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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트 크라이스트? 신앙이 된 한미동맹 그리고 주한미대사

한국에서 주한 미대사는 어떤 존재인가?
마크 윌리엄 리퍼트(Mark William Lippert) 제23대 주한 미국대사는 지금 한국의 보수세력에게 거의 신앙과도 같은 지지를 받고 있다. 보수단체들은 부채춤, 발레, 개고기에 심지어 ‘석고대죄’ 퍼포먼스까지 동원하는 등 온갖 해프닝을 일으키며 그의 쾌유를 빌고 있다. 그를 ‘리퍼트 크라이스트’라고 부르는 인터넷의 우스갯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다. 아마도 역대 주한 미대사 중에서 리퍼트만큼 유명해진 인물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리퍼트에 대한 지지는 곧 체질적인 대미의존에서 비롯되고 있다. 대통령에서 보수단체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안부를 묻는 모든 이들은 하나같이 ‘한미동맹’을 부르짖는다. 리퍼트 대사 역시 공격을 받은 이후, 정부 인사와의 만남과 SNS 등을 통해 “한미동맹 강력하다는 데 동감”, “같이 갑시다”라고 언급하며 한미동맹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리퍼트는 명실상부 한미동맹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열광적인 지지를 받을 만큼 한미동맹은 절대선이며, 그것의 관리자인 주한 미대사는 정의의 수호자인가?

13대 릴리, 14대 그레그, 23대 리퍼트 … 정보요원 출신 대사들
주한 미대사는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미국 국익의 대변자로서 한국정치에 깊이 개입해 왔다. 역대 주한 미대사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이 일반적인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사절이 아니라, 한국에서 미국의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내정 개입도 불사하는 미국의 정치요원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9년 부임한 제1대 존 무초 대사부터 2014년 10월 부임한 제23대 마크 리퍼트 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거쳐 간 수십 명의 주한 미대사들은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한편, 자체적인 정보활동을 펼치면서 한국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었다. 특히 CIA 출신의 13대 제임스 릴리와 14대 도널드 그레그를 비롯해, 미 해군 특수부대 정보장교 출신의 리퍼트까지 정보기관 출신의 미국 대사가 다수 발견된다는 점은, 주한 미대사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 시절 한국에 부임했던 주한 미대사의 행적을 돌아보면, 이들이 과연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중재자였는지, 부당하게 한국정치에 개입해온 정치요원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960년 이승만을 끌어내린 매카나기 대사
1960년 4·19혁명 당시 점차 격화되어가는 시위를 지켜본 미국은 이승만과의 절교를 단행하기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 입장에서 어렵사리 세운 동북아의 반공 교두보가 통째로 넘어갈 판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한 미대사 월터 매카나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매카나기는 1960년 4월 19일 경무대를 직접 방문해 미국은 한국정부가 국민들의 불만을 적당히 무마시키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승만에게 직접 방송 메시지를 녹음해 발표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에서만 물러나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자 매카나기는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승만에게 직접적으로 사퇴를 요구한다. 26일 다시 경무대에 찾아간 매카나기는 “연로한 이승만이 은퇴하는 것이 좋으며, 새로운 정부를 젊은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강요 아닌 강요를 했으며, 이승만은 곧 하야를 선언하고 하와이로 망명하게 된다. 이승만의 하와이 행 역시 매카나기가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1년 5·16쿠데타를 묵인해준 버거 대사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개입설이나 사전인지설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러나 개입설이나 사전인지설을 차치하고서도, 실제로 5·16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쿠데타 직후, 미 국무부는 주한 미대사관에 쿠데타 관련 언급을 삼갈 것을 지시했다. 미국이 쿠데타를 방조 또는 묵인했다는 주장은 이러한 태도에서 기인한다.

1961년 7월부터 한국에 부임한 사무엘 버거 대사는 그해 12월 미 국무부에 ‘한국은 이제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 쿠데타 세력이 ‘진정한 개혁을 추진하고 능률적인 정부를 건설’할 것이라고 보고함으로써 미 국무부가 박정희 세력을 인정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쿠데타 공약에서 ‘친미반공’을 내세운 박정희는 이후 베트남 파병 등을 통해 미국과 밀월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1973년 김대중 피랍사건에 개입한 하비브 대사
1973년 8월 8일, 박정희 유신정권은 1971년 대선 당시 박정희와 박빙의 승부를 펼쳤던 야당 정치인 김대중을 도쿄에서 납치했다. 박정희 정권은 해외에서 반유신활동을 펼치고 있던 김대중을 현해탄 어느 지점에서 살해하려 했으나, 미국의 개입으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미국 입장에서는 자신의 베트남전 패배 이후 자주국방을 내세우며 독자 행보로 나아가려 했던 박정희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대사직을 수행한 필립 하비브는 미 본국과 연락을 통해 납치 사건의 배후에 중앙정보부가 있다는 첩보를 확인하고 청와대로 향했다. 하비브는 박정희에게 김대중이 살해되면 한미관계에 악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경고했고, 박정희는 결국 이에 굴복해 김대중을 살려줄 수밖에 없었다.

   
▲ 필립 하비브 제10대 주한 미대사 ⓒErwin Cohen – en wikipedia


1978년 한국의 핵개발 시도를 저지한 스나이더 대사
197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암호명 아래 비밀리에 핵 개발프로젝트를 추진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를 둘러싼 구체적 의혹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박정희 정권의 핵 개발 프로젝트가 미국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것이다. 핵우산을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한국이 독자적인 핵보유국이 되어 자신의 세력권에서 이탈하는 상황을 용인할 수 없었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국 대사관은 1970년대 중반부터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시도를 인지하고 있었다. 1974년에 주한 미대사로 부임한 리차드 스나이더는 음으로 양으로 박정희 정권을 압박해 결국 핵 개발 계획을 좌절시켰다. 리퍼트 대사가 병상에서 읽었다는 『두 개의 한국』의 저자 돈 오퍼도퍼는 이 사건을 두고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남한 정부가 아무리 완강한 의지력으로 추진하는 일이라도 능히 저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1987년 6월 항쟁 때 민정당편에 섰던 릴리 대사

   
▲ 제임스 릴리 제14대 주한 미대사 ⓒ美國駐中國大使館

1987년 6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도화선으로 해 민주화의 열기가 폭발하고 있을 때 미국은 전두환과 한 배를 타고 있었다. 미 국무부는 전두환의 4·13호헌 조치를 인정해주었고, 시위 대중의 폭력행위를 혐오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가 있었던 6월 10일, 주한 미대사 제임스 릴리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전당대회 및 노태우 후보 선출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한편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4·19 때와 마찬가지로 주한 미대사가 청와대로 들어갔다. 19일 청와대를 방문한 릴리는 군대를 출동시켜 시위를 진압하려고 했던 전두환에게 군 투입에 반대한다는 요지의 ‘레이건 친서’를 전달함으로써 국면전환을 꾀했다. 릴리의 방문 후, 전두환은 곧 6·29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게 된다.

대선에 개입했던 보즈워스와 버시바우 대사

   
▲ 스티븐 보즈워스 제17대 주한 미대사 ⓒU.S. Department of State

제15대 대선을 며칠 앞둔 1997년 12월 12일, 당시 주한 미대사였던 스티븐 보즈워스는 여론조사기관인 한국갤럽 회장 최시중을 만나 대선의 향방을 묻는다. 당시는 대선 직전이라 여론조사 결과가 공표될 수 없었는데도, 보즈워스는 최시중으로부터 여론조사 결과를 제공받았다. 이 사건은 주한 미대사가 상시적으로 한국의 정치에 대한 개입을 해온 것 아니냐는 의혹을 기정사실로 만들어주었다.

200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위키리크스>의 미국 외교문서 폭로를 통해 미국과 주한 미대사관이 어떻게 한국 내정에 개입해왔는지가 드러났다. 2005년에서 2008년까지 주한 미대사를 지낸 알렉산더 버시바우는 대선국면에서 한국 정객들과 긴밀하게 접촉했다. 그는 한국의 정관계에 폭넓게 분포하고 있는 한국 내 정보원을 활용하여 유력한 후보였던 이명박 후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데 열을 올렸으며, 파병연장과 FTA 비준 등 미국 국익과 관련된 현안들의 이행을 촉구했다. 한편 버시바우는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당시에 “한국 국민들은 공부를 더 해야 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 한국인들의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리퍼트는 무엇을 위하여 한국에 왔나
이처럼 주한 미대사는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었다. 이들은 일상적으로 한국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 정보활동을 펼치는 한편, 미국의 국익과 관련된 고비에서마다 직접 한국 정치의 한복판에 들어가 큰 물줄기를 돌려왔다. 주한 미대사의 활동은 언뜻 유혈사태를 막거나 민주화의 이행에 기여한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미국의 국익을 앞세우며 독재정권을 편들어주거나 정치공작을 통해 미국의 대한전략을 관철시키는 데 집중되었다.

리퍼트 역시 이런 역할 모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이 부임 초기 그에 대한 평가였다. 리퍼트는 오바마를 상원의원 시절부터 보좌했던 인물로, 오바마 군사·안보정책의 핵심 참모로 꼽히는 사람이었다. 해군 정보장교 출신이기도 한 그는 동아시아에서 미국 중심의 안보질서를 굳건히 하기 위해 ‘한·미·일 삼각동맹’을 설계하고 직접 추진할 당사자라고 평가되었다. 리퍼트는 지금 한국인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주한 미대사 지명자 시절 청문회에서 “주한미군이 오늘 당장 싸울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하는 등 매우 군사주의적인 얼굴도 가지고 있다. 그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여전히 대북한·대중국 봉쇄정책이라는 군사·안보적인 목표를 최우선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 마크 리퍼트 제23대 주한 미대사 ⓒU.S Department of Defense


맹목적인 신념이 빚어낸 역사적 결과를 직시해야
지금 상처입은 리퍼트를 측은하게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겠지만, 그것이 한미동맹의 모순까지 희석시키며 미국 주도의 동맹체제를 강화시키는 데까지 나간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를 경계해야 한다. 리퍼트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한정책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시켜 한국을 동아시아 분쟁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일 위험성이 다분한 것이다. 우리는 60여 년간 지속되어 온 한미동맹의 관성으로 인해, 주한 미대사와 그가 추진하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얼마나 위험한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리퍼트 개인에 대한 동정심이 전도되어 ‘한미동맹 강화’로까지 논의를 확대시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의문이다. 동맹을 구실 삼아 이 땅에서 미국의 국익을 그대로 관철시켜온 역사가 엄연하고, 리퍼트에 대한 인물 평가조차 객관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앞에 둔 채 맹목적으로 부르짖는 ‘한미동맹 강화’의 구호는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이준영 우리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이 글은 우리사회연구소 홈페이지(www.urisociety.kr)에도 게재됐습니다.

이준영  uri-societ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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