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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북한이 공존과 상생을 시도한다면

우리 근대사에 있어 두 가지 신사조는 기독교와 맑시즘이었다. 물론 동학도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 종교였지만 동학의 교세는 이후 급격히 쇠락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파송으로 대표되는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정책은 한국 기독교 초기 역사에 있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기독교는 3·1운동 당시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만일 1931년 김일성이 유격대원으로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맑시즘과 기독교는 한국 근대사의 개척사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한국 분단사의 주역은 이승만과 김일성이다. 이승만은 당시 정동감리교회에 다니던 탁월한 정세분석가이자 기독교 성도였다. 그는 이미 일제시대 때부터 한국 기독교의 조직원리에 관한 책을 집필하는 등 기독교계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김일성은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론)로 무장된 자로 해방 직후 북한의 실세 공산주의자였다. 북한의 정권을 인계받을 당시에도 혁명사상은 퇴조기가 아니었다. 김일성은 북조선 공산당 조직을 장악했고, 이후 소련 군정 하에서 북한을 이끌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북한 내 기독교도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황해도 신천에서 충돌한다. ‘신천반공학살사건’, ‘신천양민학살사건’ 등으로 이름 붙여진 이 사건의 해석은 지금도 남북한 간의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 분단은 이런 복잡한 남한과 북한의 정세가 일거에 한반도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대사건이었다. 결국 한국 기독교계 핵심 인사들은 전부 남한으로 모이고, 공산주의자들은 전부 북한에 모이는 갈등의 양상이 한반도에 나타나게 된다. 6·25 한국전쟁은 분단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고, 공산주의와 기독교 두 세력은 이후 계속 상대를 비난하면서 분단체제를 완성시켰다.

분단체제는 상대를 한없이 미워하는 체제이다. 이 미움의 근원은 한국전쟁 때 생과 사를 갈랐던 치열한 경험에 기인한다. 지금도 남북한 주민들은 상대를 공격하는 발언들을 쉴 새 없이 구사하고 있다. ‘비판의 자유’는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지금 북한에도 교회는 있다. 김일성의 성장과정 또한 기독교가 큰 영향을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일성의 부 김형직과 모 강반석, 그리고 부모를 여읜 김일성에게 도움을 줬던 손정도 목사의 손길, 기독교학교인 창덕학교, 안창호, 안신호 등이 그러하다. 더욱이 김일성의 외가 출신 강양욱은 이후 북한 기독교의 계승자가 되기도 한다.

   
 

이제 우리 남한사회의 기독교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북한 기독교와 대화하고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유럽과 이스라엘 정치의 경우에도 기독교 세력과 사회주의 정당은 상호 공존하고 있고, 두 정당의 정책 또한 경쟁적으로 운용이 되고 있다. 북한사회 또한 스스로가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들의 사회주의 사상은 필연 사회민주주의일 수밖에 없게 된다.

최근 우리 사회 과제로 양극화 해소를 들곤 한다. 이러한 해법은 기독교가 보수파를 구성하고, 사회민주주의가 진보파를 구성하는 이상적인 조합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22세기 신(新)사상으로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필요와 가치가 있다. 이는 민주적 시장경제와 사회민주주의가 공존할 수 있는 상생의 체제이다. 애초부터 두 사상은 상호 공존할 수 있는 근대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김광식/ 21세기한국연구소 소장

김광식  kori2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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