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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 이쪽과 저쪽, 이렇게 매한가지이건만[압록강, 그 푸른 물을 따라] 조선의 소리가 들려오다

“동무!”
우리 중 한 형님이 저 아래 압록강 한 가운데서 물질을 하고 있는 이에게 던진 소리였다. 순간 우리는 긴장했다. 그러나 그는 미동하지 않았다.
“동무!”
나도 소리쳤다. 어떤 용기에서였는지, 어떤 마음에서였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그리고 저 마을을 향해 소리쳤다. 들려오는 소리는 메아리로 돌아오는 우리 쪽의 소리뿐이었다.


2014년 5월 6일 화요일, 여행 둘째 날.

중국은 늘 새벽부터 소란했다. 새벽 4시쯤이 되면 이내 밝아지더니 골목 곳곳에 장이 서고 어디서 몰려왔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런 걸 ‘대륙의 아침’이라고 하나? 북적북적 사람냄새 가득한 아침, 우리는 그렇게 단둥에서의 둘째 날을 맞았다.


항미원조(抗美援朝)기념관을 가다

서울에서 가이드형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우리에게 “여행 전, 용산 ‘전쟁기념관’에 꼭 한 번 가볼 것”을 권했었다. 그 이유는 오늘 우리가 가게 될 이곳을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항미원조전쟁기념관”. 오늘 여행의 첫 목적지는 이곳이다. 우리가 ‘6.25전쟁’, 혹은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을 이곳 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중국의 관점에서는 이 전쟁이 곧 ‘항미’(抗美), 미국을 대항하고, ‘원조’(援朝), 조선을 돕기 위해 일어난 전쟁으로 이해된다는 의미였다. 매우 큰 규모의 이 전쟁기념관에 이날은 찾아온 이들도 굉장히 많았다. 기념관 1층 로비로 들어서자 커다란 동상 두 개 - 중국의 마오쩌둥(모택동)과 군인 펑더화이(팽덕회) 동상이 서로 마주한 채 악수를 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비둘기 모양과 함께 ‘평화 만세’(平和萬歲)라는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청동 메달 같은 것도 달려 있었다. 전쟁과 평화. 맞잡은 두 손은 동맹을 약속하고,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지만, 그러나 전쟁 중에 서로의 이익을 따지지 않는 동맹이, 전쟁과 공존하는 평화라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이야기일까.
 

   
▲ 항미원조기념관 1층 로비로 들어서자 커다란 동상 두 개 - 중국의 마오쩌둥(모택동)과 펑더화이 서로 마주한 채 악수를 하고 있었다. ⓒYKD

기념관 안은 중국이 조선을 어떻게 도와 이 전쟁을 치러왔는지, 조선은 중국이라는 나라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배운 역사와는 많이 달랐다. 역사는 결국 각자의 입장으로 해석되고 전승되어 온다는 것이 맞다. 에드워드 카(E. H Carr)의 말대로 역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고, 각자가 살고 있는 사회에 관하여 가진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맞다 싶다. 진실은 '역사적 해석'이라는 옷을 입고 수없이 곡해되고 감춰져 우리 손에 들려져 있다. 해석이 의도한 대로 역사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진실 그대로의 역사를 바로 다시 해석해낼 것인가는 이제 다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겨진 몫이 아닌가 싶다.


그 '엄마'

전시관을 빠져나와 우리는 다음 이동할 곳으로 향했다. 우리의 일정 중 가장 중요했던 일 중 하나는 ‘압록강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했기에 다만 우리에게는 이곳과 저곳 사이를 흐르는 압록강을 따라 저기 저곳 조선을 바라봄이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일이었다. 수 시간을 달려 다음 숙소로 이동할 때마다 우리는 눈이 시릴 정도로 그 강을 바라보았다. 흐르던 그 푸른 물은 사실 지금도 여전히 선명히 눈에 아른거린다. 가이드형님의 계획된 의도(?)였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 자연스레 그렇게 눈에, 가슴에, 기억에 압록강을 담았다. (서울로 돌아와 우리는 여전히 압록강 앞에 선 꿈을 꾼다. 그 강 너머의 풍경을, 조선을 보고 선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며칠 동안 우리는 꿈으로, 상상으로, 대화로 압록강을 다녀온다. 이것에 대하여 우리는 ‘압록강을 그리워해서 생긴 병’ 곧, “압록병에 걸린 듯 하다”라고 말하곤 했다.)

가이드형님께서 오늘은 배를 탄다고 했다. 10인승 모터보트를 타고 중국과 조선 사이를 흐르는 압록강 일부를 따라가 보는 것이었다. 여전히 우리는 주의할 것을 당부받았다. 사진을 찍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손을 흔드는 것을 삼가하라 했다. 요란한 모터소리와 함께 압록강물이 차갑게 튀자 배는 출발했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그 땅 가까이까지 갔다. 걸어다니는 이들, 자전거를 탄 이들, 소와 말들이 보였다. 그러다 저 가까이 강변에서 빨래를 하는 한 여인이 보였다.
 

   
▲ 아마도 그녀는 누군가의 엄마요 아내로 가족들의 옷가지를 들고 나와 시린 손을 참아가며 그렇게 빨래를 했으리라. ⓒYKD

배가 상당히 가까이 갔고 모터소리도 컸기 때문에 그녀는 분명 누군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걸, 자신 주변에 시끄러운 배 한 척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어 우리 쪽을 쳐다보지 않았고 다만 고개를 숙인 채 계속해서 빨래를 할 뿐이었다. 북쪽은 5월인데도 공기가 차갑고 추웠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이 추위에 매일 가져간 옷을 모조리 다 껴입곤 했는데, 압록강 그 물도 그랬다.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 그런데 그녀는 쪼그리고 가만히 앉아 그 물에 손을 담근 채 있는 힘을 다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엄마 
                             - 김성규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부르튼 손
당신의 차가운 손
당신의 한맺힌 손
누굴 때리는 겁니까
당신은 희망이 있습니까?


그날 보았던 이 여인을 생각하며 우리 팀원 중 하나가 이튿날 밤에 지어 읊어준 시다. 배에서 내려 우리는 그녀의 손이 얼마나 시렸을까를 이야기했었다. 아마도 그녀는 누군가의 엄마요 아내로 가족들의 옷가지를 들고 나와 시린 손을 참아가며 그렇게 빨래를 했으리라. 빨래터에 나올 때마다 그녀는 압록강 너머의 땅을 바라봤을 거다. 때론 우리처럼 배를 타고 자신을 지나쳐가는 이들도 보았을 거고. 그녀는 ‘자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자신이 사는 땅 너머의 자유를, 자신이 살아가는 삶 너머의 자유를. 부르트고 차가워져버린, 한맺힌 그 손과 가슴을 가진 그들에게 꿈과 희망이 있을까. 우리 팀 성규의 시처럼, 건넬 수조차 없는 이 물음 앞에 순간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이후 우리는 수 시간을 달려 조금 더 압록강 중류 가까이 집안(集安)이라는 곳으로 왔다. 숙소를 잡고 근처 조선식당에서 우리는 잊혀지지 않을 만큼 맛있었던 조선의 감자전을 먹었다.


2014년 5월 7일 수요일, 여행 셋째 날.


같은 비가 내리는 저곳, 조선

여행 중 우리는 거의 매일 아침마다 숙소 주변을 산책했다. 전체 일정이 보통 오전 8시 정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산책을 하기 위해선 그보다 두어 시간 빨리 일어나야 했다. 물론 산책은 압록강가를 따라 걷는 것이었다. 집안 지역의 압록강은 매우 고즈넉했다. 그날 따라 비가 많이 내려서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물안개가 뿌옇게 올라와 강변은 매우 축축했고 덕분에 함께 걷던 우리들도 우산을 쓴 것과 상관없이 머리부터 신발 속까지 한껏 물에 젖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강변을 따라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 강변 너머 저곳 조선은 올라온 물안개 덕에 더욱 한참을 바라봐야만 겨우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한참을 걷다가도 이내 곧 각자 홀로 서 멍하니 그곳을 바라봤다.ⓒYKD

빗줄기가 더 굵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변 너머 저곳 조선은 올라온 물안개 덕에 더욱 한참을 바라봐야만 겨우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한참을 걷다가도 이내 곧 각자 홀로 서 멍하니 그곳을 바라봤다. 내리는 비는 이곳과 저곳이 매한가지인데, 땅도 연결되어 있고, 강으로도 이어져 이곳과 저곳은 결국 매한가지인데, 풀과 나무도 같은 초록을 띄고, 같은 공기와 바람이 머물고 불어오가는 곳인데. 이토록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데 말이다. 무엇이 이곳과 저곳을 이토록 부자연스럽게 나누고 갈라놓았을까. 누가, 무엇이 우리들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압록강에 발을 씻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 우리는 오늘 하루의 긴 여정을 시작했다. 오늘은 림강을 거쳐 망천아로 간다 했다. 조선으로 따지자면 만포 땅을 지나 김정숙군, 김형직군을 따라가는 거였다. 비가 많이 내려 도로사정은 많이 좋지 않았다. 5일 동안 우리와 함께 먹고 자며 이동했던 중국인 운전사 아저씨들의 어깨가 상당히 긴장되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이날 정말 많은 고생을 했다. 비가 와 도로가 유실되어 가로막힌 길에서 돌아가다 밭으로 난 길로 들어섰는데, 이 흙길은 결국 중간에 끊어지는 길이었던 거다. 진흙밭이 된 길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다. 도움을 요청할 곳도 마땅찮았다. 비 내리는 진흙길 한복판에서 결국 우리 팀 모든 형제들 - 기사고 목사고 가이드고 원장님이고 청년들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다 밖으로 나와 차를 밀었다. 옆으로 뒤로 앞으로 밀고 또 밀었다. 자매들은 차안에 중심을 잡고 앉아 있어야 했다. 차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더 잘 밀릴 수 있도록 몸무게를 모아 중심을 잡았다. 다행히도 빠진 바퀴는 한 시간쯤 헛돌다 이내 빠져나왔고 모두의 노력으로 정상적인 도로로 차를 빼낼 수 있었다. 형제들은 모두 진흙과 빗물에 젖어 몰골이 엉망이 되었는데, 약속이나 한 듯 갑자기 저 아래 압록강가로 내려갔다.
 

   
▲ 형제들은 모두 진흙과 빗물에 젖어 몰골이 엉망이 되었는데, 약속이나 한 듯 갑자기 저 아래 압록강가로 내려갔다. 불어난 압록강에서 그들은 손과 발을, 옷과 신발을 씻어냈다.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우리가 여기서 그렇게 압록강에 발을 씻을지. ⓒYKD

불어난 압록강에서 그들은 손과 발을, 옷과 신발을 씻어냈다.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우리가 여기서 그렇게 압록강에 발을 씻을지. 그날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우리 차가 진흙밭에 빠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 일 때문에 우리는 저기 조선에서부터 흘러왔을지 모를 압록강에 손과 발을 씻었다. 그리고 이 일 덕분에 중국인 운전사 아저씨들과도 우리는 친구처럼 더욱 가까워졌다.


림강 저편, 만포에서부터

림강을 지나 망천아로 가는 내내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우리가 달렸던 압록강변의 도로는 뚫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적이 매우 드물었다. 덕분에 우리는 가는 길목 길목 마다에서 여러 번 차를 세워두고 압록강 너머의 조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날 압록강의 풍경은 정말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다는 표현으로 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압록강은, 그리고 강가를 에워싼 산들과 저 너머 조선의 마을들은 우리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여러 번 차를 세워야만 했다.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어도 익숙하지 않을 정도로 압록강의 풍경은 새롭고 신비했다.

그러다 우리는 마치 포구처럼 강 앞쪽으로 땅을 뻗고 있는 조선의 마을 앞에서 차를 세웠다. 물을 한껏 품은 공기가 우리가 서 있는 곳에 가득했다. 저 멀리 검은 지붕을 가진 조선의 집들이 보였다. 단아하고 고즈넉한 동네였다. 밥을 짓고 있는지 집 곳곳엔 연기도 피어올랐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동무!”

우리 중 한 형님이 저 아래 압록강 한 가운데서 물질을 하고 있는 이에게 던진 소리였다. 순간 우리는 긴장했다. 그러나 그는 미동하지 않았다.

“동무!”

나도 소리쳤다. 어떤 용기에서였는지, 어떤 마음에서였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그리고 저 마을을 향해 소리쳤다. 들려오는 소리는 메아리로 돌아오는 우리 쪽의 소리뿐이었다.

“조선에 평화를!”

또 한 형님이 외쳤다. 아마 우리 모두가 소리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허공에 뿌려져 흩어지고 말아버릴 외침이라고 해도, 우리는 우리 가슴의 소리를 그렇게 뱉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내 가이드형님께서 차에 타자고 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르르 우리는 차에 올라앉았다.
 

   
▲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순간 멈칫했다. 아직 차에 오르지 않았던 이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그는 다시 "동무"하고 외쳤고, 이내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YKD

“어이~”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순간 멈칫했다. 아직 차에 오르지 않았던 이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그는 다시 "동무"하고 외쳤고, 이내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가슴이 떨려왔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이토록 가슴 시린 적이 있었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는 조선에서 들려오는, 우리에게 반응해주는 이의 소리를 그렇게 들었다.(계속) 

도화영/ 창동염광교회 전도사

도화영  naeumsa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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