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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의 구조변화와 미래: 일본의 시각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제34호
  • 나카니시 히로시(中西寛)
  • 승인 2015.09.1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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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한일관계는 매우 냉각되어 있다. 혹자는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최악이라고까지 판단한다. 양국 정상인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가 취임 후 2년 반이 넘는 기간 동안 정상회담을 하지 못한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역사 문제와 이에 대한 사과에 관한 양국간 서로 다른 관점이 양국관계가 현재의 유감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으로 가장 먼저 지목된다. 여론과 국민감정을 고려하면 이는 물론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단순한 이해나 화해만으로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힘들다. 비록 고대 기록들이 모호하여 논쟁이 되긴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로 1,600여년간 교류해왔다. 양국은 이 오랜 역사를 수 차례의 대규모 전쟁과 비교적 잠잠했던 기간, 그리고 우호적으로 지낸 순간들로 채워왔다. 비록 근대로 넘어오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긴 했지만 여전히 우린 과거에서 의미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는 특히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에 있던 중국이 다시 부상하기에 더 의미가 있다.

탈냉전시대의 정치적 전환
냉전이 종식된 이후 나타난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패권적 지위의 변화는 한일관계 긴장의 배경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에 미국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를 해체시키고 한반도를 해방시켰지만, 동아시아 정치구조에 이중적 혹은 잠재적으로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인을 심어놓게 되었다.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와, 일본 제국주의를 일부 연장하는 패권적 힘의 인정이 그것이었다. 냉전기간 동안 한국과 일본은 모두 자본주의 발전국가 모델을 채택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맺어 이 두 요소를 받아들였다.

이런 이중적 가치가 공존하는 체제는 1971년 미중수교에도 굳건했지만 1989년 탈냉전의 물결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한국과 일본이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더 공고히 하며 냉전 당시의 체제를 지켜나갔지만 한일 양국간의 전략적 이해관계는 급속도로 달라졌다.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 즉 기술의 확장과 시장주의의 확산이 한일 양국의 정치 지형을 변화시켰다. 일본에서는 장기집권하던 자민당이 1992년 분열되어 일시적이나마 단독 집권에 실패한 것이 정치적, 경제적 개혁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에서는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군부 독재 정권이 물러나고 1993년에 민간인 출신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다.

이런 변화들을 바탕으로 1990년대에 한일 양국은 서로간 공유하는 정치적 가치와 역사 화해에 바탕을 둔 새로운 협력관계를 모색하였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인이 이어지고, 일본은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시대 일본군의 악행에 대하여 1993년 고노 담화(1993년), 호소가와 언급(1993년), 무라야마(1995년) 담화 등의 형태로 사과를 표명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경우 일본의 좌익-진보 정치인들과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이 위안부 피해 여성에게 보상을 하기 위하여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Asian Women’s Fund)’를 시작하기도 하였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여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한-일 21세기파트너십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한일간 우호적인 기류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두 정상은 이 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관계를 돌이켜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총리대신의 역사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평가하는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뜻을 표명하였다.” 이 선언을 계기로 한국과 일본은 2002년 월드컵을 공동개최하고 한국이 일본 문화에 대하여 시장을 개방하고 일본에서 ‘한류’붐이 이는 등 한일관계는 새로운 장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대한 강한 저항이 양국 국내에서 일기 시작하였다. 일본 우익들은 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한 교과서 문제에 집중하여 소위 ‘자학사관’이 담긴 교과서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 문제는 곧 전통적으로 아시아와의 사람 대 사람간의 교류를 주창했던 좌익-진보진영의 활동에 큰 손상을 주게 되었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은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관련 활동가들에게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어두면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런 비판은 적지않은 일본의 좌익-진보세력에게 환멸을 느끼게 했다. 비슷한 시기에 1970년대와 1980년대 북한으로 납치된 일본인의 사건에 대중의 관심이 쏠린 것도 일본의 좌익-진보세력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일본인의 납북사건들은 이후 2002년에 고이즈미 일본총리와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진위를 확인하게 되었는데, 북한의 만행에 일본 대중들이 주목하게 되면서 전통적으로 일본이 북한에게도 사과할 것을 주장했던 일본의 좌익-진보세력들 또한 정치적인 신뢰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반발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민주주의 정치의 일반적인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한다. 저성장과 벌어지는 소득 격차, SNS와 같은 뉴미디어의 급속한 보급과 쇠퇴하는 상업적 매체의 영향력, 그리고 기존의 정당들이 해소하지 못한 복지와 교육 문제에 대한 불만이 대중영합주의적 발상을 가진 소수 급진 세력들에게 많은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진보정치 하에 남북 대화뿐 아니라 전후 보수와 군사 정부를 재평가하고 친일파를 청산하려는 새로운 노력을 하는 등의 결실을 맺었다.

양국에서 한때 힘을 펴지 못했던 좌익-진보세력은 탈냉전 후 찾아온 민주화 덕분에 잠시나마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민주화의 결과로 그들은 다시 약화되었고, 오히려 민주화의 결과로 일본의 반 한국인 정서와 한국의 반일감정이 포퓰리즘 정치와 연계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가져왔다.

엇갈리는 전략적 이해
한일 양국의 국내정치의 변화와 더불어 고려해야 할 다른 요소는 미국의 쇠퇴와 함께 중국의 부상으로 변화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이다. 그동안 미군은 일본과 한국 양국에 주둔하면서 이 양국과의 동맹관계를 지탱하여 왔다. 하지만, 냉전 이후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은 냉전시기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약화되었다. 1990년대 말 다케시마(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영토분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부분적 이유도 한국과 일본이 1996년 비준한 유엔해양법협약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전략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미국의 영향력이 아닌 새롭게 국제법에 의하여 동아시아의 정치구조가 좌우되는 실례로서, 약화되는 미국의 영향력을 방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중국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국가로 부상하였고, 이는 일본과 한국의 전략적 변수를 바꿔놓으며 동아시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경제적으로는 한일 양국 모두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두 국가가 상반된 길을 갔다. 1998년 11월 장쩌민 중국 주석의 일본 방문 이후, 중국은 일본의 역사적 인식에 대해 더 분명하게 비판하게 되었다. 또한, 1980년부터 중국은 공군력과 해군력을 위주로 군사력을 빠르게 강화하였고, 그 속도는 특히 1996년 3월 대만 해협 미사일 위기 이후로 더욱 빨라졌다.

중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이와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과 장기간 관계를 맺어온 중국은 1992년 8월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이는 북한을 매우 당황하게 하였다.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의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해 발생한 일련의 위기들 이후, 중국은 북한을 제재하기 위해 한국 및 미국과 협력한 바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중 세력균형이 동아시아의 전략적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틀 안에서 일본의 전략적 이해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중국이 해양 및 항공 활동을 늘려 긴장이 고조되는 남서쪽의 오키나와 방향에 집중됐다. 이밖에도 오키나와 제도가 중요한 이유는 센카쿠(조어도)분쟁, 일본과 중국 사이의 배타적 경제 수역과 천연가스 산지 분쟁, 남중국해를 포함하는 해상 교통로를 둘러싼 갈등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지역에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기 위한 각 국의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최근 2010년과 2012년의 일본 국방 지침은 해군, 공군과 자위대의 일반적인 유동성을 위해 더 많은 자원 사용을 의도하는 “동적 방위” 혹은 “통합기동방위” 개념을 강조하였다. 또한 일본은 필리핀과 베트남, 호주, 인도 등의 국가들과의 정치적, 안보적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

아직까지 한국 안보의 가장 큰 위협은 북한이지만, 지난 20년간 그 위협의 양상은 변화되었다. 북한은 핵 역량을 갖고 있고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여 군사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더 넓게 보면 북한 붕괴 시, 한국이 통일 및 재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위협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위협에 대비하여 한국은 미국의 지지와 중국의 지원 모두 필요하고, 한국 정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갈등을 유발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그 어느 편도 들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 안정은 일본 안보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한국 역시 동아시아의 해상 안보와 법률 규범에 의지하고 있지만, 양국의 전략적 이해는 더 이상 냉전 시대 때와는 같지 않다. 한일 양국이 전략적 사안에 관하여 협력해야 할 부분에서는 이렇게 변화된 양국의 전략적 이해를 고려해야 한다.

   
▲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 4월 29일 미국 의회에서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고 있다.

지금이 다시 시작해야 할 시기
위에 언급한 내용들은 한일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개선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모든 국제 협력은 관련된 국가들의 전략적 이해와 국내 정치 과정을 현실적으로 평가한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 일본과 한국의 공통된 전략적 이해는 한미일간의 3각 안보협력과 한중일간의 3각 경제협력이다. 이와 동시에 일본과 한국은 지정학적 우선순위에서 오는 차이를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국내정치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양국의 지도자들은 대중에게 서로간 협력의 중요성과 이를 통해 얻는 이익을 설명하여 그들을 설득시켜야 한다. 뉴미디어와 SNS의 시대에서도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2015년 8월 14일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담화는 일본인과 한국인 그 누구도 완전하게 만족시키지는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담화는 꽤 잘 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베 총리를 한국에, 아마도 시진핑 주석과의 3국 정상회담에 초청함으로써 이에 대한 응답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기고문의 견해는 필자의 개인 의견이지 동아시아재단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필자 소개
나카니시 히로시(中西寛)는 2002년부터 교토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고 현재 행정학과 소속이다. 저자는 국제관계를 가르치고, 20세기 세계역사와 일본외교 안보 정책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저자는 교토대학에서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학위로 교토대학에서 정치외교, 시카고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였다. 현재 일본 국제정치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저자의 주요 저서 및 논문에는 Kokusaiseijitoha-nanika, (2003, in Japanese), “Reorienting Japan? Security Transformation under the Second Abe Cabinet”(2015) 등이 있으며 다양한 저널에 주기적으로 기고한다. 그는 또한 안보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 자문단으로도 여러 차례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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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니시 히로시(中西寛)  mail@kea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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