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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근 전 지사 "남은 삶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북한 교회 짓기, 발달장애학교 설립 꿈

높이 올라갈수록 낙하의 위험과 후유증은 더 커지는 법이다. 유명 연예인이나 고위 공무원의 추락이 그럴 것이다. 유종근(68).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박사를 취득한 뒤 럿커스대 교수와 뉴저지 주지사 경제자문관을 역임했다. 1991년 귀국 후엔 민주당 홍보위원장, 아태재단 사무부총장을 거쳤다. 1995년엔 초대 민선 전북지사에 당선됐다. 내친김에 2002년엔 대통령 선거 출마도 선언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대선 경선 참여를 선언 직후 뇌물수수 혐의가 인정돼 3년여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뒤 그는 무대에서 사라졌다. 간간히 언론에 이름 석자가 눈에 띄긴 했지만 화려한 서포트 라이트는 아니었다. 4.11 총선이 끝난 이틀 뒤인 지난 13일 오전, 그가 대표이사이자 회장으로 있는 경기도 파주시 검산동의 빵공장 '온누리F&D'를 찾아갔다. 가는 길에 눈에 띄는 것은 온통 산과 군부대, 농촌 마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처지가 화려했던 과거와 더욱 대비됐던 게.

대표이사실에서 기자 일행을 먼저 맞은 이는 뜻밖에 소년이었다. 유주영(11). 유 전 지사의 늦둥이 아들이다. 일찍부터 홈스쿨링을 통해 성경과 전공서적을 가르치고 있고, 경영수학, 영어성경 등 원서를 읽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던 터였다.

“유 목사, 여기 앉아라. 오늘은 네가 회장이다.” 낯선 손님에게 장난을 걸어오는 막내에게 유 전 지사가 하는 말이다. ‘유 목사’ 그런데 이 호칭이 장난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서원해서 하나님께 바쳐버렸어요.” 유 전 지사의 설명이다. ‘천재 소년’ 주영이는 요즘 어머니 김윤아(49) 목사의 신학박사 과정 수업을 함께 듣기 위해 매주 월요일엔 평택대로 청강을 다닌다. 주영이에게 살짝 “신학 공부 재미있어?”라고 물었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영락없는 어린이다.

유 전 지사와의 인터뷰에서는 4.11 총선 직후이기도 하고 해서 정치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었다. 유 전 지사 본인에 대한 관심도 관심이지만 동생 유종일 KDI 교수가 민주통합당 공천에 탈락했고, 동생의 부인(유승희)이 성북구에서 당선됐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참패한 데 대해 그는 “아쉽지만 잘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이 절호의 기회를 국민들한테 선사받았지만 이렇게 오만하고 무능할 수가 없었다”며 “야권연대는 하나의 수단인데 그게 목적이 되어서 해군기지 반대, 한미FTA 반대 등을 주장했다”고 비판했다. ‘좌파세력’에 휘둘렸다는 것이다.

유 전 지사는 두 가지를 반대한 민주당에 대해 “수권정당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거는 기본적으로 중도를 많이 확보하는 싸움”이라며 “이번에 혼좀 나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민주당을 이렇게 정리한 세력이 이번에 정리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 대선에 대해 묻자 그는 고 노무현 대통령 얘기부터 꺼냈다. ‘말로는 국민 통합을 외치면서 실제 행동은 자꾸 편가르기를 했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국민들이 잠시 현혹되어 노무현을 대단한 지도자로 봤지만 잘못된 지도자”라고 지적했다. 현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짧게 “도무지 정치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번 총선을 통해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해서는 “신뢰와 일관성을 얘기하는 것은 높이 사지만 그걸 위해서는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며 “지난번 김무성 의원 내치는 것을 보고 무섭더라. 옛날 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떤 사안이든지 대단한 통찰력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내가 주로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북한 체제와 통일에 대해서는 “길게 보면 통일은 될 것”이라며 “하지만 곧 무너질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북한 체제가 공고하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며 “과거 소련이 무너질 줄 누가 알았느냐. 5공 정권이 무너질 줄 누가 알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유신정권도 그렇고 통제가 가혹하다는 것은 그만큼 체제가 약하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자신이 이름을 붙였다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햇볕정책은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며 “햇볕정책이 마지막엔 약간 수정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데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약속 불이행 등에 대해 ‘따끔한 지적’을 못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유 전 지사와의 인터뷰 전문.

   
▲ 유종근 전 전북지사. 과거 교도소 생활과 4.11 총선 등에 대해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이범진 기자

-지난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가 되셨다. 평소 이미지와는 좀 안맞는다는 얘기를 들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가장 작은 자에게 대접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순복음교회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너무 기복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면도 있다. 내가 과거 도지사 할 때 조용기 목사님이 익산에 오셔서 집회를 인도하셨다. 그때 현직 지사로서 안내해드렸다. 그러면서 가까워지게 됐다. 서울 와서 주일 보낼 때는 일부러 큰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때는 큰 꿈도 가지고 있었을 때였다. 예배가 아닌 일종의 선거운동 하러 간 것이다. 나중에 회개했다. 그런데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조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니까 단순한 기복이 아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은 분명한 원칙이 있다는 말씀이었다. 즉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중간중간 성경 말씀을 술술 외웠다. 비결을 물으니 교도소 얘기를 했다.

-성경 구절을 많이 외우신 것 같다.
교도소에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었다. 그 책에서 말씀 암송을 하라고 했다. 매일 성경 읽으면서 암송할 구절들을 대학 노트에 적었다. 하루에 노트 두 페이지 분량을 암송했다. 저녁 9시 취침인데 나는 항상 11시 넘어서 잤다. 취침 시간까지 기도하고 암송했다. 계속 서서 왔다갔다 하니까 밤에 당직 교도관들이 말릴 정도였다.

-교도소 3년여 동안 성경 말씀을 외웠으면 특별한 간증이 많으실 것 같은데?
저는 영적 감수성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아내 김윤아 목사는 하나님과 교감이 깊어서 즉각 응답받곤 한다. 그만큼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나는 훨씬 더 이성적인 스타일이다. 은혜를 즉각 느끼지는 못한다. 나는 초등학교 5년 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다. 난 1973년 미국에서 조교수를 시작하면서 이민교회를 개척했다. 한국에서 퇴임하고 이민온 원로목사가 나를 찾아오더니 교회를 같이 하자고 해서 둘이 뉴저지에서 개척했다. 감리교회였다. 난 그 교회 평신도 대표로 남부 뉴저지 연회에 그 교회를 가입시키는 일을 해드렸다. 그 교회에서 권사까지 했다. 그러다 뉴저지 주지사 자문을 맡아 이사를 가면서 장로교회로 옮기게 됐다. 거기서 안수집사가 된 것이다. 한국에 와서는 광주순복음교회에서 안수집사가 됐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인정을 안해줘서 다시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2010년에 장로 추천을 받고 지난해 장로가 된 것이다. 안수집사가 된 지 딱 30년만에 장로가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 믿음과 비슷한 궤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찍 예수를 믿었지만 그동안 믿음생활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이다.

-간증 한 토막을 들려주신다면?
내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건 전북지사 당선될 때였다. 미국에서 갑자기 들어와서 아무런 정치적인 빽도 없이 최초 민선지사가 된 것이다. 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경제학자가 되어 우리나라 경제를 일으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그 꿈을 좋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내 개인 영달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나라 GDP가 80달러일 때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경제학자가 되었는데 한국이 잘살게 되었다. ‘이제 나 같은 건 필요없나 보다’ 생각했는데 주지사 경제자문을 하면서 ‘대한민국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 몰라도 전라북도는 나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순 주지사 자문이 아닌 주지사라는 생각으로 ‘내가 전북지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늘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분위기를 보니 김 전 대통령께서 이미 당 사무총장을 한 최 모 의원에게 공천 약속을 해놓은 상태였다. 김 전 대통령은 비례대표를 하라고 했는데 난 비례대표 관심없고 전북지사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도지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당에서는 전부 안된다고 말렸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이상하게 ‘이번만큼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일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최 의원과 치열한 접전을 했다. 3명이 경선을 했는데 1차 투표에서는 4표가 부족해 2등을 했지만 결선 투표에서 결국 6표 차이를 승리하게 됐다. 그때 든 생각은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겼다’는 거였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다.

-3년여의 수감에 대해 원망한 적은 없나?
처음 구치소 들어갈 때 그랬다. ‘내가 공소장에 열거한 범죄는 짓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없다고는 못한다. 성경에 나오는 것만 아니라 세상 법에도 한번도 저촉함 없이 살았느냐, 그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들켰냐 안들켰냐 뿐이다’라고. 요셉처럼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억울하게 들어갔다. 그런데 3년간 살고나오니 그게 축복이 됐다. 내 죄를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데 공소장에 대해서는 억울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뭐가 억울하다고 할 수 있겠나. ‘3년이든 5년이든 처분대로 따르겠습니다’ 기도했다. 교도소 수감되는 첫날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평강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첫날부터 편히 자고 밥도 잘 먹었다. 교도소 문을 나오는 날까지 한번도 억울하거나 지루한 날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꾀병을 앓으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운동했다. 독거실에 있었으니까 기도굴에 들어간 셈 치고 열심히 기도했다.

-교도소에서는 주로 어떤 기도를 하셨나?
딸(예지)을 위한 기도를 제일 많이 했다(예지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 요즘은 주영이 위해 기도한다. 아내가 처녀 때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했다는데 정치인 아내가 되고나서 매일 선거하면서 마음이 콩밭에 가있으니까 하나님이 계속 경고를 주셨음에도 못알아차리니까 저를 집어넣으셨다고 생각한다. 이게 결국 화가 아닌 복이 될 걸 아시니까. 내가 교도소 갔을 때 아내는 기도원으로 피신해 들어갔다. 기도하고 나서 면회를 와서 하는 말. ‘화가 아닌 복이 될 것이다.’ 그 말이 큰 힘이 됐다.

   
▲ 유 전 지사가 지난 4.11 총선 결과와 관련 그림까지 그려가며 "선거의 기본정석은 중도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라며 민주통합당의 정책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그 옆이 늦둥이 아들 주영. ⓒ유코리아뉴스 이범진 기자

-이제 정치의 뜻은 완전 접으신 건가?
선거라는 게 크리스천으로서는 결코 은혜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려야 하니까. 정치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마음을 비웠다. 열심히 기도해서 마음 비워놨는데 가끔 누가 찾아와서 얘기하면 마음이 흔들릴 때가 없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허락만 해달라 우리가 대신 후보 등록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나는 ‘되어도 안한다’고 했다.

-4.11총선 결과, 어떻게 보나?
민주당이 진 게 아쉽지만 잘 됐다고 본다. 대선 때문이다. 민주당이 정말 절호의 기회를 국민한테 선사받았는데 이렇게 오만하고 이렇게 무능할 수가 없었다. 야권연대는 하나의 수단인데 그게 하나의 목적이 되어서 좌파세력에 휘둘려서 해군기지 반대, 한미FTA 폐지 를 주장했다. 이건 수권정당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FTA가 좋든 나쁘든 국가간 조약을 했으면 일방적 폐기는 외교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미국 아닌가. 미국과 등지고 한반도에서 하루라도 버틸 수 있나. 물론 그걸 알면서도 눈앞의 이익(선거 승리)을 위해 말을 바꾼 것이라고 본다. 해군기지를 반대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김용민이란 사람을 공천준 것도 잘못이지만 막말 파문이 터졌을 때 즉각적으로 선을 그었어야 했다. 물론 김용민이 기독교를 모독했다고 하지만 기독교 전체를 욕한 게 아니다. 기독교계에서도 일부가 범죄집단인 거 맞다.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저질스런 말로 해야 설득력이 있는 건 아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품위를 지켜야 한다. ‘나꼼수’ 지지자들이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대한민국 국민의 숫자로 보면 얼마 되지 않는다. 소리 높은 몇 사람 때문에 얼마나 소리 없는 다수의 표가 떨어져나가는지 왜 모르나. 선거의 기본정석은 중도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미국 공화당도 예비선거에서는 보수 쪽으로 더 많이 간다. 하지만 본선에서는 다르다. 훨씬 더 중도를 향해 움직인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본선에서는 좀 더 오른쪽으로 간다. 중간을 먹기 위해서다. 민주통합당은 이번에 혼좀 나야 한다. 그래야 정신 차린다. 선거를 이런 식으로 정리한 세력은 이번에 정리되어야 한다.

-올 대선은 어떻게 보나?
난 옛날부터 우리나라 정치가 너무 갈등이 심하고 분열이 심하다고 지적해왔다.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상황에서 정치는 그것을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가 더 갈등을 조장한다. 그것이 우리나라 정치와 언론의 자화상이다. 언론과 정치권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정치가 선진정치가 될 수 없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이 그런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정권과 싸울 때는 법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도 이게 습관처럼 남아 있다. 국민의 뜻에 따라 투표로 정부를 선정했다면 따라줘야 하는데 무조건 반대하는 게 옳다고 본다. 이건 잘못된 것이다.

2002년 내가 대선 후보 경선에 나오면서 국가경영에 대한 전략과 계획을 가지고 나왔다. 그때 낸 책이 ‘신국가론’이다. 책의 기본 메시지는 신뢰사회로 가자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불신이 팽배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방법론적인 테크닉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지도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내가 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말려서 중간에 그만두고 말았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그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너무 안타깝다. 2002년 대선 경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출정식 때 노 후보가 내 얘기를 했다. ‘내가 최근 읽은 책 중에 유 지사의 신국가론을 읽었다’는 것이다. 제가 그때 중도하차 하면서 ‘노무현 지지해줘라’고 얘기했다. 노 후보가 대통령 되면 나와 생각이 같으니까 잘할 것 같았는데 말로는 국민통합 하면서 실제 행동으로는 자꾸 편가르기를 했다. 정책도 늘 20대 80으로 나눴다. 말로 사람을 죽였다. 지도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게 첫 번째 역할인데 국민들이 잠시 현혹되어 노무현을 대단한 지도자로 봤지만 잘못된 지도자였다. MB는 도무지 정치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 다음 지도자는 반드시 정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나라를 통합과 신뢰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역할 할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박근혜 위원장에 대해서는?
나와 비슷하게 ‘신뢰’와 ‘일관성’을 얘기하더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포용력이 있어야 하는데 과거 김무성 내치는 것 보니까 무섭더라. 옛날 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DJ와 생각이나 철학이 비슷하신 것 같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내가 영향 받은 게 많다. 이분을 198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뵈었다. ‘국가지도자가 이런 분이구나’ 생각했다. 어떤 사안이든지 대단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 경제 철학 등 광범위한 지식을 잘 통합해서 균형적 관점으로 정치 현안을 꿰뚫어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많은 걸 배웠다. 경제에 대해서는 나한테 배우겠다고 하셔서 내가 가르친 적도 있다. IMF 환란 때는 서로 언성을 높이면서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나라가 이 방향으로 안가면 풍전등화인데 설득이 안되니까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분도 나름대로 논리가 있는 분이니까 아무리 미국이 뭐라고 해도 본인이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되면 안받아들이시는 분이다. 결국 그분은 내 조건을 받아들이셨다.

   
▲ 집무실 벽 액자 속엔 마치 오랜 추억처럼 클린턴 대통령 방한 때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 있다.
-파주에서 빵공장을 하시는 게 단순 생업을 위한 건지 정말 궁금하다.
난 공직에 아무 미련이 없다. 이 나이에 누가 불러줄 것 같지도 않다. 아직 녹슬지 않은 머리니까 누가 공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혹시나 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리지는 않는다. 미련은 버렸다. 나의 남은 삶은 가족들 부양하고 애들 잘 교육시키고 사회의 일꾼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작은 회사 시작한 지 얼마 안되었으니까 잘 키워 앞으로 선교 구제하도록 하는 게 목표다. 봉사하는 삶으로 여생을 마치고 싶다.

*통일 관련 책(‘한반도 통일의 철학적 원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공존’)도 쓰셨던데 통일에 대한 관점이 궁금하다.
전북 도지사 된 지 얼마 안되었을 땐데 원광대 철학과 교수가 찾아와서 97년 봄에 부산에서 한국철학회 학술대회가 통일을 주제로 열리는데 경제 분야의 통일에 관해 발표를 꼭 해달라고 했다. 처음엔 사양하다가 아태재단에서 공부한 걸 밑천 삼아 해보기로 했다. 이것저것 읽다보니 결국 철학의 원리가 뭐냐 따지고 보니 한반도 통일을 어떤 원칙 위에서 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일부 급진 쪽은 좌파논리에 의해 하려고 하고, 보수진영은 자유민주주의 원칙으로 하려고 했다. 깊이 파고들어가니 좌파논리, 즉 마르크스의 논리는 모든 인간사회는 불평등 구조라는 전제였다. 이 구조를 타파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였다. 내가 보기엔 그게 아니었다. 불평등 구조를 깨뜨리기 위해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게 그들의 논리인데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은 주인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라는 조직이 관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결국 그 조직을 관리하는 권력자들이 소유하는 것, 즉 생산수단이 독점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다. 나를 고용해서 월급 주는 사람이 마음에 안들면 비판하거나 다른 직장에 갈 선택권이 있다.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면 내가 마음에 안들어도 갈 데가 없다.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노동운동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볼 만한 싸움이다. 소련이나 북한에서는 사하로프 같은 대단한 용기있는 사람 아니면 불가능하다. 북한에서는 민주화운동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보다 자유를 허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통일을 추구하되 이 기본원칙에서 벗어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남북 통일의 시기를 전망하신다면?
길게 보면 통일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곧 무너지느냐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북한 정권이 공고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과거 소련이 무너질 줄 누가 알았나. 5공 정권이 무너질 줄 누가 알았나. 유신정권도 마찬가지다. 통제가 가혹하다는 것은 그만큼 약하다는 의미이다. 약하기에 강하게 통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이 저렇게 강경 진압하는 것은 그만큼 약하기 때문이다. 그런 정권이 얼마나 오래 가겠나.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햇볕정책' 용어는 내가 붙였다. DJ는 이솝우화 논리를 즐겨 사용하셨다. 94년도 북한이 핵무기 개발할 때 미국이 선제공격 하느니 마느니가 뜨거운 감자였다. 그때 난 미국에 있었다. 그때 DJ께서 4월에 워싱톤 내셔널프레스센터에서 연설하고 카터를 평양에 보내라고 말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 DJ께서 연설하니까 와서 도와달라고해서 DJ가 묵고계시는 호텔에 가서 연설문을 영어로 정리해드리면서 이솝우화가 들어간 연설문 제목을 ‘please don't take away my sunshine' 노래 후렴을 이용해 고쳤다. 그 후부터 'sunshine policy'(햇볕정책)가 되었다. 그런데 김 대통령이 북한에 다녀오신 후에 김정일이 답방을 안했다. 김일성은 핵개발이 목적이 아니고 이것을 통해 외교관계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고 해보자고 했는데 미국이 결국 이것을 받아들여 카터가 평양 갔는데 나중에 김정일이 우리 측의 여러번에 걸친 촉구에도 불구하고 답방 약속을 안지켰다. 결국 북한으로서는 ’약속을 안지키는 사람들이네’하는 의심을 받게 됐다. 그렇다면 햇볕정책도 조정이 필요했다. 정치인들은 특성상 한번 자기 입장을 내세운 뒤 안되면 계속 그 입장을 고수한다. DJ가 마지막까지 햇볕정책을 내세웠는데 약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햇볕정책은 북한을 변화시키는 수단이다. 정권을 변화시키는 수단이 아니다. MB 정권에서는 이것을 잘못 아는지 왜곡하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자는 것이지 정권은 변할 수가 없다. 북한 사회를 변화시켜 내부에서 스스로 변화가 일어나 무너지게 하자는 게 햇볕정책의 목적이다. 북한 사회에 계속 교류를 통해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자고 했는데 그 점에서 햇볕정책은 엄청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북한 변화를 위해 교류하는 것은 좋은데 정권과 사회는 구분해야 한다. 정권이 관광객을 죽이고도 잘못한 것 없다고 하고, 동족을 향해 폭탄을 쏴대고 하는데 침묵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하지만 천안함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으니 말을 안하겠다. 물론 김대중 정권이 순진하게 김정일 정권이 변할 거라고 보지는 않았다. 내가 김정은이라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변화에 배팅할 것이다. 등소평이 변화를 주도했는데 먹을 게 나아지니까 공산주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중국이 민주화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 김정은도 그 길을 택할 수 있는데 겁이 많은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보면 김정은이 북한 사회를 완전 장악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과 로켓 발사 유예 합의를 하고 대신 6자회담 하고 식량 주기로 합의했는데 합의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이걸 쏘겠다는 것은 아무리 뻔뻔스런 북한이지만 그걸 모르겠나. 왜 그런 합의를 했겠나. 김정은의 유화노선에 반대하는 강경파를 못막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사회가 완전 한 사람이 정권을 장악해서 통치하는 게 아니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통제불능의 사회인 것이다.

-장로로서 목사 아내에 대해서는?
나이가 나보다 한참 젊고 나보다 할 일이 많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망하여야겠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잘 서포트해줘서 훌륭한 목회자가 되게 하는 것이 소원이다.

-앞으로 계획은?
기회가 된다면 북한에 가서 교회도 짓고 선교도 하고 싶다. 또 하나는 발달장애 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딸 예지는 지금 남서울은혜교회가 세운 밀알학교에 다니고 있다. 두 살 때부터 장애가 발견돼 15년 넘게 기도해오고 있다. 크게 좋아지진 않았지만 앞으로 좋아질 거란 소망과 확신을 갖고 있다. 그동안 가슴앓이도 많이 하고 눈물도 많이 쏟았다. 이런 아이들 둔 부모님의 눈물과 고통, 탄식을 알라고, 그분들의 눈물을 닦는 일을 하라고 연단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달장애학교를 세우도록 나를 이끌어가시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내 계획이란 건 없다. 내 계획이 있다면 내 남은 삶을 주님께 맡기는 것뿐이다.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건 내 소관이 아니다.

유 전 지사에게 이제 ‘지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것 자체가 낯설 정도로 그는 수더분한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공장 노동자들과 어울려 인사 나누며 서슴없이 밥먹는 모습, 빈그릇 서빙해주는 모습, 그는 어떻게 그렇게 높은 자리에서 떨어지듯 내려와 이렇게 편안하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일까.

“나를 버리면 됩니다. 교도소 생활 통해 저는 비로소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무 인생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남은 삶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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