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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마르크스-레닌주의에 눈뜨기 시작하다

나는 인민학교 때에는 공부도 잘하고 언제나 모범 학생이었다.  그런데 중학교로 진급하면서 점차 공부에 취미를 잃고 그저 놀기만 좋아했다. 그런데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크면 군대에 갈 건데 공부는 해서 뭐하겠는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학창시절에 열심히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이 하나 둘씩 없어지곤 했다.  그 선생님들이 일제 때 공부를 많이하고 잘 살던 집안 태생이거나 전쟁 시기 미군과 국군이 들어 왔을 때 그들을 도와 준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북한은 해방 후에나 6.25 이후에 곧바로 친일파나 친미. 친대한민국파들을 없애지 않았다.  당장은 써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자체적으로 사범학교를 통해 교육자들을 키워내면서 그들을 무섭게 처단했던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고등학교인 기술학교에 입학할 때에는 더욱더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같은 학급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기술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떨어진 학생들은 공부도 잘 하고 체육도 잘 했지만, 한마디로 출신성분이 나쁜 학생들이었다.  출신성분이 나쁘다는 것은 출생 당시 부모들이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던 착취계급의 반열에 들어 있던 사람들이나 6.25때 반동단체에 가담하여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말한다. 

  나는 시험을 잘 치르지도 않았는데 합격자 명단 제일 첫 자리에 이름이 올라있었다.  그 다음부터 학교에 떨어진 아이들과 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세상를 배워갔고 세계관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즉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적 세계관에 점차 눈이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당시 나의 출신성분이 나빠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농사꾼이 되었더라면 아마도 지금 대한민국으로 인도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학창시절을 추억해 볼 때, 참으로 안타까웠던 일이 있다.  나는 무조건 '18세가 되면 군대에 간다'는 것 하나만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한천수산기술학교를 졸업할 때 17살이었다.  나이 한살이 부족해서 군대에 못갈 형편에 처한 나는 진로를 다시 고민해야만 했다.  수산사업소에 가서 배를 타던가, 아니면 어머니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짓던가, 그것도 아니면 대학에 가는 길이 있었는데, 배를 타거나 농사짓는 일은 죽어도 싫었고, 대학을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상황이었다.  만일 대학가는 길을 생각해 보았더라면 공부도 착실하게 하고 또 어떤 대학에 갈지 생각이라도 했을 텐데 나는 전혀 그 길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대학에 간다고 해도 북한대학에서는 군인을 뽑지 않기 때문에 나의 꿈이 산산이 부서지게 되는 것이었다.  나이를 한살 더 먹지 못해 속을 태워 본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루는 교무부에서 불러서 가보니 대학을 가야 한다고 했다.  졸업 날짜가 다가오면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생들 가운데 대학에 보낼 사람들을 선발하여 지망한 대학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다가 대학에 가라는 교무부장의 말을 듣고 놀랐다.  그때 나는 지망도, 시험도 치루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교무부장은 더 길게 말할 것 없고 남포에 있는 교원대학에 입학했으니 무조건 가야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한천수산기술학교를 졸업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어머니와 집을 떠나 남포에 있는 교원대학 기숙사에 살며 대학생활을 시작하였다. 

  대학 중에서도 교원대학이 제일 하급대학이어서 대학자체도 마음에 없었고, 대학생이 된 긍지도 가질 수 없었다.  나를 교원대학에 보내게 된 것은 순전히 아버지가 피살되고 형님이 전사했다는, 한국으로 말하면 유공자 가족이라는 출신성분 덕분이었다.  이미 북한 노동당에서는 나를 그때부터 민족 간부로 키워야 할 반열에 세워놓고 관리통제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시험도 안친 사람에게 대학 입학을 허락했던 것이다. 

  영원한 군인이 되려는 꿈은 이제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저 교원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는 길 밖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그러던 중 1968년 1월 23일 미국의 간첩배라고 하는 푸에불로호가 북한군 해군에 의해 동해에서 나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과 북한은 그 사건으로 인해 당장 전쟁을 한다고 야단법석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놈들의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놈들의 보복에는 보복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북한의 모든 정규무력과 민간무력, 전체 인민을 대상으로 전 국가적인 전시동원령을 하달하였다.  그때부터 북한은 대학들에서도 초모(의병이나 군대에 지망하는 사람들을 모집함)를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 기회를 하늘이 준 기회로 생각했다.  누가 생각해도 그럴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대학 당위원회를 찾아가 군대 입대를 탄원했고 그때 비로소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말, 아버지와 형님의 원수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 군대에 꼭 입대시켜 달라고 애원했다. 

  이것이 나의 간략한 학창시절이다.  내가 학창시절에 대해서 몇가지를 기록하는 것은 학창시절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어릴 적에 확정되었던 나의 희망이 실현된 기가막힌 사연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또한 이 사연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써나가면서 앞으로 수도 없이 이런 고백을 더 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나를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오늘 여기까지 인도해주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인도해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잠언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의 말씀처럼 말이다.  <계속>

심주일 목사의 ‘탈북 일기’는 책 ‘멈출 수 없는 소명’(토기장이)에 나온 내용을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요약, 연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심주일 목사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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