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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투성이인 내가 이곳저곳 갈라진 모순을 어떻게 이을 것인가?[압록강, 그 푸른 물을 따라] 세 번째 이야기

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이 일상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마땅히 그런 것이 맞는데, 눈으로 본 그들의 일상이 너무나 고요하고 평온해보여 나는 사실 흠칫 놀랐다. 그래, 그들도 삶을 사는구나, 주어진 곳에서 어떻게든 그들의 삶을 일구고 씨름하여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구나. 우리와 같은 이들, 지극히 같고도 같은 이들이 그곳에, 그러한 이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그곳에 그렇게 있었다.

   
▲조선으로부터 들려온 물질하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여전히 가슴에 울려오던 그날, 우리는 숙소까지 거의 10시간 정도를 차로 이동했다. ⓒYKD

망천아(望天鵝)까지 가는 길은 꽤나 멀었다. 아마도 이날 우리는 전체 여정 중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차에 머물렀지 싶다. 비가 내려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던 탓도 있었겠고, 중간 중간 내려 압록강변의 풍광을 눈에 담는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인 듯도 하다. 조선으로부터 들려온 물질하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여전히 가슴에 울려오던 그날, 우리는 숙소까지 거의 10시간 정도를 차로 이동했다.
 
함께 부를 노래
 
우리는 늘 6명씩 두 대의 밴에 나누어 타고 이동했다. 함께 차를 타는 멤버도 매일 아침마다 제비를 뽑아 결정했다. 중국에서는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로 이동할 때 무전기를 통하여 서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는데, 처음에는 가이드형님의 안내와 지시를 받기 위해 사용했던 이 무전기가 이동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들의 이야기와 노래를 이어주는 역할도 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우리들 하나가 되게 하소서
동과 서, 남과 북
주 안에 하나 되어
주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 고형원 사/곡, <하나 되게 하소서>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의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맑은 샘 줄기 용솟아 거칠은 땅에 흘러 적실 때
기름 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 김재준/문익환 사, 이동훈 곡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우리는 이 노래를 차 안에서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모른다. 부르고 또 불렀다. 무전기를 통해 한 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같이 타고 있던 이들이 함께 따라 불렀고, 뒤 이어 다른 차 안에서 받아 또 다른 노래를 부르곤 했다. 주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 아, 그 얼마나 우리를 가슴 뛰게 하는 말인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서로의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압록강, 그리고 저곳 조선을 바라봤다. 주님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짙은 어둠에 가려진 지나간 역사 속 이야기들이, 빛으로 일어나는 이들을 통하여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새로이 기록될 날을 꿈꿨다. 땀 흘려 일한 자들이 땅의 정직함을 따라 열매를 얻고, 그 열매를 이 땅의 만민이, 남과 북이, 아니 조선이 함께 나누어 먹으며 하나를 이루어갈 그 나라를 꿈꿨다. 그리고 성실과 진실로, 공의와 정의로 그 씨앗을 뿌릴 일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꿈꾸며 우리는 계속해서 노래했다. 비 때문에 불어난 압록강처럼, 우리의 마음도 소망도 그렇게 자연스레 더욱 부풀어져만 갔다.
 
나눈 술 한 잔 속에서
 

10시간여를 달려 우리는 드디어 망천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한 조선족 가정의 집에서 민박을 했다. 산기슭 어딘가에 위치한 마을은 마치 시골 우리네 할머니들이 살던 동네 같았다.

   
▲망천아 조선족 민박마을 ⓒYKD

오랜 시간을 달려온 우리를 대접해주신다고 주인 어르신께서는 거한 저녁 식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한 상에 둘러앉아 우리는 곤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음식을 함께 나눴다. 사실 가장 피곤했을 사람은 오랜 시간 운전하셨던 두 분의 중국인 기사 아저씨들이었는데, 이분들은 시종일관 우리를 챙겨주시고, 이동 중 우리가 힘들지 않을까, 위험하지 않을까를 염려하시며 진심 배려해주셨다. 함께 둘러앉은 식탁은 그 어느 때보다 귀하고 감사했다. 그렇게 식사를 하던 중, 우리는 뜻밖에 술을 한 잔씩 나누어마시게 되었는데, 기사 아저씨들께서 함께 앉은 우리들에게 단둥에서부터 가져온 귀한 술을 차에서 꺼내며 나누어 마시자고 따라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레 한 잔씩의 술을 나누어마셨다.

꽤 독하고 매웠던 이 단둥주(酒)는, 그러나 우리를 어렵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오는 날 산기슭이라 추웠을 몸을, 그리고 오랜 시간 이동하며 지치고 고단했을 우리의 몸을 녹여주기에 충분하고도 고마운 술이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 하나 이 일로 인하여 마음 상해하거나 서로를 비난하지 않았다. 식사 이후에도 형제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규가 ‘엄마’라는 시를 지은 날도 바로 이날 밤이었다. 자매들도 여정 중 처음으로 한 방에 둘러 앉아 고양이 세수한 얼굴을 마주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고, 제대로 씻지 못해 찝찝했을 몸을 맞대어 나란히 하고 다 같이 잠을 청했다.

생각해보면 ‘함께함’이라는 것은 사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닌데, 이렇게 음식을 나누고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때론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며 이렇게 하나가 되어가는 것인데, 너와 나라는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할 수 있음을 그렇게 일상 가운데 자연스레 경험하는 것인데. 모습이 같고 언어가 같은 그들, 우리의 동포들과는 그리 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이며 부자연스러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4년 5월 8일 목요일, 여행 넷째 날.
 

여행 넷째 날 아침이 밝았다. 어제 종일 내린 비로 한껏 맑아진 공기를 마시며 우리는 산기슭의 마을에서 새 하루를 맞았다. 일찍 일어났던 이들은 여느 때처럼 아침 산책을 다녀왔고, 동네 길목에서 우연히 만난 조선족 아주머니와 나눈 대화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창조세계,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오늘 반나절은 우리들끼리의 시간을 가졌다. 가이드형님은 우리를 근처 ‘망천아협곡’이라는 곳에 내려주시며, 자유로이 산책하고 시간을 보내며 대자연을 누리다 오라 하셨다. 모여야 할 약속시간을 정해주긴 했지만, 혹 그보다 더 누리고 싶다면 늦게 돌아와도 좋다고 했다.

차에서 내려 우리는 대륙의 대자연 속에서 그렇게 반나절의 시간을 누렸다.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몸째 맞아가며, 우리는 정말 ‘자연(自然)’을 누렸다. 저기 한 켠에 피어있는 꽃들을 보며, 계곡물이 얼어붙어 거대한 얼음산을 이룬 것을 보며 우리는 감탄했다. 누군가는 “대륙의 스케일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며 연신 소리쳤다. 우리는 이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몸과 맘으로 한껏 누리고 느끼고 고백했다. 비가 와 자연스레 젖어든 땅과 흐르는 계곡물, 이곳저곳 남아있는 겨울의 흔적 속에 스며든 봄의 기운들. 자연,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우리는, 새삼 우리 각자가 피조물 된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또한 자연스레 고백하게 되었다.

   
▲망천아 협곡에 핀 꽃 ⓒYKD

‘자연스러움’은 그렇게 우리 모두를 또 다시 자연스럽게 한다 싶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도 이토록 자연스러운데,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우리들도 자연스레 나 자신이 한낮 작은 피조물임을 고백하게 되는 이 신비 또한 참으로 자연스럽구나 싶고 말이다. 결국 피조물은 본디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을 터인데, 이 세상의 부조리와 부자연스러움은 또 얼마나 우리 인간들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는가 생각한다. 나뉜 땅과 나뉜 이념, 나뉜 사상과 나뉜 체제. 이것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 더불어 살도록 창조된 이 자연스러움을 얼마나 부자연스럽게 나누고 파괴하고 왜곡하였는지. 누리는 자유 속에서 또 다시 누군가는 누리지 못하는 이 자유가 새삼 소중하고도 미안하게 여겨졌다.
 
‘이봐요, 나 여기 있소’
 
우리는 다시 수 시간을 달려 다른 마을로 향했다. 장백현(長白縣), 이곳 맞은편에서 보이는 조선은 혜산시(惠山市)라는 곳이다. 여기 도착했을 때 사실 우리 모두는 할 말을 많이 잃었다. 그것은 어느 때보다도 더 철저한 주의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이곳에서는 소리를 내어 그곳의 사람들을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는 일, 아니 사진기를 들고 길을 나서는 것조차도, 손을 들어 그곳을 가리키는 것조차도 매우 엄격하게 삼가야만 했다), 사실은 그보다 더 우리의 할 말을 잃게 만든 건,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정말 말도 안 되게 가까운 조선의 마을 모습이었다.

혜산은 지금껏 이동하며 보아온 조선의 마을과는 사뭇 달랐다. 고즈넉하고 아담한 마을이 아니라, 우리네 전형적인 작은 도시들처럼 크고 작은 건물이 솟아 있고, 바삐 움직이는 이들이나 오가는 자동차도 많은, 곳곳에 기차역도 눈에 띄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같은 보폭의 걸음을 걷고 있었다. 이곳과 저곳 사이 흐르는 압록강은 어느새 폭이 불과 50미터도 되지 않을 만큼 좁아졌다. 이곳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그들이, 조선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저 밑으로 뛰어 내려가 강을 건너 “이보오, 물 한잔만 주시오.” 할 수 있을 만큼, 배가 고프면 뛰어가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 그곳이 조선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몹시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 여겨질 정도로 이곳과 저곳은 가까웠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가까운 거리를 사이에 두고도 역시나 아무 말도 그들에게 건넬 수 없었다. 건너편 곳곳에 세워진 초소 안 군인들은 시종일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게 되면 즉시 이곳 중국의 공안(公安)에게 보고되어 우리 팀 전체가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 모두는 분명 마음으로 수십 번 우리와 같은 걸음으로 걷고 있던 그곳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을 거다. ‘이봐요, 나 여기 있소.’ 그러나 비단 우리뿐이었을까. 그들 중 누군가도 그러지 않았을까. 눈을 돌려,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볼 수도 없었던 그들 중 누군가, 그러나 우리가 곁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그들을, 그 땅을, 우리의 동포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그들 중 누군가도 분명 마음을 다해,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쳤을 거다.
‘이보오, 나 또한 여기 있소.’
 
2014년 5월 9일 금요일, 여행 다섯째 날.
 
장백현에서 머무는 동안 우리는 조선 마을을 따라 압록강변을 여러 번 걸었다. 강 건너 보이는 혜산시는 굉장히 크고 넓었는데, 사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 저쪽 너머 산 뒤편으로도 마을이 더 크게 조성되어 있다 했다. 혜산시를 따라 흐르는 압록강처럼 우리는 저녁에도 걸었던 이 강변길을,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도 걷고 또 걸었다.
 
그곳 일상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차를 타고 근처 ‘탑산공원’이란 곳에 올랐다. 장백현에서 가장 높은 지대로 저 멀리 혜산시의 모습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라 했다. 공원에 오르니 정말 압록강 너머 조선 땅 혜산시가 눈앞에 크게 펼쳐져 있었다. 거주지 근처에서 걷던 길보다 이곳에서는 좀 더 자유로이 그곳을 바라볼 수 있어서 우리는 가져간 망원경을 총동원하여 마을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한참을 살피다 우리는 높이 솟은 돌바위 위에 삼삼오오 앉아 한참동안 말없이 그곳을 바라봤다. 이제 하루 남은 이 여행의 시간 동안 우리는 마음을 다해 그곳을 가슴에 새겼다. 누군가는 홀로 앉아 오랜 시간 말없이 기도했고, 누군가는 가까이 곁으로 걸어온 조선족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 한참 앉았다가 홀로 걷고 파 공원 저쪽 마을의 인가가 더 잘 보일 것 같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넓은 전망대 같은 곳이 보여 그곳에 팔을 괴고 한참동안 망원경을 통해 저 너머 마을을, 사람들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처음 단둥에 도착해 압록강 너머 그곳을 볼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또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일상. 집 앞에 길게 널려 있는 빨래들, 뛰어노는 아이들, 동네 한 가운데 있던 백화점, 강변에 앉아 운동회를 하는 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공원에 오르니 정말 압록강 너머 조선 땅 혜산시가 눈앞에 크게 펼쳐져 있었다. ⓒYKD

   
▲마침 넓은 전망대 같은 곳이 보여 그곳에 팔을 괴고 한참동안 망원경을 통해 저 너머 마을을, 사람들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YKD

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이 일상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마땅히 그런 것이 맞는데, 눈으로 본 그들의 일상이 너무나 고요하고 평온해보여 나는 사실 흠칫 놀랐다. 그래, 그들도 삶을 사는구나, 주어진 곳에서 어떻게든 그들의 삶을 일구고 씨름하여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구나. 우리와 같은 이들, 지극히 같고도 같은 이들이 그곳에, 그러한 이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그곳에 그렇게 있었다.
 
장백현을 떠나 마지막으로 우리가 머물 곳은 송강하(松江河)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압록강변을 따라 난 마을은 아니었지만, 일정 중 꼭 머물러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송강하로 가는 길에 사실 우리는 백두산 천지를 보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 며칠 엄청 내렸던 비가 백두산에는 눈으로 쌓여 도저히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크게 아쉬워했다. 특별히 우리 중 유일한 장년(長年)이셨던 원장님은 이 사실에 너무 아쉬워 송강하까지 오는 길목에서 연신 눈을 부릅떠 백두산 능선이 보이는지 살피셨고, 그 덕에 결국 우리는 저 멀리 희미하게나마 자신을 드러낸 백두산과 마주할 수 있었다.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 소망들.
 
송강하에 도착하여 우리는 작은 호스텔 같은 곳에서 하루를 머물기로 했다. 조선족 아주머니가 운영하시는 숙소는 좁고 허름했지만, 그 아주머니 덕에 정말 포근하고 편안했다. 무엇보다 아주머니는 이튿날 우리가 공항으로 가기 위해 새벽 일찍 출발한다는 것을 아시고는 그보다 한 시간 빨리 우리가 식사할 수 있도록(무려 새벽 4시 반에) 우리들만을 위한 식탁을 차려주셨다. 그 식사는 정말 맛있었다. 중국에서 먹었던 이 마지막 식사는 집에서 엄마가 차려주셨던 집 밥과 같았다. 따뜻한 밥, 계란후라이, 나물무침, 된장국, 두부부침, 김치 등, 정성스레 한국식으로 차려주신 아침상은 그간 낯설어 조금은 힘들었을 우리의 속까지 편안하게 달래주셨다.

생각하여보면 우리는 곳곳에서 이렇게 따뜻한 이들을 늘 그렇게 만났던 것 같다.
비가 많이 왔던 날 차 안에서 추위에 고생하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던 식당에서 우리는 아랫목처럼 뜨끈한 방에 들어가 추위를 녹이며 식사를 기다리라는 식당 주인의 배려로 그곳에 옹기종기 모여 쪽잠을 자기도, 젖은 옷을 말리기도 했다. 매일 우리와 함께 했던 기사 아저씨 중 한 분이 사실 중간에 가족일로 급히 교체되기도 했는데, 그 다음날 우리가 식사하는 식당에 그분이 직접 찾아와 우리 팀원 중 희선이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 그림에 고맙다며 그리고 함께 할 수 없어 미안하다며 인사를 건네주시기도 했다. 송강하에서 저녁시간 팀별로 돌아다닐 때 골목 어귀에서 만났던 교복을 입은 꼬마아이들은 통하지 않는 우리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며 최선을 다해 길을 안내해주었고, 백두산 잣을 사려고 갔던 상점에서는 내가 실수로 개똥을 밟고 돌아다니는 통에 가게를 고약한 냄새와 함께 더럽혔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몸을 숙여 바닥을 손수 닦으시고 내 신발까지 깨끗하게 닦아주셨던 아저씨를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날 우리가 찾아갔던 식당에서 만났던 조선족 김씨 아주머니는 우리를 위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차려주시고 우리가 건네는 질문과 이야기에 끝까지 웃으며 대화해주셨다. 송강하 숙소에서 만났던 한 아가씨도 우리들의 방에 물 떠다주시며 몸을 숙여 겸손히 우리를 대해주셨고, 망천아 시장에서 아침 식사를 할 때 이미 마감한 그날의 장사를 다시 풀어 우리를 위해 음식을 내어주시는 상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빛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따지지 않고 그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여주고, 그보다 더한 환대와 배려로 낯선 땅에 온 우리를 안아준 이들이다. 우리는 이 여행을 통해 조선을 바라보며 그 땅을 향한 새로운 소망과 아련함을 가슴에 새기기도 했지만, 곳곳마다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가는 빛과 같은 이들을 만나며 세상의 어둠속에서도 끝내 꺼지지 않고 영롱히 빛나는 소망들이 있음을, 그리고 그 소망이 곧 이와 같은 ‘사람’임을 새삼스레 깨닫고 배우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그리고 새기다.
 
떠나기 전날 밤, 우리는 여정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 같이 한데 모여 그간 느꼈던 마음과 생각들을 짧게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좁은 방에 놓인 두 개의 침대에 걸터앉아 한 사람씩 이야기를 풀어냈다. 누군가는 말하길, 전쟁기념관에 걸어놓은 영웅들의 사진을 보며 ‘전쟁 가운데 과연 누구를 영웅이라 말할 수 있는가’ 묻게 되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고백하길 사실 자신은 거창하고 고매한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저 분주하고 무거운 일상에서 떠나고 싶어 왔다 말하며 울기도 했다. 얼마 전 결혼하고 프랑스에서 신혼을 살다가 잠시 귀국한 틈에 이 여정에 함께 했던 한 동생은 사실 임신 중이었음에도 팀에게 자신이 짐이 될까봐 말하지 않고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스스로를 지켜가며 밝고 씩씩하게 견뎌주기도 했다. 그녀는 말하길, 프랑스에서 살며 혹 우연히 라도 조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여행을 통해 본 조선을 기억하며 그 친구에게 “너희 고향은 진달래가 참 이쁘더라, 압록강도, 마을도 정말 아름답더라.”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원장님은 젊은 우리와 다니는 것이 참말 힘드셨을 텐데, 세대 간 있었을 사고의 차이들을 정말 그답게 인내해주셨다. 우리 중 미술을 전공한 한 친구는 곳곳에서 만나는 이들의 얼굴을 정성스레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앞으로 그가 담아내야 할 그림의 이야기들을 어느 정도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순간마다 미소를 머금고 모든 이들을 사랑과 배려로 대해주었던 한 언니자매님은 그가 이미 만나왔던 탈북친구를 여러 번 생각하고 기억하게 되었노라며 서울에 가서 그를 가장 먼저 만나볼 것이라 말했다. 두 형님은 따로 다녀왔던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이가 식사를 나누며 했다던 “주님, 우리가 먹는 이 음식이 우리의 몸을 이롭게 하듯, 우리의 삶도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삶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전해주며 울먹였다. 우리 중엔 농사를 짓고 있는 청년도 있었는데, 그는 그동안 자신의 일생의 절반을 선교를 위해 드리겠다고 다짐했던 것의 구체적 방향을 결정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고백했다.

그리고 나는 이 여정 중에 두 가지 화두가 내게 던져졌다고 고백했다. 그중 하나는 ‘모순’이요, 다른 하나는 ‘이제 나는 어떻게 더욱 살아야하나’하는 것이었다. 갈라진 이곳과 저곳, 그들과 우리 사이에 놓인 이 수많은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전히 모순투성이인 내가, 우리가, 이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향한 한 걸음을 새롭게 내디딜 것인가, 그런 질문이 잔뜩 남았노라고 고백했다.
 
 
2014년 5월 10일 토요일, 여행 마지막 날.
 
그렇게 마지막 밤을 보내고 이튿날 새벽, 우리는 장춘(長春)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까지 가는 몇 시간의 이동 중에도 우리는 자연스레 노래했다. 하나님나라를, 주님의 나라를 정말 많이 노래했다. 이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요, 고백이요, 믿음이며 소망이었다. 중국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그곳과는 사뭇 다른 5월의 따뜻한 공기를 마주대하며, 정말 편안한 승차감의 승합차를 타고 다시 교회로 복귀하며, 아 이제 정말 우리의 일상이구나를 몸으로 실감했다. 별반 다르지 않은 이 일상을 바꾸어 내는 것, 이 일상을 어떻게 살아내느냐 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싶다. 이 여정이 우리에게 무의미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눈에 마음에, 가슴에 새겨진 이 모든 풍경과 소리들, 이 생각들이 천천히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도록 주님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기르시리라 믿는다. 적어도 압록강 그 푸른 물이 마르지 않고 자연스레 흘러가는 그날까지 우리는 그 땅 조선을 기억할 것이다. 너와 나,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땅 조선. 본래 하나였으나 이 말도 안 되는 모순과 부자연스러움이 낳은 이 땅의 현실을 이제 바른 눈으로 보고 말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하고자 애쓰고 또 애쓸 것이다.

   
▲여행을 함께했던 사람들과 단체사진 ⓒYKD

분단은 모순이다. 그러나 쳐다볼 수도, 손짓할 수도, 말 한마디 건넬 수도 없는 이 모순 앞에서 영롱히 빛나는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이 소망임을 이제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망과 소망이 마침내 함께 만나 끌어안고 하나 될 그날, 바로 그 주님의 나라를 꿈꿀 것이다. 그것이 비단 한낮의 꿈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주님이 우리게 포기치 않고 말씀하여주시리라, 그렇게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해주시리라, 나는 그렇게 굳게 믿는다. (끝)

도화영/ 창동염광교회 전도사

도화영  naeumsa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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