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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던 세상

조선 전기의 문인 조신(曺伸, 성종 연간)의 『소문쇄록(謏聞瑣錄)』을 읽으면 흥미로운 자료가 잔뜩 나온다. 임진왜란 때 문헌이 대량 소실되는 통에 조선 전기에 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이유로 『소문쇄록』 같은 필기류 산문이 퍽 소중한 것이다.

최근 이 책을 읽으며 눈여겨본 대목은 목화에 관한 것이다. 조신은 목화의 원산지, 실을 뽑고 천을 짜는 방법과 도구, 수입 내력 등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는데, 고려 말에 들어온 목화가 의복생활과 경제에 일으킨 거대한 변화에 깊이 주목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런 사실은 ‘문익점’과 관련해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는 상식이기도 하다.

변변한 화폐가 없어 부의 축적이 곤란했던 시대
조신은 중국에서는 동전이나 금은의 많고 적음으로 빈부를 재지만, 조선의 경우 금은이 생산되지 않고 동전도 사용하지 않기에, 오직 면포를 재화로 삼는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조선에 원래 금은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중국의 요구를 거절하기 위해 일부러 광산을 개발하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화폐로 말하자면, 996년(고려 성종 15년) 철전(鐵錢)을 주조한 이래 고려와 조선 정부는 계속해서 금속화폐와 지폐를 만들었지만, 조신의 시대까지 5세기가 넘도록 제대로 통용된 적이 없었다.

면포를 재화로 삼았다는 것은, 면포가 곧 화폐의 구실을 하고, 또한 재산 축적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말이다(면포 이전에는 무엇이 재산 축적의 수단이었을까?). 조신은 면포 30자를 1필, 50필은 1동(同)이라 하는데, 조선에서 면포를 많이 축적한 사람이라 해봐야 1천 동을 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면포 5만 필이다. 비교할 방법이 좀 막연하기는 하지만, 면포 5만 필이 엄청난 재산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 조신의 기억에 의하면, 면포 1천 동 남짓을 소유한 거부는 윤파평(尹坡平,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尹弼商)과 상인 심씨·김씨·손씨 세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조선 전기 최고의 부자라고 해봐야 4명 정도고, 그 재산이라고 해봐야 면포 1천 동이다. 별 것이 없는 것이다. 면포는 오래 쌓아둘 수 없는 물건이고, 무한한 축적도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부의 축적에는 아마도 자연스럽게 제한이 있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평등한 시대, 창조적이고 강성했다
상품경제 내지는 교환경제가 발달하면 화폐는 필연적으로 출현하기 마련이다. 화폐경제를 일반적으로 경제발전의 지표로 삼는다. 여기에 토를 달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데 희한한 것은, 화폐가 없었던, 면포란 물건을 화폐 대용으로 써서 부의 축적이 제한되어 있었던 조선 전기가 문화도 발달했고 국력도 컸다는 것이다.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 동안 문화방면에서 온갖 창조적 성과가 나왔고, 대마도와 여진을 정벌하는 등 군사력도 강성했던 것이다. 부의 축적이 제한되어 있었던, 그로 인해 후대보다는 경제적으로 평등한 시대일 수 있었던 것이 창조적이고 강성한 시대를 만든 요인이 아닌가 한다.

돈 없이는 못 사는 세상이 되었다. 금융위기니 뭐니 하는 것으로 한 나라가 결딴이 나고 사회가 붕괴하고, 사람들은 고통에 시달리고, 자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땅과 건물과 공장과 가게와 상품과 사람은 그대로 있다. 그것들을 맺는 화폐적 관계만 달라진 것이다. 곧 화폐가 온갖 불평등과 모순,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은 제가 편리하고자 만든 물건의 노예가 된 것이다. 우습다!

   
 

『소문쇄록』을 읽고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화폐 없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한 개인이 수 조, 수십 조의 재산을 모으는 것이 그래도 가능할까. 화폐 없는 세상이 불가능하다면, 축적이 불가능한 화폐를 만들면 어떨까 싶다. 일정 기간 지나면 저절로 통용되지 않는 화폐 말이다. 가가(呵呵)!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이 글은 유코리아뉴스와 (사)다산연구소의 협의에 따라 게재하는 것으로 글에 대한 저작권은 (사)다산연구소에 있습니다.

강명관  hkmk@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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