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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와 도시, 민족을 다시 짓겠습니다모델 캠퍼스, 모델 도시, 모델 민족 건설 16년, 서울신대 조갑진 교수

경기도 부천시 소사본동 서울신학대 성봉기념관. 캠퍼스 언덕배기에 자리한 이곳을 금요일 한밤에 올랐다. 학생들이 떠나간 캠퍼스는 고요했지만 이곳만큼은 시끌했다. 30여명의 학생과 지역교회 교인들이 드리는 뜨거운 찬양과 기도는 내려다보이는 부천 시내를 금방이라도 깨울 기세다. 서울신대와 지역교회가 함께 하는 민족과 열방을 위한 서울신대 철야기도회다.

점잖게 양복을 차려입은 조갑진(60·서울신대 신약학) 교수도 학생과 교인들 틈에서 두 팔을 번쩍 치켜든 채 기도하고 있었다. 마치 기도원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뜨거운 기도회가 번듯한 신학대 캠퍼스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점잖아야 할 것 같은 대학 교수가 왜 이러는 걸까.

“이 기도회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그것도 한밤중에 기도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하나님께 ‘왜 내가 왕따를 당해야 하느냐’고 따졌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꾸 저 보고 성봉기념관에서 기도회를 하라고 하셨어요. 결국 지금까지 오게 된 거죠.”

조 교수가 성봉기념관에서 철야기도회를 시작한 건 1996년 가을이다. 서울신대 교수로 부임한 해부터 곧바로 기도회를 가졌던 것이다. 오해와 비판 등 따가운 눈총이 있었지만 몇몇 선배 교수들의 배려로 무사히 시작할 수 있었다.

   
▲ 서울신대 조갑진 교수에게 기도는 곧 힘이고 삶이고 전부다. ⓒ유코리아뉴스

평생 꿈꾸던 목회자 대신 교수로

조 교수는 1995년 8월, 7년간의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할 당시만 해도 인생계획표는 ‘목회자’에 고정돼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받은 목회자의 소명을 한 번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목회를 통해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비전을 이루는 것이다. 영국 유학도 교회 개척을 위한 과정이었다. 귀국할 때 영국서 구입한 식기세척기와 청소기를 굳이 가져왔던 것도 교회 개척을 위해서였다.

당장 귀국해보니 막막했다. 서울신대 뒷산에다가 텐트를 치고서라도 교회를 개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같은 조 교수의 마음을 알아차린 지인들이 그냥 있지 않았다. 서울 수유동에 아파트를 한 채 임대해줬다. 조 교수는 그곳을 임시 숙소로 정했다. 그리고 금요철야기도회를 시작했다. 진로, 즉 교회 개척 장소를 하나님께 묻기 위해서다. 기도 장소는 삼각산 꼭대기였다. 그 기도는 1년간 계속 이어졌다. 그만큼 교회 개척에 대한 응답이 더뎠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결대, 호서대, 서울신대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 요청이 온 것도 그때다. 졸지에 시간강사가 됐다.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그는 서울신대 교수로 전격 채용됐다. 기도도 기대도 한번 한 적 없던 교수가 된 것이다. 배경은 이랬다. 기존 교수는 은퇴하고, 0순위, 1순위였던 교수들은 각각 다른 대학으로 스카웃 되어 갔다. 남은 건 조 교수. 자연스럽게 0순위를 차지한 것이다. 얼떨떨했다. 고민에 빠졌다.

“다른 사람들은 대학 교수 되면 좋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고민했어요. 도대체 ‘민족복음화와 대학 교수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었죠. 이런 고민과 질문을 2년 동안은 했던 것 같아요. 자다가도 한밤중에 깨어서 ‘이게 내가 할 짓인가?’라고 의심하기도 했으니까요.”

물론 교수가 되어서도 삼각산 기도회는 계속 이어갔다. 그 즈음엔 기도회에 동행하는 사람들도 몇 생겼다. 그 중 한 명이 “삼각산은 너무 춥다”며 좀 더 따뜻한 곳으로 장소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기도회 장소는 조 교수의 연구실로 바뀌었다. 비좁은 연구실은 머지 않아 사람들로 가득 찼다. 기도회 멤버 중 한 명인 한의원 원장의 권유로 병원에서 기도회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응답은 달랐다. 민족과 열방을 위한 금요철야기도회가 지금까지 서울신대 성봉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유다.

금요철야기도회를 교회가 아닌 대학 캠퍼스에서 갖는 이유

16년 넘게 기도회가 진행되는 동안 간증도 많다. 조 교수가 부임한 지 얼마 안되어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학생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우리 대학에도 교수님 같은 분이 계시네요. 밤마다 캠퍼스에서 기도를 하고 싶었지만 주위의 눈총이 따가워서 근처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있었거든요.”

1997년 어느날 새벽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엄청난 위기감이 몰려왔다. 새벽 5시, 끝까지 남은 10여명의 학생들을 앉혀놓고 조 교수는 ‘24시간 중보기도’를 제안했다. 24시간 중보기도를 하려면 강당에서는 불가능했다. 숙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조 교수가 사비를 보태 학교 앞에 집을 마련했다. 24시간 기도회는 며칠간 계속됐다. 그리고 얼마 후 그 해 12월, 우리나라에서는 ‘국치(國恥)일’로 기록된 IMF 환란이 터졌다. 조 교수와 학생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나라에 대한 위기심과 중보기도의 열망을 주신 이유를. 이들은 IMF 환란을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기도했기에 하나님께서 IMF 한 단계 낮춰주신 것이다’라고.

그뿐만 아니다. 금요 철야 중보기도는 민족과 열방, 지역을 향한 다양한 기도와 헌신을 낳았다. 97년엔 민족과 열방을 위해 중보하는 홀리네이션스라는 선교단체가 창립됐다. 정치인, 기업가, 목회자, 학생 등 초교파적인 협력을 통해 남북 통일과 세계선교의 중보와 헌신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하고 있다. 서울신대 정문 앞에 홀리네이션스 본부를 두고 있다. 금요일 밤마다 성봉기념관에서 뜨겁게 기도하는 이들도 바로 홀리네이션스 회원들이다. 이들은 수년 전 중국 조중접경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90년대 후반, 부천과 시흥 성시화를 위한 홀리클럽이 시작된 것도 금요 중보기도 모임을 통해서다. 어느 여름 금요일 밤, 뜨겁게 중보기도를 하던 조 교수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하나님께서 서울신대를 부천과 시흥 부근에 세우셨을까?’ 그 질문은 “이 도시를 주시옵소서”라는 뜨거운 기도로 바뀌었고, 나중엔 지검장, 시장, 지역 신문사 사장 등이 참여하는 기도모임으로 발전했다. 지금은 매주 목요일 부천과 경인지역 성시화를 위한 기도모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 '네트워킹의 달인' 언젠가부터 조 교수에게 따라붙는 별명이다. 별명답게 인터뷰 중간중간에도 쉴새 없이 전화가 왔다. ⓒ유코리아뉴스

2006년엔 부천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전도집회도 개최했다. 성시화를 향한 뜨거운 기도의 결실이었다. 부천의 교회들이 연합했고, 수많은 부천 시민들이 참석했다. 더 놀라운 것은 당시 미국에서 전도 활동을 하던 마이크 매킨토시 목사가 200여명의 미국 성도들을 대동하고 집회 주강사로 참석한 것이다. 매킨토시 목사는 한국을 위해 기도하던 중 ‘한국에서 전도대회를 해야겠다’고 결정하게 됐고, 한국에 대해 조사하던 중 포항과 부천에 성시화운동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실사를 통해 부천이 최종 전도대회 장소로 낙찰됐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한국교회사에서 미국 사람들이 전도를 위해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온 것은 처음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안타까운 현실도 있다. 국내 교회나 신학생들이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이 없다는 점이다. “복음 전도나 도시를 바꾸는 게 개교회 수준으로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연합을 해야 하는데 이걸 아무리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에게 강조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그때부터 누가 말려도 연합 기도와 전도 집회를 매년 해오고 있습니다.”

16년간의 금요철야기도회, 결실로 이어지다 

부천 성시화를 위한 뜨거운 열망은 성탄절 거리행진으로도 이어졌다. 이것도 부천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해 성탄절, 4000여명의 부천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거리행진을 하고 부천 시민들에게 성탄절 선물을 나눠줬다. 물론 올 성탄절에도 거리행진은 계속된다. 이 모임을 기획하고 진행한 사람은 홀리네이션스 소속 배철(45·부천 길과빛교회) 목사다. 서울신대 성악과 박사과정 중인 배 목사는 한때 성대를 완전히 잃어 재기가 불가능했지만 조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그리고 기도모임을 통해 성대를 완전히 되찾게 됐다. 배 목사는 “조 교수님께서 지나가는 말로 ‘한번 들러라’고 했는데 학교 졸업 후에도 그 말이 계속 잊혀지지 않았다”며 “조 교수를 다시 만나면서 성대가 회복되고, 조 교수님의 비전도 공유하게 됐다”고 말했다.

부천 성시화, 민족 복음화, 세계 선교! 모두 거창한 구호같고 막연한 비전 같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 이 일들을 이루신다. 어떤 시대든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000명을 반드시 남겨두신다는 게 조 교수의 믿음이다. 중요한 건 이 사람들을 네트워킹하는 것. 조 교수는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부천은 지역 특성상 개교회주의가 강한 편입니다. 네트워킹하는 것, 이것이 부천의 교회들이 살 길입니다. 여러 교회들이 함께 그물을 내리고 물고기를 잡고, 그 물고기를 나눠가지는 게 부천의 교회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은 목회자가 아니기 때문에 목회자들로부터 괜한 오해를 받을 일도 없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았다.

민족 통일을 위한 기도와 헌신이 더 깊어진 것도 이 금요 중보기도모임을 통해서다. “저는 10대 때부터 세계 열방을 품어왔지만 북한 동포들에 대한 마음은 그보다 조금 더 간절합니다. 민족복음화를 놓고 봤을 때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고, 그 길이 복음에 있다는 것을 북한 당국자에게 꼭 전해주고 싶습니다. 지금도 북한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매일 아침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동포나 북한의 동포나 다 내 민족입니다. 나에게 커다란 뭔가가 생긴다면 북한의 동포나 남한의 동포에게 똑같이 골고루 나눠주고 싶습니다. 저는 이념에 관심없습니다.”

2008년 여름, 조 교수는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보수단체 집회에 참석했다.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에 선뜻 수락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당시 전국을 들끓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시위의 맞불집회였다. 기도회 진행을 맡은 다른 이들은 이같은 성격을 알고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 교수가 그 집회의 성격을 안 것도 당일 현장에서였다. 하지만 다른 기도 인도자들이 모조리 불참한 상황에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 조 교수의 제자이자 동역자인 배철 목사(오른쪽).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갈렙의 고백을 담은 성경 구절과 부천시 전경이 예사롭지 않다. ⓒ유코리아뉴스

"우파든 좌파든 남한이든 북한이든 모두가 하나님 축복의 대상"

어쨌든 이 때문에 그는 한동안 ‘우파 교수’란 비판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다. “나는 우파나 좌파와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혹 반대파가 표현을 잘못하더라도 사랑으로 품어야지 편을 가르면 안됩니다."

조 교수는 전남 함평 바닷가의 작은 마을이 고향이다. 함평 광인중학교를 거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세운 서울 중경고등학교를 다녔다.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녔던 것도 그때다. 매일 기도모임을 갖고 전교생 대상 전도대회를 열기도 했다.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갖게 된 것도 당시 활동했던 HCCC(CCC 십대선교부) 때문이다. 고 김준곤 목사의 비전에 흠뻑 취했던 것이다.

“HCCC 활동을 하면서 김준곤 목사님이 민족을 향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설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남북한 전체를 아우르시는 김 목사님의 마음이 10대인 저에게 그대로 전달이 됐던 것 같아요.”

조 교수에게 남북 통일은 당위의 문제가 아닌 시간의 문제다. 반드시 통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 시간의 주축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 즉 한국교회가 쥐고 있다는 게 조 교수의 설명이다. 한국교회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준비가 되는 때가 바로 통일 준비가 완료되는 때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남북 통일이 늦춰지는 것도 북한 때문이 아니라 남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 교수에게 이제 ‘교수냐 목회자냐’ 하는 고민은 사라졌다. 학생들에게 성시화와 민족복음화, 세계선교를 향한 불붙는 마음을 전해주는 걸 자신의 역할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가 늘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다. 바로 모델 신학대, 모델 도시, 모델 민족을 만들자는 것이다. 특히 ‘모델 신학교’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 “다른 대학은 몰라도 우리 대학만큼은 복음을 선명하게 자랑하고, 전세계에 수출하는 대학이 되어야 합니다. 교단 신학교를 뛰어넘어 세계의 신학교로 우뚝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서울신학대를 통해 경인지역이 성시화되고, 민족이 복음화되고, 세계선교의 자원들도 배출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서울신학대는 지금 건축 공사가 한창이다. 내년에 완공 예정인 100주년 기념관 건립 공사다. 그 건축 장면을 보며 조 교수를 떠올렸다. 점잖은 교수이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온갖 오해와 핀잔을 받으며, 지난 16년 동안 캠퍼스와 부천, 민족과 세계 열방을 위한 뜨거운 중보기도자의 삶을 살아왔다. 서울신학대, 부천, 민족과 세계 열방을 복음으로 재건축하는 영적 건축자로 말이다. 그가 꿈꾸고 기도하는 건축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완공될지, 가슴이 뛴다.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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