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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사망-6.25동란-한일국교정상화

이 주간에 여러 역사적인 사건들이 겹쳐서 편치 않은 한 주간을 보냈다. 가까이는 메르스 괴질의 창궐에다가 하필이면 6.25 발발일을 ‘대통령 거부권 행사’의 디데이로 잡았는지, 남북의 상처를 차분히 되돌아봐야 할 그 날에 정치권이 국민의 불안을 조성한 것은 아무리 변명해도 신중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정작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6월 22일이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50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25일은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6.25동란’이 벌어진 지 65주년이 되는 날이었으며, 26일은 백범 김구 선생이 피격된 지 66주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날자 순서와는 달리 연대순으로 보면, 백범 선생이 돌아가신 것이 1949년이고, ‘6.25동란’이 일어난 것이 1950년이며,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것이 1965년이었다. 필자로서는 10대 초기에서 30대가 되기 전에 일어난 민족사적인 중요한 사건들이어서 어슴프레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편치 않은 한 주간을 보냈다.

해방 직후 경상도 저 시골 골짝에까지 들려진 ‘애국자’들의 이름은 그렇게 많진 않았으나,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당시 생존했던 인물로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이 거명되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서거는 어른들과는 달리 필자에게는 큰 사건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어른들의 대화에서 일제 강점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 선생이 비명에 돌아갔다는 말씀을 들었을 정도였다. 며칠 후에는 서울에서 국장(國葬)급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는 정도의 대화를 엿들었을 정도였다. 정작 백범 선생의 죽음이 우리 민족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었는가를 알게 된 것은 ‘백범일지(白凡逸志)’를 읽고 우리 근현대사를 공부하게 되면서부터다.

   
▲ 1949년 6월 29일 한국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백범 김구 선생 장례식이 약 3.2km의 장례행렬이 이어진 가운데 7월 5일 거행되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백범의 출생연대가 ‘조일(朝日)수호통상조약’이 일본의 강제에 의해 체결되던 해(1876)여서 백범은 숙명적으로 일본과의 관련 하에서 출생했다고 말하기도 있다. 그는 젊은 시절 동학에 관여했고 불교의 승려로 입적한 적도 있으며 철저한 성리학에 헌신, 치하포에서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는다고 일본인을 죽이기도 했다. 그 뒤 그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국내에서 신민회 등에 관여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27년간 봉사하며 주석(主席)에까지 올랐다가 해방을 맞았다. 귀국 후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 한때 이승만과 뜻을 같이 했으나, ‘남한단독정부’가 현실화되자 백범은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를 주장하게 되었고, 1948년 남북한에서 각각 단독정부가 성립된 후 결국 피살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한동안 남북협상과 통일정부 및 통일운동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6.25동란’은 북측 공산군이 시작한 동족상잔적 전쟁이다. 북한은 해방 이후 ‘적화통일’을 목표로 기회를 엿보다가 1949년 중국에서 ‘국공(國共)전쟁’이 종식되고 그 전쟁에 참여, 전투경험을 쌓은 조선족 부대 2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 북한으로 보내지자 자신감을 갖고 남침을 강행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유엔결의에 따른 16개국과, 중공이 참여함으로 세계적인 전쟁으로 확전되었고, 동족간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평화정착이나 통일문제가 계속 꼬이게 되는 것은 ‘6.25전쟁’이 남긴 엄청난 증오와 불신 때문이다. 국토분단을 사상이념적 대결과 인간적 증오로 증폭, 변화시킨 이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용서와 화해와 평화로 변화시키느냐 하는 것은, 후손들에게는 결코 물려주고 싶지 않은 우리 시대의 절체절명의 과제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6.25발발론’과 관련하여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6.25전쟁은 분명히 북한 공산군에 의한 ‘남침(南侵)’이다. ‘남침’이란 말은 북쪽이 남쪽을 침략했다는 뜻이다. ‘남침’이란 단어에서 ‘남’은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에 해당한다. 잘못 해석하여 ‘남’을 주어로 보면, 남쪽이 침략했다는 것으로 되어 역사를 크게 잘못 보게 된다. 지도자라고 하는 분도 우리 국사교육이 잘못되었다는 예를 들면서 이 말을 혼동하는 경우를 보았다. 따라서 6.25전쟁은 ‘북침’이 결코 아니다. ‘북침’은 ‘북으로 침략했다’는 뜻이지, ‘북’을 주어로 보고 ‘북’이 ‘남’을 침략했다고 사용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남침’은 북이 남을 침략했다는 뜻이고, ‘북침’은 남이 북을 침략했다는 뜻으로 된다. 이렇게 용어의 사용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본인의 역사인식은 물론이고 교육에서도 잘못된 역사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거듭 말하지만, ‘6.25전쟁’은 ‘북침’(북으로 쳐들어간)이 아니라 ‘남침’(북이 남을 침략한)이다.

한국전쟁의 발발에서 ‘한일국교정상화’까지는 15년간의 간극이 있지만, 두 사건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연동되어 있다. ‘6.25전쟁’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아무런 책임이 없는 한국이 국토분단 대상으로 되었고, 대전의 결과 미소에 의한 냉전(冷戰)이 열전(熱戰)으로 변화되는 현장이 되고 말았다. 이때 일본이 미군의 한국전쟁 보급을 맡은 후방기지가 됨으로써 2차대전 이후 폐쇄시킨 군수공장을 가동,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 뒤 1950년대 말부터 프랑스가 물러난 베트남 수렁에 미군이 발을 깊숙히 들여놓게 되면서 미국은 경제적인 곤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6.25전쟁’ 이후 한국은 오랜 동안 미국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개입 이후 미국은 종전과 같이 한국을 원조할 여력이 없었다.

1961년 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은 경제건설을 비롯한 야심찬 ‘국가재건’을 약속했지만 돈이 없었다. 미국은 군사정권이 일본과 손잡고 일본의 ‘원조’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했다. 돈이 필요했던 한국과, 한국을 더 이상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었던 미국, 그리고 신흥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한반도와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일본, 이 셋의 동상이몽의 조합이 8억 달러의 유무상차관을 미끼로 ‘한일국교정상화’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그런 판국에 나라의 체면은 더 이상 돌볼 겨를이 없었다. 징병 징용, 원폭피해자, 사할린동포, ‘종군위안부’ 등의 문제와 독도 문제, 심지어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한마디 받아내지 못한 채 한일국교가 ‘정상화’되었다. 이때,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 등 많은 쓰라림을 겪었던 한국 교회가 이 부끄러운 국교정상화에 한 마음으로 반대했던 것은 그나마 역사참여의 한 증거로 남아 있다. 이런 사실을 상기하면서 보낸 한 주간이 역사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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