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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탈북자 가이드 역할을 하라고?'오영필감독의 서쪽나라(6) - 결전의. 날.

급하게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사방에서 십여 명의 공안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포위했다. 아까 보았던 긴 머리의 젊은 여자는 사복 경찰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손목을 꺾고 수갑을 채웠다. 대여섯 대의 지프차가 순식간에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머리를 땅으로 숙이게 하고 차에 떠밀었다. 뭐라 설명 할 수 없는 민망함에 심장은 심하게 요동쳤다. 두려움보다 어이없음으로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2002년 3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선교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나는 사건 발생부터 감옥에서 일어났던 최근의 상황까지 모든 이야기를 상세하게 보고했다. 이것을 계기로 강 사장의 석방을 위한 구체적인 방향을 정했다. 나는 선교회 관계자분들께 제이슨을 소개했다. 제이슨은 자기 집에 강 사장의 큰딸과 선교회 사람들을 한 달 이상 머물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강 사장이 그의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강 사장은 8개월 실형 선고를 받고 2002년 8월에 추방되었고, 김 부장은 1년 실형 선고를 받고 2003년 1월에 석방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강 사장은 언론에 큰 주목을 받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한국은 물론 일본과 미국에서 탈북자들의 인권 활동과 관련하여 이전보다 더욱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함께 체포된 탈북자들은 외국인들을 수용하는 만저우리 감옥에 1년 동안 수감되었다. 그중에 경희와 그의 어머니는 미국 국적인 삼촌의 적극적인 구명활동으로 2003년 2월 극적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재영 씨의 아내와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2002년 가을, 나는 강원도 문막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 연극 단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촬영하면서 예전처럼 한국에서의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그러면서도 중국 감옥에서 보낸 시간들이 문득 문득 생각났다. 그 시간을 통해 탈북자들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그분의 깊은 임재를 느끼고 싶었다. 이듬해 3월, 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일 때문에 간다는 적당한 명분을 남긴 채 또 다른 탈북자들을 만나러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것은 탈북자들을 향한 애정뿐 아니라 생의 한가운데서 한없이 정결했던 자아를 되찾고자 하는 몸부림의 표현이기도 했다.

2003년 2월의 마지막 날, 신촌에 있는 미라보 호텔. 이제는 목사가 된 강 사장이 소개한 도쿄방송 기자를 만났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야마모토 코지, 도쿄방송 사회부 기자’라고 적혀 있었다.
“최근 일본 사회가 납북자 문제를 계기로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간 도쿄방송은 탈북자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재할 것입니다.”

이날 만남은 도쿄방송을 대신해 내가 탈북자들의 영사관 진입 과정을 취재하는 것에 관한논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오전 10시, 광화문 흥국생명 지하식당에서 만나 좀 더 자세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에 잠입 취재하려는 곳은 광저우의 영사관이었다. 단독 건물로 지은 베이징의 영사관과 달리 광저우의 영사관은 일반 회사 건물 안에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래서 출입이 용이하고 보안상 경비가 느슨했다. 영사관 진입에 관한 세부적인 대화를 나눈 뒤 그가 준비해 온 계약서를 살펴보았다. 촬영이 성공할 경우에 관한 조항만 있고 실패할 경우에 관한 조항은 전혀 없었다. 나는 이미 공안에 체포되어 3개월간 감옥 생활을 한 경험이 있기에 촬영 시 안전 문제에 대해 상당히 민감해 있었다. 따라서 도쿄방송 측에 이에 따른 합리적인 대책을 요구했다. 계약서의 문장과 토씨의 미묘한 견해차가 있을 때마다 야마모토는 본사에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오랜 토의 끝에 계약서 외에 서약서를 따로 작성했다.
“도쿄방송은 오영필 씨의 취재 건에 관해 ○○선교회에 대하여 이하의 사항을 서약합니다. 오영필 씨가 취재 전후 중국 내에서 출국 하지 못하는 예측불허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도쿄방송은 ○○선교회와 협력 하에 상황을 개선하도록 가능한 범위 내에서 노력합니다. 도쿄방송 보도국 사회부 야마모토 코지.”

현재 중국 내 탈북자는 적게는 5만, 많게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탈북자들의 출신지가 황해도, 개성, 강원도 등 북한의 남부 지역까지 확산되어 가는 추세다. 특별히 가족 단위의 탈북이 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탈북자의 연령은 유아에서 70대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어린이들은 일반 노동자 가정 출신이 많다. 탈북 청소년들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너 명씩 무리지어 배회하면서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탈북 여성들은 조선족이나 한족과 동거를 통해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특별히 외딴 농가, 도심 지역의 소규모 일터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은신처를 제공받는다. 일부는 유흥업소에서 일하기도 한다. 이에 탈북 여성을 매춘업소에 알선하는 전문조직도 성행하고 있었다. 중국이 자국 내 탈북자를 불법입국자로 간주해 북송 정책을 펴고 있는 가운데 탈북자를 은밀히 보호하고 있는 이들은 중국 내 조선족들이었다. 탈북자를 보호하거나 도와주다 적발되면 2천 위안에서 1만 위안의 벌금을 내야 한다. 탈북자들이 조선족들의 보호능력을 초과할 정도로 점점 급증하여 사회 문제화 됨으로 조선족들의 보호 의지도 점점 약화되어가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중국 내 탈북자는 북한 사람이므로 기본적으로 중국과 북한의 문제이니 한국 정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만 한·중 우호관계를 고려해서 북한을 자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용한 처리를 전제로 협력을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북한의 경우도 탈북자의 급증으로 사회 질서가 이완되면서 일반 탈북자들에 대한 처벌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최근에는 식량 사정으로 국경을 넘어올 경우에는 일주일 정도 구류한 후 석방한다고 한다. 북한 정부도 생계 목적의 탈북자 발생을 불가피한 현실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2002년 이후 북한을 다시 탈출하는 재탈북자가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야마모토와 용산 전자상가에 가서 몰래카메라에 필요한 렌즈와 마이크를 구입했다. 그는 여러 가게를 둘러보며 카메라의 성능을 유심히 살폈다. 오후에는 교보빌딩을 찾았다. 그곳은 광저우처럼 건물 내에 외국 공관이 많은 곳이다.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실제 상황처럼 카메라를 가방에 숨기고 녹화 버튼을 눌렀다. 연습인데도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흘렀다. 외국 공관이 있는 5층과 8층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건물 안을 둘러보면서 현장 감각을 익히고 그곳을 나왔다. 저녁 7시쯤 사당역 부근의 강 목사 사무실을 찾았다. 그동안 전화로 기초적인 정보만 주던 강 목사가 오늘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정보를 주었다. 야마모토는 맞은편에 앉아서 강 목사와 내가 이야기하는 전 과정을 소형카메라에 담았다.

강 목사는 내게 탈북자 가이드 역할을 맡으라고 했다.
‘뭐, 탈북자 가이드를 하라고!’
도쿄방송을 대신해 취재만 하는 것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인데 가이드 역할까지 맡기다니……. 가이드는 말 그대로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율해야 한다. 탈북자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상황을 주도면밀하게 살펴야 하는 가이드야말로 복합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탈북자들과 동행한 경험이 일천한 나에게 맡기다니. 그것도 단순 가담자한테. 순간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런 역할을 맡기려면 사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애기를 해주지 떠나기 바로 며칠 전에 이렇게 기습적으로 얘기하다니.’ 엄청난 부담을 주는 강 목사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나를 신뢰하는 것 같아 고맙기도 했다. 어쨌든 출국 수속을 다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강 목사는 현지에서 도움을 줄 연락책으로 김 부장을 생각하는 듯 했다. 그는 지난번에 우리와 함께 탈북자를 돕다가 1년형을 살고 얼마 전 출소했다. 강 목사는 김 부장이 광저우로 갈 수 있도록 도쿄방송과의 계약에서 받은 돈 중 5천 위안을 송금하라고 했다. 그리고 중국 현지에서 만나게 될 잭크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그는 탈북자들이 진입할 영사관에 관한 정보를 전해 줄 사람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강 목사를 대신해 탈북자들의 영사관 진입을 주도하는 ‘가이드 역할’과 도쿄방송을 대신해서 이 모든 과정을 취재하는 ‘기자의 역할’을 동시에 맡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옷가지와 문서들을 정리하느라 자정을 훌쩍 넘겼다. 떠나는 날 아침, 몸이 으슬으슬 춥더니 어느 새 감기가 달라붙었다. 어머니는 부산하게 준비하는 내 모습을 근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가지 말라고 강하게 말리시는 어머니께 지난번 일과 전혀 다른 일이라며 거짓말을 했다. 마음은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타기 직전 강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항상 살필 것을 다시 한 번 당부했다.

2003년 3월 8일. 홍콩을 경유하여 광저우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에서 김 부장을 만났다. 그를 포옹하는 순간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녁 7시경 잭크를 만나기 위해 가든 호텔에 도착했다.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나온다던 잭크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서성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잭크였다. 그는 예상과 달리 교포 2세가 아닌 순수 백인이었다. 만날 장소와 시간만을 정한 채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 호텔 로비로 찾아 온 잭크와 함께 택시를 탔다.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눌렀다. 덴마크 영사관이 있는 호텔 앞에 차가 멈췄다. 그는 그곳의 직원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경비원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영사관은 9층이었다.
“이곳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평일에는 경비원이 거의 없고 사람들의 출입이 많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경비원이 다가왔다.
그는 재빠르게 그곳의 구조를 설명했다. 장소를 잘못 찾았다는 변명을 한 채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호주 영사관, 이곳도 진입하기에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오후에는 가든 호텔 안에 있는 미국과 일본 영사관을 둘러보았다. 일본 영사관은 미로처럼 몇 번을 돌아가야 찾을 수 있었다. 초행자가 이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반면 미국 영사관은 건물 2층에서 몇 걸음만 걸으면 되었다. 내부에 침실과 욕실 등 편리한 부대시설이 구비되었다. 강 목사와 야마모토에게 각각 전화를 걸어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야마모토는 촬영된 영상이 일본에 방영되는 것을 고려해 최종 선택지로 일본 영사관을 요구했으나 진입의 용이함을 고려할 때 미국 영사관이 나을 듯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잭크와 커피숍에서 차를 마셨다. 그는 오늘 둘러본 각국 영사관 구조를 요약 정리해 주었다. 대화를 마칠 때 슬쩍 그에게 외교관인지 물었을 때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칭다오(靑島)에 있는 탈북자들을 광저우로 데려오기 위해 칭다오행 비행기를 탔다. 하늘에서 바라본 칭다오는 도시계획이 잘 된 깨끗한 도시였다. 기차역 부근의 KFC에서 탈북자들을 기다렸다. 약속시간보다 30분이 더 지났음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강목사로부터 1시간만 더 기다려 보고 오지 않으면 철수하라는 연락이 왔다. 기다릴수록 그들을 만나고 싶은 욕망은 더 강렬해졌다.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 글을 써보려 했지만 모든 감각이 테이블 위에 있는 핸드폰에 집중되었다. ‘무엇을 해야 전화에 대한 집중을 분산시킬까?’

초조와 긴장이 어깨를 눌렀다.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왜 그들을 기다리는 걸까? 정말 그들이 보고 싶은 걸까? 아니면 계획대로의 진행만을 바라는 걸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음악이 자꾸 신경에 거슬렸다.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런 단조로운 음악이 나오다니. 그것도 클래식 음악이. 나의 불평과 상관없이 음악은 더욱 힘차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의 이런 초조한 기다림은 탈북자들의 긴장된 기다림과 비교할 때 얼마나 초라한 것일까?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렀다. 그들로부터 연락이 올 거라는 소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숙소에 들어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심난한 마음 탓에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야마모토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나누고 숙소를 나섰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어제 갔던 KFC로 향했다. (사진=오영필 감독의 다큐 '거짓 우화')


다음 날 아침 야마모토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나누고 숙소를 나섰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어제 갔던 KFC로 향했다. 어제 앉았던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대영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며칠째 소식이 없어 안부 차원에서 전화를 한 거였다. 그는 선박 유통업체에 근무하다 자기 사업을 위해 중국에 와서 두 달째 시장조사 중이었다. 노트에 마음의 심상을 옮기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토록 기다렸던 탈북자들이었다. 칭다오가 아닌 베이징 근처의 스자좡(石家莊)에서 떠난다고 했다. 서둘러 강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가 스자좡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연락처를 알려주고 광저우에서 만나라는 지시를 내린 듯했다. 칭다오에서 만나기로 한 탈북자들을 만나지 못하고 나는 광저우로 가야 했다.

광저우에 도착하여 김 부장과 함께 며칠 전에 방문한 호주 영사관을 다시 찾았다. 1층 로비에는 경비가 없었다. 몰래카메라를 가방에 장착하고 김 부장보다 조금 뒤에서 걸었다. 복도를 따라 들어갔을 때 오른쪽에 영사관이, 왼쪽엔 상담을 하는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 중앙에 서 있는 경비원에게 비자 받는 곳이 어딘지 물었다. 사무실에 들어가 문패와 영사관 내부를 찍었다. 김 부장은 직원에게 영사관에 관한 정보를 물어 보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켰다.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메일 확인을 위해 호텔 1층 로비에 있는 PC방에 갔다. 메일을 열어보니 대영이의 안부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전 12시, 광저우 역에서 탈북자들을 만나기로 했다. 호텔을 나서기 전 김 부장과 함께 담대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광저우역광장은 농촌에서 상경한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광장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탈북자들에게 전화가 왔다. 그들은 광저우역 근처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김 부장이 내 손을 툭 치며 “누군가 미행하는 것 같다”고 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돌아보니 정말 긴 머리의 젊은 여자가 따라오는 게 아닌가! 착각이기를 바랐다.

역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어느 가게 앞에서 탈북자들을 만났다. 40대 중반 남자 두 명과 아주머니 한 명 그리고 젊은 남녀 한 명씩 모두 다섯 명이었다. 중년 남자들은 형제였고 아주머니와 젊은 남녀는 한 가족이었다. 김 부장과 그들이 악수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혹시 미행하는 사람들이 있나 싶어 카메라를 돌렸을 때 100미터 전방에서 우리의 모습을 찍고 있는 공안이 내 카메라에 들어왔다. 급하게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사방에서 십여 명의 공안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포위했다. 아까 보았던 긴 머리의 젊은 여자는 사복 경찰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손목을 꺾고 수갑을 채웠다.

대여섯 대의 지프차가 순식간에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머리를 땅으로 숙이게 하고 차에 떠밀었다. 뭐라 설명 할 수 없는 민망함에 심장은 심하게 요동쳤다. 두려움보다 어이없음으로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역 부근에 있는 공안국에 차가 멈췄다. 한 사람씩 방에 가둔 다음 가방과 지갑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하나하나 살폈다. 그들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제와 오늘은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과 눈 내리는 겨울처럼 간극이 컸다. 그 아찔함은 뾰족한 바늘처럼 콕콕 내 의식을 찔러댔다. 오후가 되어 나를 조사하기로 한 담당 공안이 들어왔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긴장된 내 마음을 풀기 위해 애를 썼다. 공안들은 내가 머물렀던 호텔에서 짐들을 압수해 면밀히 살폈다. 그가 조사 내용을 기록할 다른 공안을 대동하고 질문의 포문을 열었다.
“중국에 왜 왔는가?”
탈북자들의 영사관 진입에 관여했다는 진술이 나오자 표정이 달라졌다. 그때부터 배후 세력이 누구인지 집요하게 물었다. 도쿄방송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만약 영필 씨가 촬영을 하다가 공안에 체포될 경우 저희 도쿄방송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얘기하시면 안 됩니다.중국 내에 있는 저희 도쿄방송의 다른 기자들이 추방될 수 있거든요.”

오후 3시에 시작된 조사는 자정을 넘겼을 때 일단락되었다.
나는 또다시 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높은 빌딩 숲을 지나 주택가 사이의 골목길에 멈추었다. 도착한 곳은 감옥이었다! 공안은 밥통과 수건을 발 앞에 놓으며 감옥 문 안으로 나를 끌었다. 어떠한 범죄 행위도 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밥통을 세게 걷어찼다. 거센 항의에 놀란 공안은 나를 조사실로 옮겼다. 그는 책상 위에 흰 종이를 올려놓았다. 진실과 거짓을 살피는 노련한 노름꾼처럼 공안은 내 눈동자의 움직임을 살피며 수사에 적극 협조하면 사건을 조기에 마무리하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했다. 그의 제안에 솔깃해 중국에 와서 무엇을 했는지 시간대별로 상세하게 그 내용을 써내려갔다. 지금의 행동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크고 깊은 상처를 남길지 알지 못한 채 그들이 쳐놓은 덫을 향에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오영필  zeroph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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