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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배신하는 역사

1984년에 저는 한참 꿈에 부푼 대학 1학년생이었습니다. 여름방학 때 학교에서 <청송 캠프>라는 명사들의 강연회가 개최되었는데 경찰이 이 행사를 원천봉쇄했습니다. 그래도 학생들은 대강당에 모여들었는데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백발에 긴 수염의 함석헌 선생이 나타났습니다. 머릿속까지 익어버릴 것 같은 폭염의 실내에서 이 날 함 선생이 휴식 없이 선 채로 3시간 동안 강연하였습니다. 어디선가 매미 소리가 들리고, 강당에서는 약 2천 명의 학생들이 숨죽이고 선생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칠순의 사상가가 찜통 같은 실내에서 3시간 강연을 했다는 그 정력이 화제가 되었지요. 31년이 지났지만 그 당시의 감동을 저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피붙이 하나 없는 서울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방황하던 대학 1학년생에게 함 선생의 강연은 알아듣기 어려운 대목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날의 강연은 저에게 ‘백성(民)’에 대한 재발견이었습니다. 국민이든, 시민이든, 민중이든간에 ‘민’ 자가 중시되는 민본(民本), 즉 역사에서 인간의 문제에 대한 재발견이자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교육은 군사정권의 냉전 식 교육으로서, 지금에 와서 보면 남한식 선군정치였습니다. 그런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군관민(軍官民) 일체 단결’이라는 군대식 안보교육의 표현에 익숙했던 것이고, 이것이 ‘민관군(民官軍)으로 바뀌는 데는 그 이후로도 10년이 더 걸렸습니다. 지금이야 익숙하지만 민관군이란 단어는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우리의 인식체계를 바꾸는 가운데서도 아직까지도 우리는 사람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컨대 제가 대학에서 학부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면서 “한국전쟁 때 친가나 외가 쪽 어르신 중에 사망했거나 실종된 분이 있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면 대개 백 명 중 1~2명이 손을 듭니다. 그러면 제가 “이럴 리가 없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다시 물어보고 오라”고 하고 그 다음 시간에 다시 같은 질문을 하면 이번에는 50명 정도가 손을 듭니다. 인구의 11%가 사망한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을 겪으면서 비극을 피해간 집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젊은 학생들은 6·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정치적 논쟁의 대상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런 논쟁이 벌어지는 가운데서도 전쟁이 나와 내 가족에게 무엇이냐는 문제는 사라지고 없는 겁니다. 즉 인간의 문제를 거세한 것이지요. 한국전쟁 사망자의 85%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입니다. 그런데 매년 6월이 되면 호국 전몰장병 추모 행사는 있어도 억울하게 학살된 민간인을 기리는 행사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 그런 민간인 희생은 말하는 것 자체로 불온시 됩니다. 그리고 군은 실제 전쟁에선 무능하게 패주했으면서도 마치 나라를 저 혼자 지킨 것처럼 위신을 세웁니다. 그런 채로 우리는 역사를 말하고 국가를 말하고 있고, 이제는 수능시험의 한 과목으로 추가되었다는 의미에서 역사를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나마 역사에게 인간의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킨 최초의 시도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 만들어진 과거사정리위원회입니다. 이것이 노무현 정부 시절에 제주도 4.3진상조사위원회로 연결된 것이구요. 이를 통해 민주공화국이 국민에게 책무를 이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폭력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된 과거사도 거리낌 없이 밝힐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민주공화국으로서 우리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과거사에 대한 발굴 작업은 이명박 정부 이후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 대신 과거 유신시대에나 나올법한 국정교과서 논리로 회귀하는 것은 바로 민을 불신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자긍심이 결여된 자존감 없는 세력들의 퇴행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주입식 암기과목으로 역사를 추락시키는 몹쓸 행동이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자행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민이 힘이 없어서야 어떻게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

김종대/ 정의당 국방개혁기획단장

김종대  jdkim20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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