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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탈북자들이야말로 통일의 선각자요 개척자"제1가나안농군학교 김평일 교장 인터뷰

   
▲ 제1가나안농군학교 교장 김평일 장로는 "궁극적으로는 북한에도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우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구윤성 기자

투철한 생활훈련을 통해 민족정신과 개척정신을 일깨워온 가나안농군학교. 이곳이 탈북자들의 터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최근 경기도 하남의 제1가나안농군학교(제1가나안농군학교가 주로 국내를 대상으로 한다면 강원도 원주의 가나안농군학교는 주로 해외를 대상으로 한다)를 찾았을 때 학교 입구엔 ‘평양통일예술단’ 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남한 사람들과 함께 탈북자들 몇 명이 손님을 맞았다.

교장 김평일(70) 장로가 탈북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 독립운동과 함께 통일운동을 벌여온 아버지 김용기 장로의 꿈과 기도를 이어 탈북자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김 장로는 탈북자들에게 가나안농군학교 교육 외에도 명절이면 탈북자들을 초대해 예배와 잔치를 베풀었다. 지금은 탈북자들과 함께 여름 해수용, 제주도 관광도 해마다 다니고 있다. 10여년 전부터는 축구단, 예술단 등 탈북자 모임을 만들어 탈북자들의 국내 정착을 돕고 있다.

김 장로는 “남북 통일은 어떤 식으로든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남한 내 탈북자들의 정착을 잘 이끈다면 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한 내 탈북자들이 북한의 가족이나 지인들을 설득해 남한 체제를 수용하게 하면 체제에 대한 상호 불신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장로가 탈북자들을 ‘통일의 선각자요 개척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김 장로는 “나의 궁극적 목적은 북한에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우는 것”이라는 바람도 피력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올해가 설립 50주년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다지 밝아보이지 않았다. 이곳 일대가 정부의 정책에 따라 보금자리 지역으로 선정되는 바람에 올 연말이나 내년 초에는 경기도 양평으로 이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 장로는 이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나라에서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지만 주민들을 생각한다면 이런 식으로 해선 안된다. 보금자리든 무슨 자리든 여기 사는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강행하면 되겠나.”

김 장로는 “대책위 만들어서 반대해도 소용이 없다. 결국 시간 지나면 다 정부가 이기는 것 아닌가”라며 “용산참사가 이해가 되더라”라고 씁쓸해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론에서 여러 번 인터뷰했지만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며 언론에 대한 강한 불신도 드러냈다.

다음은 김 장로와의 인터뷰 전문.

-가나안농군학교만도 벅차실 텐데 평화통일탈북인연합회, 샬롬평화통일축구단, 평양통일예술단 등 탈북자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시는 이유는?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는 ‘탈북자’가 아니라 ‘귀순자’라고 부르던 때다. 숫자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하나원도 없었다. 드문드문 넘어오면 탈북자 시설인 대성공사에서 교육을 시켰다. 귀순용사들이 그 다음으로 가장 먼저 접촉하는 민간인 시설이 바로 가나안농군학교였다. 여기서 민간인과 접촉한 후 사회로 나갔다.

-가나안농군학교가 어떻게 탈북자를 교육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농군학교는 남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장소로만 안다. 하지만 농군학교를 설립한 아버지 김용기 장로는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을 하셨다. 그때 김일성 주석도 만났다. 그러면서 북한은 제대로 된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사실을 간파하셨다. 그래서 이들과는 대화가 안된다는 것을 아시고 북한이 변화가 되어야 한다고 보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김일성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보신 것이다. 아시다시피 김일성은 어릴 적 교회를 다녔다. 우리 가정과 비교했을 때 비슷한 점이 많다.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김일성이 비록 아버지보다 나이가 좀 어리지만 아버지가 장로니까 김일성도 장로가 되고, 아버지의 장남 김종일이 목사니까 김 주석의 아들 김정일도 목사가 되면 남북 평화통일이 될 수 있다고 보신 것이다. 순진한 것 같지만 아버지는 이걸 위해 매일 기도를 하셨다. 아버지는 해방 이후 늘 이 얘기를 자식들에게 하셨다. 돌아가시면서도 자식들에게 육성으로 들려주신 말씀이 바로 이 내용이다.

-지금 김평일 장로의 탈북자 사역은 아버지 기도의 연장인 셈인데?
아버지는 늘 그런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셨는데 나는 좀 다르게 봤다. 귀순자(탈북자)들이 통일의 주역되어야 한다고 봤다. 다른 누구보다 앞서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유는 이렇다. 남북 통일은 개인에 의해 되는 게 아니라 국가와 세계 여론에 의해 되는 것이다. 나는 통일이 되면 국가는 좋지만 일반인들은 더 어렵게 된다고 생각한다. 통일이 되어서 좋은데 살기는 더 어려워진다. 따라서 그런 부작용을 최대한 적게 하는 쪽으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북간 통일의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는 건 당연하다. 한 동네에 살던 김씨와 이씨가 만나 결혼해도 이혼을 하지 않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60년간 떨어져 있다가 만나서 제대로 될 수 있겠나. 어렵다. 잠재적으로 흐르고 있는 피가 맞지 않다.

그래도 이것을 가깝게 할 수 있는 게 탈북자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한에 온 탈북자들을 남한 사람이 잘 도와주고 사랑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한테 잘하는 사람한테 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탈북자들은 남한 사람들한테 잘 못한다. 살아온 과정이 틀리기에 어쩔 수 없다. 그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능력 위주다. 똑같이 일해도 돈받는 게 틀리다. 공산주의는 다르다. 집단농장에서 하루종일 땀흘려 일한 사람도, 담배 피면서 노닥거리며 일한 사람도 강냉이 죽 먹는 양은 똑같다.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는 사회다. 이런 사람들이 남한에 오면 뭐든지 똑같이 막 주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우리 사고와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너희는 잘못한다’고 할 수 있나. 거기다 대고 우리가 ‘없어서 넘어온 놈들이 뭘 그러냐’고 한다면 대책이 안나온다. 이 사람들이 자존심이 세다. 남한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해줘야 한다. 어디까지 이해해줘야 하냐 하면 그들이 ‘우리가 남한에 오길 잘했구나’라고 느낄 수 있을 때까지다.

   
▲ 개척종 옆에 선 제1가나안농군학교 김평일 교장. 김 교장은 "탈북자들이야말로 통일의 개척자"라고 강조했다. 구윤성 기자

-어떤 면에서 탈북자들이 통일의 주역이라고 생각하나?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중국 가면 ‘천당 같다’고 말한다. 중국에서 대한민국에 오면 ‘진짜 천당 같다’고 한다. 불이 많고 자동차도 많으니까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살아보면 달라진다. 북한이 더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되니까 범죄도 저지르고 제3세계로 가는 사람이 생긴다. 그 책임이 남한 사람에게 있다. 그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들을 데려다가 남한 정착 교육도 시키고 고정관념도 바꿔줘야 하는데 쉽지 않다. 계속 노력할 뿐이다. 나는 남북한 통일 준비라고 하는 것은 이들이 남한이 좋다는 걸 느꼈을 때라고 본다. 그래야지 통일 되면 북한에 가서 부모 형제 동창생들에게 남한을 자랑할 것 아닌가. 그래야 자연스럽게 남북한이 섞여 살 수 있지 않겠나. 그런데 남한 사람들은 ‘평양에다 교회 세우겠다’ ‘어디에다 기업체 세우겠다’는 식으로 지역을 맡아놓고 남한 것을 이식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소용없는 일이다.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남한 내 탈북자들을 변화시켜 이들이 북한에 제일 먼저 올라가 부모, 동창생들을 설득해 ‘남한을 빨리 받아들이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는 걸 전하도록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내가 탈북자들을 통일의 선각자요 개척자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탈북자 모임은 어떻게 조직하게 됐나?
내가 일일이 다 이끌지 못한다. 자체적으로 움직이도록 하고 있다. 남한 사람은 이사장 나 하나고, 나머지는 다 탈북자들이다. 우리도 미국이나 호주로 이민을 가면 1세대는 죽도록 고생하기 마련이다. 2세대를 위해서다. 나는 탈북자들에게도 ‘너희가 바로 넘어와서 바로 행복하려 해서는 안돼. 후세가 행복하도록 해야 한다’고 늘 얘기한다. 우리 모임에 탈북자 회원이 약 5000명 정도 된다. 이들을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이 추석 때 가나안농군학교에서 한마당 축제를 열어주는 일이다. 90년대 후반 때부터 했던 것 같다. 강인덕 통일부장관 때인데 그때 남한 내 탈북자가 500명쯤 됐을 때다. 강 장관이 나를 만나자고 해서 만났는데 ‘탈북자들이 많아지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탈북자 관리나 정착에 문제가 많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내가 ‘그러면 우리한테 맡기라’고 얘기했다. 내가 교육하고 정착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강 장관 부인이 옷 로비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무산되고 말았다.

-평화통일탈북인연합회는 언제 만들었나?
2000년도에 만들었다. 탈북자들이 모여서 교제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보통 탈북자들은 교회에서나 만나고 하는데 그마저도 명절이 되면 갈 곳이 없다. 남한 사람들은 다 고향 가는데 탈북자들은 갈 곳이 없다. 모임을 만들기 전에 몇몇 탈북자 가정을 추석 때 학교로 초청했다. 떡을 같이 만들어 먹으면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눴는데 다들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크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명절 축제를 열었다. 최고로 많이 올 때는 500명까지 왔다. 그러다보니 운동장이 작어서 안되겠더라. 지금은 200명 정도로 줄여서 명절 때마다 모이고 있다.

-명절 때 모여서 뭘 하나?
먼저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먹고, 오후엔 축제를 한다. 축제 때는 북한에서 하는 운동이나 놀이를 하고, 북한 노래를 부른다. 놀이라는 것도 내가 어릴 적 했던, 눈 가리고 코와 귀 찾기, 맥주병 놓고 낚시하기 등 너무나 단순한 것들이다. 그런데도 탈북자들은 이걸 얼마나 재미있어 하는지 모른다. 나도 이걸 보며 옛 생각을 많이 했다. 마지막엔 태극기 붙들고 애국가도 부른다. 이들은 다 고향 북한을 그리워한다. 이들은 북한이 싫은 게 아니고 공산주의가 싫은 것이다.

-명절에 모이는 것 외에도 탈북자들을 위한 다른 행사를 하나?
그렇다. 송년회도 해주고 여름이 끝나갈 무렵엔 데리고 해수욕도 다녀온다. 제주도 여행 프로그램도 있다. 남한 사람은 제일 가고 싶은 곳이 백두산이지만 북한 사람은 제주도 한라산을 제일 가고 싶어 한다. 김정일이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싶어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10년 넘게 모임을 해보니까 참 보람이 있다. 어떤 탈북 노인 두 분은 명절에 축구 응원을 하다가 서로 붙들고 우셨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까 북한에서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아오지 탄광에 갔는 줄 알았는데 남한에 와서 만났다는 것이다. 어떻게든지 이들이 남한에 와서 잘 정착하는 게 결국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우리 정부에서는 관심이 많나?
안타까운 것은 정부에서 이런 것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하다. 어쩔 수 없이 졸라대면 예산도 주고 하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지금은 적극적으로 요청하지 않는다. 정부에서 통일과 관련된 게 모든 걸 우선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현실이 너무 아쉬울 따름이다.

-앞으로는 탈북자 사역을 어떻게 할 계획인가?
내가 필요로 하는 데로 갈 것이다. 도시 재개발 때문에 가나안농군학교가 양평으로 가는데 여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필요로 하면 생명 다할 때까지 민간인으로서 통일운동에 앞장설 것이다. 언젠가 북한에 가려고 했더니 탈북자 단체를 하고 있다고 안된다고 탈북자들이 그러더라.

-탈북자 사역 해보니까 어떤가?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탈북자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몇 년 지나니까 저절로 정리가 됐다. 해봐도 힘만 들고 돈은 안되니까 계속하는 사람이 드물다. 이건 통일운동으로 해야지 개인사업이나 명예로 해서는 절대 안된다.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가끔 ‘내가 이걸 왜 시작했을까’ 후회할 때도 있다. 마음에 안드는 것도 많다. 하지만 그렇기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더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평양통일예술단은 모두 북한 출신인 걸로 아는데?
5년 전에 평양통일예술단을 만들었다. 탈북자들이 스스로 통일의 주역으로 세움받기 위한 것이다. 단원이 10명인데 모두 북한 출신이다. 어떤 단체는 조선족이나 남한 사람을 섞어서 한다고 하는데 우린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500회 공연을 했고, 미국에서도 3개월간 전국 공연을 했다. 모두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은 여전히 찬송가도 잘 못부르고 성경 구절도 잘 못찾는다. 하지만 마음 중심은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

-통일 후 북한 재건 계획이 있다면?                                                                   

나의 궁극적 목적은 북한에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탈북자들이 농군학교에서 교육받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북한이 갑자기 자본주의를 흡수하는 게 어렵다. 이론적인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 경기도 하남의 제1가나안농군학교 전경. 이곳은 이제 내년이면 텅빈 채 기념관으로 남게 될 예정이다.

-가나안농군학교 양평 이주는 어떻게 되가나?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다. 빨리 가서 거기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땅은 샀는데 허가 나는 게 굉장히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금년 말 이주가 어렵게 됐다. 정부에서 보금자리 주택을 짓기로 해서 어쩔 수 없이 이주하는 건데 이주가는 곳에서는 허락을 잘 안해준다. 나라에서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지만 주민들을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해선 안된다. 보금자리든 무슨 자리든 여기 사는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강행했다. 대책위 만들어서 반대해도 소용이 없다. 아마 정부 입장에서도 그런 걸 너무 많이 당해보니까 대책위 만들어놔도 겁도 안내는 것 같다. 결국 시간 지나면 다 정부가 이기는 거 아닌가. 용산참사가 이해가 되더라. 정부에서 한다면 정부에서 정당한 가격을 주면 되는데 그렇질 못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 애국자다. 40년 동안 그린벨트로 묶여 아무것도 행사하지 못하고 살았다. 돈 있는 사람들은 다 땅 팔고 갔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닭 키우고 채소 재배하고 살았는데 대부분 노인들인데 이들이 어디 가서 살겠나. 여기에 터잡고 사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야지 나라의 목표라고 무조건 밀어붙이면 안되지 않나. 정부에서 불쌍한 사람들 위해 보금자리를 지으려면 나랏돈으로 해야지 그걸 왜 불쌍한 사람들 주머니를 털어서 하나(LH 공사가 그린벨트 가격으로 용지를 샀다는 게 김 장로의 주장이다). 결국 LH가 물어내고 있는 엄청난 이자를 갚기 위한 것 아니냐. 나는 이런 얘기 안하고 법대로 가자는 주의인데 해도 너무하니까 어쩔 수 없다.

-올해가 가나안농군학교 설립 50주년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보금자리로 지정이 안되었을 때는 50주년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 자리 지키기도 어려운 입장이 되다 보니 어렵다. 떠날 때 쯤 가나안을 사랑하고 여기에 머물렀던 사람들 모아다가 조촐한 행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 3000~5000명 정도 찾아와 교육을 받았는데 금년에는 떠난다니까, 또 경제가 어려우니까 교육생들이 팍 줄었다.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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