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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신학, 수입신학에 사로잡힌 한국교회에게김교신 선생 기념사업회를 출범하며

지난 11월 28일에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김교신 선생(1901-1945)은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선생이 돌아가신 지 거의 70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까지도 그를 기념하는 기관이 없다. 해방 직후에는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저술과 158호까지 간행한 <성서조선>을 복간하는 일을 했다. 지금은 그마저도 중단되었다. 이를 확인하면서 후학으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선생의 이름을 내건 기념사업회를 선생께서 수긍하실까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지만, 후생의 도리라고 생각하면서 결성에 나섰다. 그 날 필자가 행한 기념강연을 요약하여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설립의 취지를 살피고자 한다.

선생은 함경남도 함흥의 유교적 집안에서 태어나, 12세에 결혼, 16세에 첫딸을 얻었고 그 뒤 6녀 2남을 두었다. 1919년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봄에 일본 도쿄정칙(東京正則)학교에 입학, 영어를 배웠다. 1922년 4월에는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영어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동식물학․광물지질학 및 지리학을 망라하여 공부하는 지리박물과로 전과(轉科)했다. 이에 앞서 선생은 1921년 4월부터 성결(홀리네스)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교회 출석한 지 두 달 후에 세례를 받았다. 이 무렵, 그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성경공부 모임에 출석, 8년간 강의를 들으며, 그의 신앙과 애국심에 감명을 받는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치무라의 2J((Jesus for Japan)는 김교신의 2C(Christ for Chosen)로 발전하게 된다. 그가 동경고등사범학교 입학 후 영어과에서 박물과로 전과하게 된 것도 우치무라에게서 배운 애국적인 감화와 무관하지 않다. 선생이 뒷날 지리박물학 교사로서 조선의 대형지도를 걸어놓고 각별하게 지리수업을 진행한 것이나, 서울 근교의 북한산 기슭을 산책하며 계곡이나 백합화를 볼 때조차 흐느껴 울었던 것은 그는 지리박물학을 통해 나라사랑의 정신을 키워갔기 때문이다.

선생은 1927년 3월 8년간의 학업을 끝내고 귀국,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와 양정고등보통학교, 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 및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2년을 근속한 양정학교 외에는 1년 이상 근속한 학교가 없다. 선생은 귀국한 후, 그 전해 일본에서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고 매주 성서연구 모임을 같이했던 신앙의 동지들(송두용 류석동 양인성 정상훈 함석헌)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하고 새로운 신앙운동을 시작했다. 『성서조선』은 처음에 신학을 공부한 정상훈이 편집책임을 맡았으나, 16호(1930.5)부터 ‘조와(弔蛙)’로 폐간되는 158호(1942.3)까지 선생이 주필로서 집필․교정․인쇄․우송 등 사무일제를 전담, 간행했다. 『성서조선』이 추구하는 바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을 성서화하자'는 것으로 성서입국(聖書立國)을 의미했다.

귀국한 6인의 동지들은 처음부터 무교회주의운동의 깃발을 올릴 의도는 없었다. 선생만 해도 공덕리에 거주할 때 근처 장로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도 하고 성경도 공부시켰으며 주일학교 책임을 맡아달라는 제의도 받았다. 그러나 기성 교회가 신앙의 역동성을 잃고 형해화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주일날 서울에서 자기들끼리 공개집회를 가졌다. 소위 ‘무교회 성서집회’였다. 일본인 우치무라에게 배웠다는 이유로 민족정신이 없는 무리라 규정되어 때로는 공격을 받았고 이들에게 집회장소를 빌려주지 말라는 전달문이 나돌아 집회장소 찾기도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어 성경은 물론이고 일본어 영어 독일어 희랍어 히브리어 성경을 펴놓고 성서연구를 계속했다. 특히 그들은 교회의 본래 모습을 탐구하기 위해 초대교회 성경언어인 희랍어성경 연구에 힘썼다.

선생은 성경연구를 힘쓰는 한편 기도 생활, 특히 한국교회의 특징인 새벽기도에도 힘썼다. 정능으로 옮긴 후 그는 새벽에 냉수마찰을 한 후 산에 올라가 몇 시간이고 기도하며 찬송했다. 송도로 옮긴 후에도 만월대 뒤 송악산 깊은 골짜기에 기도의 터를 잡고, 새벽 4-5시경부터 그곳으로 달려가 폭포수 소리에 질세라 큰 소리를 내어 기도했다. 선생의 새벽기도는 20세기 초 한국 교회에 정착한 새벽기도의 모형을 예배당이 아닌 산천에서 실천했던 것이다. 송도로 옮긴 그해 겨울 혹한에도 불구하고 폭포 밑 웅덩이에 살아남은 몇 마리의 개구리를 발견, 선생은 “아! 전멸을 면했구나!”라는 ‘조와’의 글귀를 민족의 부활과 관련하여 썼다. 여기서 그는 엄동설한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개구리를, 혹한 같은 일제의 탄압을 인고(忍苦)한 조선민족에 비유했던 것이다. ‘조와’는 이렇게 쓰여졌고. 일제는 그 글이 조선 민족 부활을 노래하는 것으로 직감, ‘성서조선사건’으로 얽었다.

‘성서조선사건’으로 처음 400여명이나 수감되었지만, 대부분 수십 일을 넘기지 않고 풀려났다. 13명만을 장기 구금시키고서도 마땅한 기소꺼리를 찾지 못한 일제는 1년 만에 그들을 풀어주었다. 옥중에 있는 동안 선생은 기도에 더욱 힘써 매일 주기도문을 100번에서 300번까지 외웠다고 한다. 취조한 형사는 선생과 동지들을 두고, “네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아온 조선놈들 중에서 가장 악질분자다…네놈들은 종교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조선 민족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 아니 5백년 후에라도 독립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닦으려는 악질분자다”라고 했고, 어떤 담당관은 “김(교신)에게는 정말 하나님이 계셔서 도와주고 계시는 것 같다”고 했다. 선생의 옥중생활의 진면모는 이렇게 감화와 감동으로 나타났다.

옥에서 나온 선생은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입사, 징용으로 각지에 흩어지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수천 동포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기회를 갖고자 했다. 그곳에서도 선생은 스승으로서의 신념을 살려 조선인의 긍지를 살리기 위한 교육훈련에 힘쓰며 동포노무자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선생의 이런 헌신적 모습은 일본인 상사들을 감복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환자를 간호하다가 선생 자신이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그토록 갈망했던 조국해방을 4달을 남겨둔 채 타계했다.

선생은 한국교회사에서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선생과 동지들이 신앙적 활력을 잃은 한국교회를 향해 왜 ‘무교회주의’를 주장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더구나 오늘의 한국교회의 상황과 관련시켜 볼 때, 선생과 동지들이 던진 물음은 지금도 한국교회를 향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이 내세운 ‘성서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로,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고, 따라서 불가피하게 개혁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과 ‘무교회주의자들’이 꿈꾼 조선교회상은 성서에 입각한 더 ‘순수한’ 교회였다.

선생은 또 ‘서구적’ 기독교를 통해서 전파된 것이 아닌, 성서를 통해 직접 한국에 유입된 기독교, 그렇게 해서 한국적인 문화 토양에서 자라 열매를 맺는 ‘조선산(朝鮮産)’ 기독교를 주장했다. 그것은 구미를 통해 유입된 때 묻은 기독교가 아니라, 성서에 기반하여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뿌리내리고 열매 맺는 기독교회를 의미했다. 선생의 이 같은 시도가 ‘조선산’ 기독교를 배태하기 위한 꿈이었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복음을 수용한 지 130년을 넘겼는데도 아직도 한국교회는 자기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한국교회는 자기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육화(肉化)시킨 자기신학을 갖고 있지 못하고, 번역신학, 수입신학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수입신학, 번역신학으로 자기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결과, 한국교회는 구미식의 시장화한 교회로, 또 바알과 아세라의 전당과 같은 교회로 변모되고 있다. 선생과 동지들이 꿈꾸었던 ‘조선산’ 기독교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구미에 유학하는 이들이 그쪽 학계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한국적인’ 교회를 소개해 달라는 것이다. 그때 내세우는 인물이 김교신이요, 함석헌이다. 그리고 그 자료는 『성서조선』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선생은 아직도 우리 신학계, 신앙계에 조언자, 개혁자로 새로이 재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선생의 이름을 내세워 기념사업회를 갖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 글은 이만열 교수님의 페이스북(facebook.com/mahnyol)에도 게재됐습니다.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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