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갈등의 정치학

“이념이 혈연을 이기지 못했고, 혈연이 돈을 이기지 못했다.” 어느 학회에서 원로 교수 한 분이 해방공간에 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념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로 알고 있었는데 뜻밖이었다. 더 이상 설명이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긍되는 바가 있었다. 한 집안에 좌우 인사가 모두 있는 경우, 그 집안은 좌우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에서 살아남았다는 사례를 들은 적이 있다.

세상에는 여러 갈등이 있다. 사회계급·인종·종족·민족·지역·종교 등은 주요한 갈등 요인이다.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은 불가피하다.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면 더 높은 차원의 욕구가 생긴다. 생존이 해결되면 부 또는 명예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 또한 인간 공동체에는 권력의 문제가 있고, 권력은 억압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인간에게 욕구가 있고 인간 세상에 권력현상이 있는 한, 갈등이란 없을 수 없다.

이념갈등이 이익갈등보다 타협하기 힘들어
사회적 갈등은 사람들을 분할한다. 분할된 사람들은 각각의 진영을 이루어 대립하고 내부적으로 결속을 이룬다. 갈등의 내용에 따라 사회를 통합하기도 하고, 분열시키기도 한다. 진정한 통합을 위해서는 갈등을 잘 관리해야 한다. 정치란 이런 갈등을 다루는 기술이다.

여러 갈등에서 정치학적으로 대표적인 유형이 이념갈등과 이익갈등이다. 두 갈등 가운데 어느 갈등이 더 다루기 쉬울까. 대표적인 갈등 연구자인 루이스 코저는 이념갈등이 훨씬 과격하고 냉혹한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갈등의 참가자들이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집단의 이상을 위해 싸운다는 생각에 비타협적이 되기 때문이다. <당의통략>을 썼던 이건창이 조선의 당쟁이 극심했던 원인을 명분과 대의를 중요시 여겼던 풍토에서 찾았는데,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념은 당초 양보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에 비해 이익은 조정을 통해 타협할 수 있다. 처음부터 이익갈등인 것이 이념갈등으로 분식(粉飾)된 경우가 있다. 이때는 타협될 일도 이념갈등이 덧씌워져 타협불가의 속성이 작동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도 있다. 형제 또는 친구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을 때 그게 돈 문제인지 우애 문제인지 헷갈리게 된다. 형제간에, 친구간에 어찌 그럴 수 있냐고 하는데, 기실은 돈 문제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과의 이익관계라면 간명할 수 있는 것을 형제니, 친구니 하는 관계와 얽혀 복잡해진다. 단체 내부의 분쟁에서도 유사한 상황을 볼 수 있다. 다 좋은 목적을 위해 하는 건데 어찌 돈을 따지느냐 말한다. 그러나 돈 문제로 불화하고 다툰다.

세상에 다양한 갈등요인이 있지만 모두 한꺼번에 문제되지는 않는다. 하나의 갈등이 강력하게 부각되면 다른 갈등은 뒤로 밀리게 된다. 그래서 정치지도자는 어느 갈등을 부각시킬지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얼마 전 총리후보의 자질이 문제되고 있는데, 야당 지도자가 갑자기 출신 지역을 문제 삼자 순식간에 지역 문제가 자질 문제를 덮어버렸다. 지역갈등에 대한 이해와 갈등의 전략적 감각이 부족했던 것이다.

정치지도자는 의제 설정(갈등 선택)에 현명해야
조선시대 정조(正祖)는 갈등 전략을 잘 구사했다. 천주교 문제가 부상하자 문체 문제를 꺼내들었다. 천주교는 남인들이 다수 연루되어 있었고, 문체 문제는 주로 노론 인사와 관련되었다. 일방적 탄압국면을 양 진영의 균형 있는 대립국면으로 만들고자 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정당 연구자인 샤츠슈나이더는 갈등의 선택과 치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치에서 가장 파국적인 힘은 하나의 갈등을 전혀 다른 갈등으로 대체하면서 기존의 모든 갈등 구도를 뒤바꿔 놓는 권력이다.” (E.E.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현재호·박수형 역, 후마니타스, 2008, 131쪽)

   
 

사회안전망, 민생, 전임 대통령의 실정, 연금개혁, 남북관계, 한·미·일 외교 등등 숱한 의제를 어떻게 배열하고 이슈화할 것인가. 이런 의제 설정에 경쟁자가 순순히 동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갈등의 균열선을 결정하고 권력지형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정당과 정치지도자가 의제(Agenda)를 제시하여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 의제에 집중하게 하는 행위는 실로 중요하다.

김태희/ 다산연구소장, 정치학 박사

*이 글은 다산연구소 홈페이지(www.edasan.org)에도 게재됐습니다.

김태희  e_dasan@naver.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