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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삶의 주인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학기 초 강의를 시작하며 “마음이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주문하곤 하였다. 20여 년 전 처음 묻기 시작할 때는 손을 드는 학생이 반 정도 되었지만 그 숫자가 급속도로 줄어들어 요즈음은 손을 드는 학생이 거의 없다. 100명에 1명 정도가 손을 드는 상황이 되었다. 1%는 전체에 비하여 극소수이니 마음의 문제를 생각하고 마음을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은 학생 사회의 왕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주인인가”라고 물으면 “상황이 주인이다” “몸이 주인이다” 또는 “무엇이 주인인지 모른다”고 대답한다. 더욱 심각하게는 “돈이 주인이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하기도 한다. 학생들만 이와 같을까.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들과 그들은 낳아 기르는 부모의 생각은 어떨까. 이 사회를 이끌고 가는 정치인들이나 종교계 인사들의 생각은 어떠할까.

평가 만능 사회는 독창적·창의적 삶을 무너뜨려
우리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마음을 믿을 수 없으면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게 된다. 마음을 믿을 수 없게 되면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면 다른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다.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객관적 평가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된다. 인간을 믿지 못하는데 객관적 평가는 믿을 수 있는가. 인간 그 자체를 믿지 못하는데 객관적 평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객관적 평가만을 중시하게 되면 평가에 모든 것을 맞추기 위한 요령을 갖춘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가 되기 쉽다. 그러면 원칙을 지키며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삶을 계획하는 사람보다 기회를 봐가며 적당하게 요령을 피우는 사람들이 성공할 확률이 더 높아지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평가 자체를 믿지 못하게 된다. 평가 자체를 못 믿게 되면 가깝고 친한 사람을 쓰고 보자는 부정적이고 편협한 인간관계가 일반적 사회관계로 변하고 만다. 사람들은 사태에 대한 깊고 정확한 인식에 기초하여 사태를 처리하는 올바른 실천능력을 갖춘 사람보다 자기에게 가깝고 자기 말을 잘 듣는 사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게 된다. 어떤 사회에서나 평가는 없을 수 없지만 평가 만능의 사회는 개인의 독창적이고 창의적 삶을 무너뜨리게 된다. 과거의 양심적인 학자들이 과거의 폐단을 끊임없이 지적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머리로 생각한다고 해서 머리만 좋으면 된다고 한다. 머리로 생각한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닌 듯하지만 정확한 말은 아니다. 마음이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이 머리로 판단한다. 『대학』에서는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라고 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눈과 귀로 바깥 사물을 보는 데 익숙해져서 안을 들여다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과학적 자연인식의 방법이 극도로 정미하게 되면서 이와 같은 경향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손발이 있고 머리가 있다고 해서 저절로 손발이 움직이고 저절로 머리가 움직이지는 않는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크게 병이 난 사람이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손발이 움직이고 마음이 원하는 데 따라서 머리가 움직여 생각하게 된다. 마음이 원하지 않는 것을 손발로 하려고 하고 마음이 원하지 않는 것을 머리에서 생각하려고 하면 손발과 머리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마음이 원하는 일을 하면 손발이 쉽게 움직이고 머리가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판단하며 마음으로 얻은 답에 따라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뜻을 세운 사람이라고 하며 옛날 선인들은 학문에서 뜻을 세우는 것, 즉 '입지(立志)'를 가장 중시하였다.

진실한 마음으로 정답을 찾는 사회를 이루어야
라디오가 귀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신문을 매우 자세히 읽으셨는데 특히 일단으로 된 짧은 기사를 더욱 꼼꼼하게 읽으셨다. 어린 마음에 의심스런 생각이 들어 그 이유를 물었다. “왜 그렇게 작은 기사에 관심을 가지세요?” 큰 기사는 정부의 거짓된 명령과 선전이 주를 이루고 짧은 기사에서 사명감을 가진 의로운 기자들이 전달하는 사태의 진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우리나라는 오랜 봉건주의 시대를 거치며 절대왕권을 거스르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왕은 곧 성인이고 그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역적이라는 지목을 받으면 어느 누구의 목숨도 안전하지 않았다. 일제 시대는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애국적 집단과 인물은 탄압과 감시의 대상이었고 그들은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해방 이후에는 남북이 분단되고 냉전시대를 거치며 남과 북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없으니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말을 할 수 없으니 애매하게 말해서 자신과 뜻이 통하는 사람만 알아듣게 은밀하게 말한다.

진실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오랜 기간 동안 우리의 역사적 현실이었다. 정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알아도 숨기거나 은밀하게 말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가 되고 우리의 습관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습관을 언제까지 계속 이어나갈 것인가. 이제는 우리도 진실한 마음으로 정답을 찾는 사회를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이광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이 글은 유코리아뉴스와 (사)다산연구소의 협의에 따라 게재하는 것으로 글에 대한 저작권은 (사)다산연구소에 있습니다.

이광호  kwangtiger@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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