 우리에게 다가 오리라고 믿는다.

김병문/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책임연구원

*이 글은 계간 <통일코리아> 2015 제4권에도 게재됐습니다.

김병문  pourm081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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