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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는 반대하지만 공산주의자는 품어야죠"More than Conquerors(1) 허문영 평화한국 대표

한 사람의 각성이 공동체를 깨우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암살 위협, 중상모략 속에서도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던 ‘영국의 양심’ 윌리암 윌버포스, 증오가 아닌 사랑으로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끈을 잘라버렸던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킹 목사. 신념 하나로 일어선 이들을 거대한 세상도 막진 못했다. 성서에도 이 같은 무수한 영웅들이 등장한다. 아브라함, 모세, 기드온, 다윗, 선지자…. 이들은 온갖 핍박과 고난,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아니 신앙으로 결국 승리를 쟁취해냈다. 성서는 이들에 대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히 11:38)이란 별명을 부여하고 있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는 남북 통일을 소명으로 부여안은 채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개척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편안한 삶을 거부하고 고생길을 자처한 이들이다. 오늘도 고난과 오해, 위기의 구비길을 넘고 있다. 왜 일까. 왜 그렇게 막무가내 외길을 걷는 것일까. 유코리아뉴스가 그 길을 추적해봤다. 이들에겐 ‘죽음(세상)도 막지 못한 사람’이란 뜻의 ‘More than conquerors'를 붙여주기로 했다.

   
▲ 허문영 대표는 "평화한국은 비록 작은 단체지만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일을 감당케 하셨다"고 말했다. 김성원.

궁금했다. ‘왜 인터뷰를 수락했을까?’ 서울 삼성동 평화한국 사무실을 찾아가면서도 궁금증은 가시질 않았다. 허문영(56) 박사. 평화한국 대표이자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센터 소장이다. 수년 전부터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그때마다 “사역과 관련한 인터뷰는 할 수 있지만 삶과 관련한 인터뷰에는 응할 수 없다”며 단호했었다. 정작 관심있는 것은 허 박사의 삶인데 사역 관련 인터뷰만 하겠다니, 필자도 응할 수 없었다. 처음엔 ‘사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솔직히 가졌었다.

“수년 만에 인터뷰가 성사된 건 허 박사님이 처음입니다.” 인사말에 허 박사는 허허 웃으며 “내가 드러나는 건 안된다”며 또 다시 인터뷰를 사양할 참이었다. 허 박사는 “대표가 드러나서는 안되고 스텝들(평화한국 간사들)이 드러나야 한다”며 “교만을 물리치는 것은 내 일생 최고의 목표”라고 말했다. “박사님의 약점만 집중적으로 소개하겠다”는 말에 결국 허 박사는 인터뷰를 수락했다.

거듭된 실패로 배운 순종
허 박사의 삶은 실패로 점철돼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에 시험을 쳤지만 불합격. 결국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성대 학부를 졸업한 다음엔 다시 서울대 대학원에 원서를 냈지만 낙방. 대학원 때는 외무고시도 쳤지만 역시 불합격, 나중엔 육군사관학교 교수 임용 면접에서도 탈락했다. 하지만 거듭된 실패는 허 박사에게 순종을 가르쳐줬다.

“저는 어릴 적부터 하나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강원고 교장을 지내실 정도로 집안 형편도 부족함이 없었고요. 그때는 제가 교만해서 순종이 뭔지 몰랐어요. 결과적으로 거듭된 실패를 통해 주님 앞에 순종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라는 걸 깨달았죠. 지금도 저의 평생 소원은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학생 시절 허 박사의 꿈은 국제정치학자나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이 같은 꿈은 1979년 11월, 그가 교회 사경회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경험했을 때 더 분명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약 6개월 뒤에 터진 광주사태는 그를 깊은 방황으로 내몰았다. 당시 허 박사가 성균관대 정외과 조교를 할 때였다.

“예수님 피로 내 죄를 다 씻은 사실을 깨닫고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광주사태가 난 겁니다. 정치학도로서 외면할 수가 없었죠. 군부 쿠데타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기독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믿고 술, 담배 다 끊었는데 또 다시 술, 담배를 하기 시작했죠.”

반공교육 하며 통일에 눈뜨다
방황과 고민 속에 그는 군대를 갈 수밖에 없었다. 장병들 정신교육을 하는 정훈장교가 되어 강원도 철원 백골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주 업무는 공산주의 비판교육이었다. 강의도 강의였지만 분단의 철책선을 대하면서 그는 비로소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반공주의가 뼛속 깊이 밴 것도 이때의 교육과 경험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철저한 반공주의잡니다. 저는 공산주의는 철저히 반대합니다. 다만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예수의 사랑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허 박사는 간혹 자신에 대한 오해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도 기독교인으로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정치나 사회 현실에서는 곧잘 오해를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지난해 김정일 사망 때는 ‘북한체제가 당분간 안정될 것 같다’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이 때문에 ‘빨갱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사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소장으로서는 이만저만한 소신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론과 팩트에 입각한 자신의 연구 결과와 양심을 결코 굽히지 않는 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

79년 가을이 영적 회심의 시간이었다면, 84년 가을은 지성적 회심의 때였다. 허 박사는 그해 9월, 제대 후 고향 춘천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그때 고향 교회의 후배 이영길(현재 인도 선교사)이 그를 찾아왔다. 다짜고짜 신학서적도 같이 읽고 성경공부를 하자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춘천IVF 대표 김종호 목사, 그리고 이 선교사가 데려온 강원대, 춘천교대생 몇 명과 성경공부가 시작됐다. 이 성경공부를 통해 허 박사는 이원론을 철저히 부정하게 됐다. 성(聖)과 속(俗)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진보 교회는 교회 밖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면서 성경을 떠나니까 제대로 설 수 없는 거고, 보수 교회도 이원론을 벗어나 복음주의 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봤어요.”

허 박사는 1986년 강원대 강사로 부임했다. 이때부터 강원대생들을 데리고 본격적인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춘천기독교학문연구회도 여기서 싹텄다. 91년까지 5년간 이 모임을 통해 교수, 외교관, 목회자, 선교사들이 여러 명 배출됐다. 허 박사가 91년 통일연구원 초기 멤버로 발령받아 가면서 정재호 최상도 전도사(현재 목사) 등이 이 모임을 계속 이끌었다. 이들은 90년대 초중반 전용태 춘천지검장 등이 부임하면서 춘천성시화운동의 불쏘시개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부터 허 박사가 강원대에서 가르쳤던 과목은 ‘통일학’. 지금과는 달리 통일학은 학생들에게 어용으로 분류됐다. 소신대로 하면 재임용이 어려워지고, 정부 안대로 강의하면 ‘어용’이 되는 게 당시 통일을 가르치던 교수들의 딜레마였다. 결국 통일학 강의는 허 박사처럼 새파란 강사들 몫이었다. 하지만 허 박사는 군대 시절 정훈장교 경험에다가 기독교 세계관으로 통일학을 가르쳤다. 그러니까 정부 입장이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강의를 들은 학생들로부터 ‘머리가 시원해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일부 운동권 중엔 수업을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강의를 듣는 친구들도 있었죠. 나중엔 200명 들어가는 강의실이 가득 차기도 했었어요. 수업시간에 저를 계속 공격하던 운동권 학생 중엔 지금 북한선교를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 허 박사와 이승철 평화한국 사무국장(왼쪽). 두 사람은 허 박사가 장신대 강의를 할 때인 1997년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학자들은 맨날 말만 하지 행동이 없다”는 말
1993년, 통일연구원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에게 홍정길 목사가 전화를 했다. 진보와 보수 교회를 망라한 남북나눔운동을 만드는 데 연구위원이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보수쪽의 이만열, 윤영관 박사, NCC 쪽의 이삼열, 서광선 박사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하지만 입장차를 극복하는 일은 힘에 겨웠다. 결국 NCC 쪽이 떨어져 나가고 복음주의 진영만 남았다. 결국 이를 통해 남북나눔운동은 복음주의를 교회로 확산하는 데 일조했다는 게 허 박사의 평가다.

남북나눔운동이 2006년 싱크탱크로서 한반도평화연구원(KPI)을 만들면서 허 박사도 2007년 평화한국을 시작했다. 거기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우선 KPI가 연구를 맡는다면 평화한국의 역할은 그것을 확산하는 것이라고 봤다. 그러려면 너무 엘리트일 필요는 없었다. 허 박사가 이 같은 생각을 가졌던 데는 실패의 경험 때문이다.

“저는 땅이 많은 부잣집에서 자랐어요.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춘천에서 자동차정비공장을 했죠. 제가 살던 집 옆엔 하꼬방(판자촌)이 있어서 늘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살았어요. 또래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 거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원래 엘리트 기질을 가진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그 코스를 계속 막으신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계기는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소속 이상숙 권사의 권유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허 박사는 CBMC 초청으로 특강을 했다. 그 이후에도 이 권사는 허 박사의 강의를 몇 번 더 들어보더니 “허 박사와 내 생각이 똑같다”며 “우리는 좌파 우파 가리지 말고 복음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느날 내로라하는 교계 통일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권사는 대뜸 “학자들은 맨날 말만 하지 행동하는 건 하나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허 박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수치심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허 박사는 2003년부터 몇몇 교수들을 데리고 기도모임을 했고, 이것이 2007년 평화한국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

일각에서는 결국 분열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허 박사는 “지금도 제 마음속에는 ‘한국교회’가 늘 자리잡고 있다”며 “한국교회를 위해서라면 평화한국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어떤 통일 관련 기독교 단체들도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넘어서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 진정한 연합과 시너지효과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통일의 물꼬를 트는 평화한국 세 이레 기도회
평화한국은 2007년 6월부터 매년 ‘세 이레 평화기도회’를 해오고 있다. 성서 속 다니엘이 불굴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고, 21일간의 기도를 통해 민족 구원과 열방 심판의 환상을 본 것처럼 3주간의 기도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남북 평화와 통일의 물꼬를 터도록 간구하는 자리다. 그렇다고 꼭 기도회부터 시작해야 했을까. 캠페인이나 세미나 등 다른 방법도 많은데 말이다.

“독일 통일은 동독 니콜라이교회의 월요 기도회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동독과 다릅니다. 수령제 독재체제입니다. 수령은 곧 왕이기 때문에 이 왕조 사회에서 왕조가 허물어지도록 기도하는 모임이 만들어지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남쪽에서라도 기도회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 지난해 평화한국 세이레기도회에서 허 박사와 참석자들이 기도하는 모습. 평화한국 제공

이 같은 허 박사의 기도우선주의 생각은 80년대 중반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면서 키워왔던 것이다. 성도들이 모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을 바꾸시고, 지도자의 마음을 바꾸셔서 역사의 방향을 튼다는 것이다. 하지만 평화한국은 모여서 기도하기보다는 통일 관련 기도제목을 찍은 책자를 교회에 나눠주는 게 활동의 고작이었다. 지난해 초, 허 박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꾸짖음이 들렸다. ‘왜 기도는 안하고 책자만 찍어내느냐.’ 그렇게 해서 지난해 처음 기도책자와 함께 기독교회관에서 21일간 각 분야 통일 전문가를 모시고 강의와 설교, 기도회를 진행했다. 강사들이 제시하는 절박하면서도 분명한 통일의 방향이 뜨거운 기도와 합해지면서 허 박사는 비로소 통일의 가능성을 확신했다고 한다.

세 이레 기도회 외에도 평화한국은 2008년 9월 9일 신사참배 참회 선언문 발표를 주도하고, 2009년 3월 1일엔 진보, 보수교계 인사들을 망라한 회개와 통일을 향한 염원을 담은 3.1선언이 나오게 했다. 이것은 진보-보수 교계가 어우러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인연대’(평통기연) 창립으로 이어졌다. 경술국치 100년인 2010년엔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고, 통일 시대를 열어가자는 성명을 역시 진보, 보수 학자와 목회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선보이기도 했다. 허 박사는 “평화한국은 작은 단체지만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일들을 맡겨주셨다”고 말했다.

   
▲ 허문영 박사

“평화한국 4년은 곧 전쟁의 연속”
그렇지만 그 와중에서도 가슴 아픈 일이 많았다. 급여를 제대로 못준 채 헌신적으로 일하다 보니 대부분 간사들이 2~3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직하고 만 것이다. 지난해엔 아내로부터 이혼하자는 말을 듣기도 했다. 결국 허 박사의 반성과 대화, 치유를 통해 관계는 다시 회복됐다. 허 박사는 일련의 사건들을 ‘전쟁’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만큼 절박하고 힘겨웠다는 얘기다.

허 박사가 기도를 강조한다고 해서 ‘성령파’일까. 이 역시 오해다. 현대 교회는 흔히 세 부류로 나뉜다. 성령을 강조하는 오순절주의(펜테코스탈리즘),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에큐메니즘, 개인 영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에반젤리즘). 허 박사는 이 세 부류의 어떤 곳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 안에 이 세 가지가 다 있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예수원 설립자 고 대천덕 신부 때문이다.

허 박사가 대 신부를 직접 본 건 2~3번이다. 하지만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 강의를 듣거나 함께 식사를 하면서도 한번도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명사 울릉증’이 있었다는 게 이유. “기독교세계관을 공부할 때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등의 대 신부님 저서들을 읽으면서 ‘내 생각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수년 전 어느 교회 모임에서 강의를 했는데 끝나고 나서 거기에 와 있던 벤 토레이(대 신부의 아들) 신부님이 저를 부둥켜안고 우는 거예요. ‘허 박사님 메시지가 아버지 메시지와 똑같다. 아버지가 강의하는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저도 울었죠.”

허문영 박사, 그는 북한을 연구하고 통일 단체를 이끌고 있지만 통일지상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우리 민족에게 주신 시대적 사명이 예수의 통치권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복음에 기초한 통일한국의 삶, 가치관이 다른 민족으로 흘러가는 것. 통일한국은 과정일 뿐, 평화한국이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세대엔 불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다만 다음 세대에 바통터치할 때까지 망가지지 않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게 그의 간절한 기도제목이다.

여러번 오해와 비판, 좌절 속에서도 오롯하게 걸어온 그의 발걸음을 통해 각계 각층 수많은 제자들이 통일한국을 꿈꾸며 준비하고 있다. 그의 겸손과 연합정신 때문에 각개전투를 하던 통일 단체들이 연합하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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