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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좌파'에게서 '선한 사마리아인'을 보다[서평] 이덕주 교수의「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은 결코 빨간색이 아니다

 

1.

현실과 동떨어진 신학은 공허하다. 민족 분단과 통일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교회가 당면한 현실, 민족 분단과 통일에 대한 신학적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함께 6.25를 경험한 절대 다수의 한국교회는 반공주의에 기초한 국가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을 놓치고 만 경향이 있다. 도리어 남북 간 이념과 체제의 갈등 상황에서 분단을 고착하는데 일조한 부분도 있다.

홍성사가 마련한, “저자와의 만남”에 가서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이덕주, 홍성사)을 사게 되었다. 나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너무 큰 현실에서 ‘사회주의’라는 단어 때문에 생전 가지 않던 "저자와의 만남" 이라는 것에 갔다. 이 책은 결코 빨간색이 아니다. 그야말로 복음적이다.


   
▲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이덕주 지음, 홍성사 펴냄.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책 제목으로 들어갔다는 이유로 저자는 “‘자살행위’를 하는가?”라는 염려의 말들을 들었다고 한다. 홍성사에서도 제목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단다. 결국, 통일을 준비하는 신학이 아니라 통일 후를 준비하는 신학이 필요한 시대인데 아무런 준비도 없는 지금, 색깔에 대한 RED 콤플렉스와 사회주의라는 단어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제목에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그대로 살리기로 했다고 한다.

들어야 하고, 들음으로써 나를 들켜버리는 말씀듣기 대신, 우리가 원하는 식으로 입맛에 맞는 부분읽기와 잘못된 기도 덕택에 놓쳐버린 것을 이제라도 찾아야한다.

이덕주(감리교 신학대학교 연사신학 교수, 한반도 평화통일신학연구소 소장)는 거역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통일을 앞에 두고 통일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통일 이후 신학을 준비할 때라고 강조하며 ‘기독교사회주의’를 말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창조적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함으로 인권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장점, 그리고 인간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소득격차와 경제적 불균형을 제도적 분배구조를 통해 평등을 추구하려는 사회주의의 장점을 서로 조화시켜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제 3의 이념과 체제를 모색하려 한다.



2.

저자에 따르면, 기독교사회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전개했던 사회주의와는 별개의 사회주의 운동이기도 했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기독교 정체성을 기본 바탕으로 하면서도 다른 사회주의 운동과 대화와 협력을 모색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서구 기독교 역사와 신학 전통에서 주류 신학의 지위는 확보하지 못했지만 개인적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신학에 맞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진보적 신학으로서, 다양한 명칭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역사적 맥을 이어왔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사마리아 신학’, ‘가교 신학’, ‘장터 신학’이라 부를 수 있다. 서로 다른 배경과 성향을 지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대화와 교류를 통한 조화와 협력을 추구한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비무장 신학’으로서 60년 넘게 자본주의만 경험한 남쪽과 사회주의만 경험한 북쪽 사이에서 양쪽 모두와 ‘연결되면서도 구분되는’ 제 3의 영역을 구축하고 평화와 공존의 공간을 넓혀감으로 한반도를 감싸고 있는 갈등과 분열, 불신과 증오, 죽음과 폭력의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화해와 일치, 공존과 협력, 치유와 생명의 역사를 창조하는 ‘영의 생기’가 되어 한반도 평화를 원하는 모든 이들의 호흡이 되기를 기대한다.

자본주의적 기독교에 비교하여 ‘사회주의적 기독교’라고 불러도 좋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자기보다 남을 배려하는 기독교,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독교, 모으는 것보다 ‘나누는 것’에 우선 가치를 두는 기독교를 지향한다.



3.

마태복음 25장의 세 가지 천국 비유인 열 처녀 비유(25:1-13), 달란트 비유(14-30), 양과 염소의 비유(31-46)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를 알려준다. 낮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게으른) 사람이 받을 저주, 생산적 경제 활동에 대한 주인의 칭찬과 주인의 의도를 잘 못 알고 맡긴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게으르고 악한 종의 게으름에 대한 책망은 자본주의가 악으로 규정하는 ‘게으름’에 대한 경고다. 하나님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용인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권력이나 재물의 유무가 아니라 베풂과 나눔의 유무로 양과 염소의 운명을 가르신다.

여기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가 가능해진다. “부지런히 일해서 얻은 재물, 어려운 이웃과 나누며 살자.”, “벌기는 자본주의식으로 하고, 쓰기는 사회주의식으로 하자”
여기서 말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는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천민’ 자본주의나 폭력적인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다.

웨슬리의 3대 경제 원리가 이를 반영해준다. (설교-“재물 사용법” / 본문-누가복음 16장 9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원리 1, “할 수 있는 대로 벌어라”는 정직한 기업 활동을 전제로. 근면과 정직을 바탕으로 한 생산과 소득활동, 정직하고 성실한 자본주의를 지지한다.
원리 2, “할 수 있는 대로 아끼라”는 술과 음식뿐 아니라 ‘고상한 쾌락주의’를 경계한다. 기독교인이 사치와 향락을 멀리한,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 것을 권고한다.
원리 3, “할 수 있는 대로 주어라”는 모든 것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고 어떤 개인의 소유도, 그가 즐기는 그 모든 것도 하나님의 것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판단하셨다. 입보다는 실천하는 손을 보신다. 야고보는 교회에서의 빈부차별에 대하여 행함 없는 죽은 믿음을 경고한다.

새 하늘과 새 땅, 그 안에서 세워질 새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일은 ‘눈물 닦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들린다.



   
▲ 이덕주 교수는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존경받는 손정도 목사의 생애를 추적하기도 했다. 북경과 상해, 길림 등 손정도 목사의 자취를 찾아가는 긴 여정이 CBS를 통해 방영됐다. 사진은 이덕주 교수.


4.

“그렇다면 우리 청년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와의 만남에 온 젊은이들이 물었다. 이덕주 교수는 “그저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도전에 따라 작은 것부터 하라”고 답했다.

그의 대답에 '저자와의 대화' 참석자들 중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함께 간 딸의 남자 친구역시 차를 마시며 실망했다고 했다. 기껏 좋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겨우 "작은 것부터, 개인의 도전을 따라 하라"고 한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덕주 교수의 생각에 절대 동의한다. 하나님과 만남의 사건을 가지면서 이루어지는 점진적이고 내면적인 개인의 변화 없이 너무 성급하게 공동체의 과제를 강조할 때에 공동체도, 공동체가 추구하는 과제도 누각 위에 세워지게 된다.

오늘 한국교회가 가진 문제의 핵심은 성도들의 지속적이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숙을 무시하고, 전도와 교회 봉사라는 획일적인 과제를 강조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이고 지속적으로 찾아지는 개인의 독특한 영적 과제를 개발할 수 없도록 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느려진다 하더라도 개인의 점진적이고 내면화되어 체질이 바뀌는 변화 위에 하나님나라는 서게 된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과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진정성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고 창조적인 과제들을 발견하고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딸의 남자친구도 수긍하는 듯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모든 비유가 겨자씨의 비유와도 상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불특정한 어떤 한 사람이 자기의 영역에서 작게라도 씨를 심으면 결국은 씨가 자라고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되는 것이다.
 

5.

원수지간에 쌓인 불신과 증오를 녹일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다. 이덕주 교수는 그 특성상 ‘강남좌파’에게서 ‘선한 사마리아인’을 기대해본다.

강남 좌파는 서울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등 소위 ‘강남 부자’ 동네에 사는 고학력, 고소득층으로 1970-80년대 민주화 투쟁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승자독점’의 신자유주의 및 보수 우익적 이념과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양극화 방지’, ‘인권과 평등’과 같은 사회주의 가치를 사회에서 구현하려는 진보적 지식인과 전문적 종사자들을 지칭한다.(<한국일보>,2011.2.26)

‘강남좌파’의 실체와 성격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덕주 교수는 이런 ‘강남 좌파’들이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사회 빈곤층과 소외 계층을 위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한다면 넓은 의미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범주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마리아인의 ‘지정학적 위치’는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의 갈릴리와 유대, 선교 구도에서 보면 유대와 땅 끝 사이의 중간 지대이다.

‘강남 좌파’들이 양쪽과 모두에게 통하기에 성격과 경향이 서로 다른 양쪽을 중재하고 만나도록 주선할 수 있을까! 이런 강남 좌파,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많이 나와서 한국 사회 안의 빈부 격차로 인한 계층적 갈등을 해소하고 나아가 남북 사이에 화해와 평화 정착에 도움이 될 가능성을 본다.


조희선(목사,「물근원을맑게」편집장)
 

조희선  heesun8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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