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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높이와 깊이

신학을 하면서 가보고 싶은 나라가 화란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를 비롯한 3대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의 나라 네덜란드가 궁금했습니다. 양대 신학의 거장들을 배출한 후손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까 궁금해서 찾은 화란에서의 경험은 아직도 충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싫어하는 대마초, 동성애 같은 사회적 문제를 제일 앞장서 합법화하는 나라, 암스테르담의 한 복판에서 대마를 파는 젊은 여인들의 호객행위, 카페 안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동공이 풀린 듯한 젊은이들, 신학의 관점에서 새로운 것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던 신앙적 호기심은 여실히 무너졌습니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예상치 않은 소중한 것을 한 가지 얻었는데 ‘공존’입니다. 신학과 문화, 교회와 사회의 공존입니다. 신앙의 토대 위에 사회를 품는 자연스러운 공존이 렘브란트, 빈센트 반 고흐, 요하네스 얀 베르메이르, 앙드레 류 같은 세계적인 화가들과 음악가들을 배출했겠다 싶었습니다.

근래 들어 ‘공존’이라는 단어를 자주 생각합니다. 아마 우리 교회에 함께 입주해 있는 분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단 교회 구성원들의 입장을 생각해보는 관계에서도 공존을 생각해 봅니다. 지난주 정책당회를 시작으로 안수집사회와 예결산, 권사회 그리고 저녁 청년들과의 모임으로 꽤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배와 모임 등 내가 경험하고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부분이 좋으면서도 그래도 ‘청년들이 좋다 하면’ ‘어르신들이 좋다하시면’이라는 말로 배려하려는 마음이 ‘공존’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를 더 단단히 엮어 가는 힘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공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콘스탄티노플로 더 알려진 터키의 이스탄불입니다. 아름다운 곡선미를 자랑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 사원은 공존을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1935년까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던 소피아 성당을 박물관으로 개조하려 벽면의 칠을 벗겨내자 그 속에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된 예수상과 가브리엘 천사 등 수많은 성화들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나타났었답니다. 500년 동안 잠자던 비잔틴의 찬란한 문명이 되살아난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비잔틴 문명에 대한 오스만 투르크의 관대함에 경이를 표할 정도였다고 알려집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이교도인 소피아 성당을 점령한 마호메트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난 다음 바로 소피아 성당으로 말을 몰아 성당의 파괴를 금지시켰던 것이죠.

우리 교회도 이런 공존을 좀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의 경험이나 익숙한 것에서 오는 것과의 다름이 불편이 아니라 새로움으로 그리고 그냥 더불어 살아가는 것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생명의 손길이라는 차원에서의 공존은 그것 자체가 곧 교회의 높이이자 깊음 아닐까 싶습니다.

김종원/ 효창교회 담임목사

김종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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