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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 이야기 같은 독일 통일의 기적, 그 뒤엔?신앙인의 눈으로 독일 통일 보기

독일통일 과정을 두고 크게 두 가지 시각이 있는 듯하다. 우선 하나는 ‘운’ 또는 ‘역사의 기적’이라는 시각이다. 독일 통일과정을 살펴보면 역사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하다. 우선 당시 구소련군 40만명, 동독군 15만명이 주둔하던 동독에서 수십만명에 달하는 동독시민들의 민중봉기가 발생하고, 이에 대하여 당시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불개입 방침을 천명하고, 동독시민들의 시위에 굴복한 동독 정부가 여행자유화 조치를 발표하던 순간의 동독 관료의 기자회견 실수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볼 때, 가히 기적이라고 불릴 만하다. 무엇보다 역사상 어느 분단국의 통합과정에서도 볼 수 없는 ‘무혈 통일’이 이루어졌으니 ‘기적’이라는 표현 외에는 더 이상 적합한 말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통일에 대한 또 다른 평가는 서독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라는 견해다. 서독이 1960년대 후반부터 동방정책을 추진하고, 이후 1972년에 동서독기본조약을 체결한 후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외교적으로 당시 통일에 반대하던 영국, 프랑스를 설득하고, 소련의 동의를 얻어낸 탁월한 외교력 덕분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살펴볼 때, 이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서독의 업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독일 통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시고 주관하신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 통일은 운이나 외교력 때문이었다?

우선, 독일 통일의 결정적 성공요인인 구소련의 불개입과 동의라는 결단을 내린 소련의 개혁 지도자 고르바초프의 등장 자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통상 구소련의 지도자들은 70대의 원로급들이 맡아왔다. 그러나 1906년생으로서 1964부터 18년간 재임해온 브레즈네프가 1982년도에 사망한 이후 집권한 안드로포프(1914년생) 역시 2년만인 1984년 사망하였고, 뒤이어 집권한 체르넨코(1911년생) 역시 바로 다음 해인 1985년 사망하였다. 3년 사이에 3명의 최고지도자를 잃은 구소련은 정상적이라면 십 수년이 흘러야 가능했던, 1931년생으로서 당시 55세의 개혁성향의 고르바초프를 최고지도자로 선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르바초프의 가족은 그의 친할아버지가 비밀경찰에 의해 시베리아로 추방된 적이 있을 정도로 스탈린 치하에서 고통을 받은 경험이 있다). 또한 1986년 발생한 체르노빌원전폭발사건은 고르바초프에게 구소련 체제의 한계에 대해 절실히 자각하게 했으며 본인이 추진하던 개혁개방정책을 더욱 강하게 추진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르바초프 본인이 회고록에서 구소련체제의 한계를 느끼는 절실한 계기가 체르노빌원전폭발사건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87년부터 1989년까지 3년 연속 계속된 식량난은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주민들의 반발을 방지하기 위해 1989년 독일 통일의 시기 당시 서독으로부터 150억 마르크 상당의 차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하였다. 반면에 당시 서독은 3년 연속 4%대의 경제성장과 1,000억 마르크 흑자의 최고의 경제호황기를 맞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통일의 외적 환경을 조성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의 외적 환경의 변화가 이른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사건 4~5년 전에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런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단지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 조성에 그친 것이 아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은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외부적인 상황을 조성하시고 기적의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이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독일통일의 과정을 먼저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흔히들 독일 통일을 두고 ‘흡수통일’이라고 한다. 공산주의 체제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흡수되었다는 의미에서라면 나름 틀리지 않은 표현이지만, 독일 통일 과정의 실체에 비추어보면 자칫 ‘서독의 주도성과 동독의 수동적 지위’라고 오해할 여지를 주는 ‘흡수통일’이라는 표현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오히려 독일사람들, 특히 동독 사람들에게 독일 통일은 바로 ‘Revolution’ 즉 혁명이었다. 그것도 남이 대신 해준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 스스로 공산정권을 붕괴시킨 ‘혁명’이었다.

독일 통일을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이라고 보는 몇 가지 이유

1989. 5 2. 헝가리 국경개방조치와 1989. 5. 7. 동독지방선거 부정의혹을 둘러싼 내부 혼란으로 많은 수의 동독인들의 탈출 행렬이 시작되었으며, 동독 곳곳에서 개혁과 개방을 주장하는 시위의 물결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 흐름은 수개월이 지난 10월 초무렵에는 수만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시위로 발전하였으며, 결국 1989. 10. 9. 수십만의 시위가 발생하자 18년 동안 동독공산정권을 집권해온 에리히 호네커는 1989. 10. 18. 당내 반발로 인하여 실각하게 되고 이후 동독 공산정권은 개혁정책과 자유 총선거를 준비하는 체제로 나아가게 된다(당시 호네커는 시위에 대한 무력진압을 주장하였으나 공산당 내부에서 거부되었고 결국 실각되었다). 즉 공산정권이 붕괴된 것이다. 이후 1989. 11. 4. 동베를린 시민 100만명의 시위가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동독공산정권은 여행자유화 조치 등 유화정책을 통해 동독 주민들의 민심을 안정화시키려고 하였으나, 1989. 11. 9. 이와 관련한 대내외 기자들을 상대로 한 기자회견장에서 당시 공산당 대변인이었던 권터샤보브스키가 여행자유화 조치의 시행시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 즉시’라고 잘못 답변을 한 것이 TV 등을 통해 생방송으로 전달되며 결국 당일 밤 수만의 동베를린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통행하게 되면서 베를린 장벽마저 무너지고 통일의 시대로 향하게 된 것이다. 즉 역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직접 개입하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서독은 초기에는 급격한 통일에 대한 우려로 점진적 통일을 선호하였으나, 당시 ‘서독 마르크화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으로 간다’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동독주민들의 엄청난 시위와 압력에 못이겨 조속한 통일로 선회하였으며, 결국 1990. 3. 18. 동독 자유총선거에서 급속한 통일을 추진을 공약으로 내세운 동독기독교연합 정당이 집권하게 되면서 서독과 수차례의 협상을 통해 1990. 8. 31. 통일조약을 통해 1990. 10. 3. 공식적으로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서독 통일은 어디까지나 동독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추진한, ‘대등’한 ‘합의’ 통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바로 1981년부터 평화를 위해 기도한 라이프찌히 니콜라이 교회가 있었다. 평소 50명도 채 되지 않는 소수의 신앙인들이 월요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동독의 앞날에 대해 고민하고 기도했으며, 그러한 깨어있는 소수의 신앙인들의 모임에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것이다. 1989년 그 역사적 순간에, 동독 시민들, 그 중에서도 시위의 중심이 된 라이프찌히 시민들은 니콜라이 교회로 더욱 몰려들었고, 평소 50명도 되지 않던 월요기도회에는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그리고 18년간 장기 집권하던 동독 호네커 정권의 실각의 요인이 된 1989. 10. 9. 시위의 밤, 니콜라이 교회 주변에는 수만명의 시위대가 모여들었고, 그 주변에는 이들 시위가 폭력시위로 변한다면 이를 빌미로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슈타치와 경찰, 동독 군병력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여느 때처럼 ‘예수님의 방법’, ‘평화’의 방법으로 ‘공의’를 외칠 것을 선포하였고, 바로 그러한 메시지에 사람들이 순종한 순간, 라이프찌히에서는 유리창 하나 깨어지지 않는 기적의 평화 시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눌린 슈타치와 경찰은 철수를 하였고, 그 결과 무력진압을 추진하던 호네커는 독일 공산당 내에서도 신뢰를 잃고 실각하게 된 것이다(당시 동독 정부 중앙위원회 위원인 ‘진더만’은 회고록에서 “우리들은 모든 것에 대해서 준비했다. 촛불과 기도외에는...”이라고 고백하기도 했으며, 현재 라이프찌히 니콜라이 교회는 당시 동독 혁명의 상징적인 장소로 일종의 성지와 같이 여겨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동화 속의 이야기 같은 기적을 하나님께서는 이루어내신 것이다. 바로,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던 그 순간 남은자 몇 명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의 순간에 기름 부으사 들어 사용하신 것이다.

이후 동독에 자유총선거가 이루어지고 동독군과 비밀경찰인 슈타치(Stasi)를 청산하는 과정에서도 바로 그 남겨진 신실한 신앙인들을 사용하셔서 군해체 작업 및 서독과의 통일을 준비하는 일을 맡기셨다. 자유총선거 후 동독 최후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어 동독군 해체작업을 담당했던 사람이 ‘에펠만’이라는 ‘목사’였으며, 슈타치청산을 담당했던 사람 역시 '요하킴 가욱'이라는 목사였다(요하킴 가욱은 최근 독일 연방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나님께서 동서독 통일에 은혜를 베푸신 몇 가지 이유

하나님께서 이러한 독일에게 이러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회개’와 ‘헌신’을 들 수 있다. 통일 당시 구동독지역에서 리더가 된 인물들 중에는 서독에서 자발적으로 동독으로 이사를 와서 목회를 하던 목사들이 다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가 싫어하는 동독지역으로 자의로 와서 동독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교회를 지키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키워냈다(현재 독일 메르켈 총리의 아버지도 바로 그런 목사 중 한 명이다). 또한 그들은 동독 지역 내에서 소수자 약자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 동독 주민들의 마음을 얻고 신뢰를 얻어냈다. 이렇게 시민들로부터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은 신뢰받은 신앙인들이 있었기에 통일의 혼란기에 시민들이 이들을 자연스럽게 지도자로 여기게 되고 당시 동독 공산정권의 무력진압 의도에 말려들지 않고 ‘무혈’ 혁명을 이루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서독 역시 지속적인 나찌시절에 대한 반성으로 주변국에 대한 신뢰를 얻어온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통일 독일이 또 다시 유럽의 폭군으로 등장하게 되지 않을지 우려하며 독일 통일을 적극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영국, 프랑스 등을 설득해낸 건 결국 서독의 약속, 향후 군사력 수준을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하겠다는 등의 약속이었고, 무엇보다 그런 약속을 신뢰할 수밖에 없게 만든 외교적 명분, 즉 서독이 과거 4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나찌시절에 대한 반성과 청산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독 측의 행위가 전략이건 진심이건 간에 이렇게 수십 년 동안 해온 서독의 행위는 외교전의 순간 강한 명분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는 1990. 3. 자유총선거에 의해 막 성립된 동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동독 자유의회에서는 1990. 4. 구소련지역 유대인들 수십만명을 난민으로 받아들이는 결정을 하여 역시 2차 세계대전에 대하여 서독 측과 같은 입장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반성적 태도가 결국 외교적인 강한 명분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기에 동독군 해체 작업을 비롯한 일련의 후속 과정에서도 단 한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도록 해주신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용기‘와 ‘결단’이다. 동독 시민들은 이미 1953년도 동베를린 봉기 때 구소련군으로부터 무력진압을 받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1989. 6. 4. 중국이 천안문사태를 무력을 진압했다는 소식을 듣고 알면서도, 두려움 속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를 위한 시위를 계속하였다. 또한 이러한 독일 통일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서독의 준비와 결단이다. 서독은 1960년대부터 동방정책을 통해 독일과 관계 개선을 도모했으며, 그 결과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후에도 동서독간의 추가 여러 조약을 통해 서신왕래, TV 등 언론매체 교류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교류 과정에서 주목해볼 만 한 점은 이렇게 교류를 하면서도 1960년대 서독 잘쯔기터에 동독인권기록보존소를 설치한 이래로 지속적인 동독의 반인권사례에 대해서는 조사해왔다는 점이다. 또한 서독은 동독을 탈출한 사람들에게 서독의 사회시스템으로 적극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적인 교류 및 포용정책이 동독주민들의 의식을 깨우치게 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독일 통일은 또한 지속적인 준비와 과감할 결단의 결실

그러나 서독 내부에서도 시일이 지나면서 통일은 먼 미래의 일로 여기고 이렇게 평화 교류 공존 정도면 족하다는 분위기가 1980년대 들어 퍼져가기 시작했으며, 1989년 여름 이후 동독 주민들의 혁명의 분위기에 대한 서독의 첫 반응은 통일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머뭇거림이었다. 1989. 9. 5. 콜 총리는 의회연설에서 ‘탈출은 존중하나 그러나 동독문제의 근본은 동독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여 통일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9. 11. 20. 동독 주민들의 통일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자 비로소 서독은 본격적으로 통일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서독은 초기의 머뭇거림에서 벗어나서, 후에 당시 통일을 추진했던 ‘역사에서 열린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에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서독정치인들의 구호로 상징되는 각오와 결단으로 같은 형제인 동독과 과감히 통합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만일 서독이 그 상황에 그런 과감한 결정을 하고 독일 통일에 대해 불안해하는 세계의 많은 나라를 설득하는 노력을 재빨리 시행하지 않았다면, 1990. 8. 2.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전 세계의 관심이 중동으로 향하면서 점차 독일 통일은 추진력을 잃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역사에서 기회의 창이 잠깐 열렸을 때 그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렇게 독일 통일은 지속적인 준비와 함께 때가 왔을 때 과감한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독일 통일은 인간의 치밀한 계획으로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도와 노력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극적인 주권적 개입에 의한 역사의 찬란한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독일은 2차대전 후 제한되었던 ‘주권의 회복’과 동독 주민들의 ‘자유의 회복’, 분단국의 ‘무혈통일’이라는 세계사적 기적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 점에서 독일은 성공적이었는가에 대한 여러가지 측면의 분석(특히 경제적 측면)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동독 주민들의 자유 회복, 세계사적으로 유일한 무혈 통일이라는 말 앞에 그 어떤 명목으로 성공여부를 논할 수 있겠는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독일은 현재 세계 4위의 경제대국으로서 EU 최고의 경제력을 자랑하고 있으며, 동서독간 지역 격차 역시 통일 당시보다는 현저히 완화되어 서독지역의 70% 수준으로 발전했으며, 이런 지역간 격차는 수치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다른 나라들의 국가 내부적 지역간의 경제력 격차와 비슷한 수준으로서 특별히 문제삼을 것이 없다는 것이 현지 독일인들의 다수의 평가이다(참고로 우리나라의 경우 1인당 소득 하위 3개 지역의 상위 3개 지역에 대한 비율은 1980년대 중반에는 70%였으나 2000대 초반에는 오히려 60%대 초반으로 하락해 지역별 소득 격차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무엇보다 ‘분단국에서 경제적 번영, 안정만이 최고의 가치일 수는 없으며, 통일은 경제 이전에 자유, 인권에 관한 문제로서 장래세대를 위한 국가적 결단이다’라는 독일 독재청산재단 부소장 등 관계자들의 말이 우리가 통일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압축해서 알려준다고 할 것이다. 또한 통일 후 20여년이 지난 지금 구동독 공산당의 후신 좌파정당이 전국적으로 10% 정도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을 예로 들며, 동서독 주민간의 완전한 화합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므로 독일 통일은 실패한 통일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살펴볼 때, 해당 정당 당원의 50% 이상이 70세 이상의 노년층으로서 통일 당시 구동독에서 기득권층에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2009년 통일 후 태어난 독일 청년세대들이 최초로 참여한 지난 2009년 독일 연방의회선거에서 이들 젊은 세대들은 동서독 출신이라는 이질감에 따른 문제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과도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할 것이다.

남북한 통일을 향한 기독교인의 자세

60년이 넘는 시간동안 분단되어 있던 나라가 하나가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문제를 두려워하여 통일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태도가 아니라 과감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결단하고 나아가는 자세일 것이다. 우리와 우리 선조들의 죄에 대해서 다니엘처럼, 느헤미아처럼 눈물로 회개하고 기도의 제단을 쌓으며, 지금 할 수 있는 지혜를 모아 헌신하며 준비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때가 왔을 때 이를 올바로 분별하여 사랑과 공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과감히 결단할 때, 이 땅에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고, 사람들의 무시와 조롱 속에서도 묵묵히 방주를 건설했던 노아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준비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역시 불쌍하게 생각하시고 다시 한 번 이 땅에 ‘그분의 역사’ 이루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상황이 동서독 통일 당시 상황보다 더 어렵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더 크게 그분의 주권적 개입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것이기에.

주여 이 땅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땅에 속히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소서!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게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이사야 58:6~12)”

<한동대 교수, 변호사>

 

송인호  ihsong@handong.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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