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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난민들과의 만남이 인생을 바꿨죠"이호택·조명숙 부부의 난민 사랑 이야기


“왼손잡이시네요?”
왼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이호택 대표(사단법인 피난처)를 보고 무심코 건넨 말이다.
“오른손으로는 글을 못 써요. 지금도 이렇게 떨리잖아요.”

   
▲ 이호택 대표 ⓒ김승범
자세히 보니 정말로 그의 오른손에 작은 진동이 일고 있었다. 서울대 법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원래 자타가 공인한 명필이고 달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필체가 흐트러지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이름조차 쓰기 힘들었다. 손이 굳어버린 것이다. 아직도 그 이유가 궁금하다는 그는 “손에 땀이 많이 나는 체질에 별로 담대하지 못한 기질이 더해져 필기시험 때마다 많이 긴장한 탓인 것 같다”고 추측할 뿐이다. 10년 이상 사법시험에 낙방하던 그는 결국 법률가로서의 꿈을 접어야 했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져버린 글씨가 ‘패배자’ ‘실패자’라고 말하는 듯했다.


절망 속에서 빠져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열등감의 터널은 생각보다 길었다. 이때 그가 붙든 것은 신앙이었다. 법을 전공하게 된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었고, 지금 모습 그대로 섬길 곳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그가 지녔던 것은 법률에 대한 지식, 인권의식, 선교에 대한 열정, 이 세 가지였다. 이것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어느덧 외국인노동자, 탈북자, 난민들을 돕고 있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본토 아비집’으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저에게 있어 가나안 땅은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외국인노동자, 탈북자, 난민들이 저의 가나안이었습니다.”

좌절의 상처가 아물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되었을 때, 그가 선택한 곳은 낮은 곳이었고 경쟁이 없는 곳이었다.
“모두가 가려고 하는 곳에는 내 자리가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죠. 나는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기로 했고, 그곳에서 저의 사명을 발견했죠.”


낮은 곳으로 향한 미완의 법률가

어깨를 추스르고 그가 처음 발길을 옮긴 곳은 구로공단이었다. 1970년대 말, 그러니까 이 대표가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전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억압당하던 한국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대학생 신분을 속이고 위장취업했던 곳이었다. 법률가가 되어 그들을 돕는 노동운동을 하겠노라며 포부를 심었던 곳이다.

20여년이 지나 다시 찾은 그곳은 한국 노동자들이 떠나고, 외국인노동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상황은 더 심각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 노동자 임금의 2분의 1, 불법체류자라는 명목으로 다시 2분의 1, 노동자가 아닌 연수생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2분의 1, 외국인노동자들의 임금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외국인노동자들은 임금체불, 산업재해, 폭행, 강간, 사기 등 저마다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상담소를 찾아와 긴 행렬을 이루었다.

미완의 법률가가 내린 결단은 그들을 위한 자원활동이었다. 그의 활동은 사실 ‘자원활동’ 이상이었다. 동료 활동가들이 일(?)을 벌이지 말라고 설득할 정도였다. 산재보상을 받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외국인노동자들에게 보상을 해주기 위해 외국으로 그들을 직접 찾아 나섰을 때의 일이다. 중국동포들이 외국인노동자로 한국으로 입국시켜주겠다던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했다면서 찾아온 것이다. 다른 활동가들은 외국인노동자 사건을 다루는 센터에서 ‘중국동포 사기사건’을 처리할 여력이 없다고 반대했지만, 당시 간사였던 이호택 대표는 단호했다.

“내가 법을 전공한 사람으로 이런 일을 안 하면 누가 해? 내가 보기엔 이 문제도 심각한 것 같아.”
결국 그는 떠맡았던 52건의 고소사건을 대부분 해결해주었고, 소식을 듣고 중국 각 지역에서 몰려온 조선족들로부터 1만여 건의 사기피해사건을 더 접수했다.


탈북 난민들과의 만남

북한의 식량난 문제를 가장 먼저 한국에 알린 것도 이호택 대표였다. 1996년 조선족들의 사기피해사건을 접수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한 그는 자연스럽게 탈북한 사람들과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식량난이 전국적으로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탈북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도움이 더 절실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외국인노동자들은 한국에서 불법체류했다고 범죄자로 쫓겨나도 본국에 돌아가면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데, 북한사람들은 쌀 얻으러 왔다가 북송되면 민족반역자로 몰려 정치범수용소에 가잖아요.”
중국에서 붙잡히면 그들은 북한으로 이송되었기 때문에, 베트남 국경을 이용했다. 이때 이호택 대표와 함께 활동하던 부인 조명숙 씨는 베트남 국경수비대를 교란하는 일을 맡았다. 조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 이호택, 조명숙 부부

“미인계(?)를 쓴다고 짧은 치마를 입고 짙은 화장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군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다 숲속으로 뛰기 시작했어요. 어둠 속에서 겁을 잔뜩 먹은 채 낯선 베트남 국경을 뛰고 있자니 계속 미끄러지는 절벽을 뛰어 올라가는 어린시절의 악몽이 떠올랐죠. 5분도 안 되어 붙잡혔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심장과 간이 발밑으로 철렁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녀의 헌신 덕에 탈북자들은 국경을 넘었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고, 조씨는 탈북자를 돕는 일에서 그만 해방되고 싶었다. 자연스레 중국에 가지 않게 되었고, 탈북자들과는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탈북청소년들이 계속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의 교감선생님이다.
북한의 난민들을 접하자, 국내에 돌아와서도 난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외국인이고 외국인노동자들처럼 일하고 있지만, 난민에게는 돌아갈 나라가 없다.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난민(Refugee, Asylum Seeker)이라는 용어는 전쟁이나 박해 등의 위험 때문에 타국에 피난하면서 자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강제적 이주자들을 뜻한다.

“외국인노동자들이 한국에 온 것은 그들의 자발적 선택이었고 자국이 경제적으로 빈궁할지라도 돌아갈 나라가 있잖아요. 하지만 난민은 박해의 공포 때문에 자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1999년 국내 최초의 난민지원단체 ‘피난처’를 설립한 것도 그래서다. 그동안 공부해온 법률지식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했다. 난민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해야 하는데, 난민심사 기간이 평균 2~3년, 길게는 4~5년씩 걸리기 때문이다. 심사기간 동안에는 취업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난민신청자는 합법적으로 생존할 길이 없다.

난민 인정절차는 다른 나라들처럼 길어도 6개월 안에 끝나야 하고, 그 안에 끝내지 못하면 취업을 허용해 자립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게 이 대표의 생각이다.
“난민신청자에게 취업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지요. 하지만 모든 직업이 경쟁적인 것도 아니고, 난민신청자 규모가 15년 누적 3000명에 불과해요. 연간 300~500명 수준인데, 우리 노동시장을 교란시킬 만한 규모가 되지 못합니다.”


난민들이 ‘가나안’이자 ‘안식처’

난민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작업과 그 과정이 오래 걸리다 보니, 난민들과도 오랜 시간 함께한다. 그들을 돕고 있지만 배우는 것들도 참 많다. 이 대표가 그들을 자신의 ‘가나안’이자 ‘안식처’라고 말하는 이유다.

연말에 기증받은 생활용품을 분배할 때였다. 물자는 한정되어 있고, 사람은 많아 고민이었다. 결국 경매에 붙이기로 했다. 돈 대신 ‘왜 그것이 필요한지’를 설명해 박수를 많이 받는 사람에게 낙찰되는 방식이었다. 최고 인기 제품은 황토매트. 경매 참여자들이 몰렸다.

먼저 방글라데시에서 온 니킬이 “나는 총각인데도 요즘 들어 허리가 아프다, 잘 치료해서 장가가려면 이것이 내게 꼭 필요한 것 같다”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더 나이가 많은 노총각 노처녀 난민들이 “아직 멀었다”며 야유를 보냈다.

이어 네팔의 50대 아저씨는 한국말로 “나 늙은 사람이오. 아이고 허리 아파”하며 몸짓을 꾸며내 모두를 웃겼다. 옆에서 위기감을 느낀 아프리카 아저씨는 이에 질세라 “여기 모든 사람들은 황인종이고 나는 흑인입니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와서 한국이 너무 춥습니다. 내게 주세요”라며 우스꽝스럽게 동정을 이끌어 냈다.

결국 황토매트는 아프리카에서 온 여성 난민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나는 허리도 아프고, 나이도 들었고, 아프리카에서 왔어요”라며, 경쟁자들이 내세운 이유들을 모두 갖고 있음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재치에 그날 모인 70여 명의 난민들이 몰표를 보냈다.

이 대표는 “모두가 어려운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격려하고, 다른 문화를 갖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난민들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밝혔다.

이렇듯 난민들과 어울리다 보니, 선교는 자연스럽게 되고 있다. 난민들은 2~3년 넘게 자신의 문제를 붙들고 자기 일처럼 힘써주는 활동가들을 보고 감동받기 시작했다. 활동가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들 중에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개종한 이들도 적지 않다. 난민 인정이 안 된 한 이란 청년은 고난을 무릅쓰고 목사가 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이호택 대표의 목적은 분명하다.

“난민들은 돕는다고 하지만 법적 지원은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믿고, 그들도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돕는 거지요. 난민 인정이 안 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 이호택 조명숙 부부는 그동안의 사역을 담은 책 <여기가 당신의 피난처입니다>(창비 펴냄)를 출간했다. 법학을 전공한 이호택 대표가 난민에 대한 이론적 해설을, 조명숙 씨가 현장의 실감나는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이범진 기자  poemge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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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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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연 2016-09-27 13:55:06

    정말로 아름다운부부네요? *^^***** 특히 조명숙님이 교감선생님으로 재직중인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 대박나기를 저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   삭제

    • hephzibah 2011-12-20 22:30:23

      탈북자를 돕는 일에서 해방되고 싶었을 만큼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난민들이 ‘가나안’이자 ‘안식처’
      라고 고백하는 아름다운 부부 이호택님과 조명숙님을 부러워하며 응원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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