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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재판장에서 일어난 일

베를린 자유대학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 흥미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보드리야드(Jean Baudrillard)는 학자가 1992의 한 연구에서 제시한 ‘적(敵)의 계보학’입니다. 이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최초 단계의 적은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늑대는 외부의 적으로서 사람들은 이러한 적을 막기 위해 요새를 짓고 성벽을 쌓는다. 다음 단계에서 적은 쥐의 형태를 취한다. 이 적은 지하에서 활동하며 위생학적 수단으로 퇴치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인 해충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바이러스 형태의 적이 출현한다. 바이러스는 시스템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는 까닭에 바이러스에 대한 방어는 훨씬 더 까다로운 과제가 된다.”(19~20P)

한 교수는 이렇게 친구와 적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긋는 지난 시대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의 시대였다고 합니다. “지난 세기의 면역학적 패러다임 자체가 철저하게 냉전의 어휘와 군사적인 장치의 영향 아래 놓인” 소위 ‘규율사회’였다는 것이지요. 지금 한국사회에서 이질성과 타자성의 상징은 바로 북한입니다. 북한은 늑대도 되고 쥐도 되고 해충도 되고 바이러스도 됩니다. 특히 국가 시스템 내부에 이미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여진 바이러스 형태로도 내장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법원에서 진행되는 각종 공안사건은 바로 적의 계보학을 따지는 행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엊그제 한 공안사건의 증인으로 소환되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장에서 쏟아지는 질문이 “전시작전권과 같은 국가 주권을 말했다는 게 반미냐, 아니냐”, “평화체제를 말했다는 게 미군 철수하라는 것이냐, 아니냐”, “한국군의 작전계획이 북침 전쟁연습이냐, 아니냐”와 같은 질문이 쏟아지는 겁니다. 그 복잡한 문제를 한마디로 말하라는 이 질문들. 이에 대한 저의 답변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또는 “그렇게 비쳐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마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켰다면 짬뽕은 싫다는 거냐”와 같은 우매한 질문들입니다. 또한 “엄마가 좋다”는 아이에게 “그렇다면 아빠는 싫다는 거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왜 하나만 대답하라고 다그치고 낙인을 찍습니까? 면역학의 패러다임에서만 나오는 질문은 그 자체가 폭력입니다. 그래도 질문이 집요하게 쏟아져 제가 재판부에 “모든 사회적 현상은 양면성이 있는데 하나만 대답하라는 식으로 묻는 검찰의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며 검찰의 공소장을 지칭하여 “무지몽매해도 분수가 있지, 이것은 민주공화국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응수를 했지요. 제가 보니까 찌라시 수준도 안 되는 겁니다. ‘무지몽매’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검찰의 표정이 굳어짐은 물론이고 변호사까지 긴장하더군요.

우리는 이 국가가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책무를 다한다는 조건에서만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민은 충성할 하등의 이유도, 의무도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시민을 적과 동지로 양분하면서 그 논리적 근거가 취약하니까 나중에는 “이것, 저것 하나만 선택하라”는 폭력적 질문에 익숙한 그들에게 쉽게 굴복해서도 안 될 것이지만, 이런 국가에 무조건 동의하고 복종하는 것은 민주공화국에서 시민 스스로의 자긍심과 양심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북한은 늑대이기도 하지만 양도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북한은 해충이지만 달리 활용하면 우리에게 이익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에 대해 면역학적 사고로만 접근하는 그런 사고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는 시민공론의 비옥한 토양이 왜 사막화되어야 합니까? 왜 자유로운 의지가 억압되고 주문처럼 "북한은 늑대야"라고 암송해야만 하는 걸까요? 그게 누구에게 이익일까요?

김종대 / 디펜스 21 플러스 편집장 

김종대  jdkim20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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