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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국방군에 의해 아버지 처형(1)..전사자 가족으로 인정받다

나는 평안남도 평원군 화진리에서 태어났다. 내 고향 화진리는 평양으로부터 4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서해 바다 기슭이라서 농업을 위주로 하지만 과일과 특히 해산물이 풍성하여 ‘작은 평양’이라고 불렸다. 그만큼 살기가 좋았다는 뜻이다. 평양이 가깝기에 상인들이 평양을 오가면서 농산물과 해산물, 과일을 팔면서 나름대로 잘 살던 곳이었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화진리’라고 부르지만 사람들은 보통 ‘한천’이라고 불렀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내 고향은 그야말로 ‘한 많은 한천’이 되었다. 북한의 어느 곳을 가도 그렇지만 내 고향 한천도 사람 살기가 몹시 힘든 곳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해방 전에는 거지로 노숙하다가 딸이 셋인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둘째 딸이었던 어머니와 가정을 이루셨다. 빈농으로 소작살이를 하던 집이었기 때문에 해방 후 북한 노동당의 계층별 계급평가에서 당연히 기본계급으로 인정되었고 따라서 나는 기본계급의 가정에서 출생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무산자로서 해방 후 노동당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며 성인학교에서 문맹을 퇴치한 후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 후 충성심을 인정받아 리 농맹위원장으로 선발되어 간부로 일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1950년 10월 유엔군과 국군이 중공군과 인민군에 의해 밀려 내려갈 때 국군 치안대 조직에 체포돼 처형되고 말았다. 하나밖에 없던 형님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어린 나이에 조선인민군에 입대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소식을 모르는 행불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전쟁 후 우리 가족은 전사자로 인정받아 김일성과 백두산에서 같이 항일을 했다는 가족 다음으로 핵심적인 가족이 되었다.

     
 

   
▲ 심주일 목사
지금 나는 대한민국에 와 있다. 나의 아버지를 처형한 나라이고 나의 형이 싸우다 전사한 형님의 피가 스민 그 땅에 와 있다. 지금까지 나의 가족사항에 대해서는 기관에서 조사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서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시고, 하나님의 종으로 기름부어 주셨는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을 내 인생의 목표로 정한 이상 나의 가족사를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피살되고 형님이 전사했기에 유공자라는 배경으로 1953년 노동당에 입당하셨다. 사실 그때 어머니가 문맹을 완전히 퇴치한 상태라면 노동당의 여성간부까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밤마다 성인학교에 나오라는 요청도 거절하고 그저 협동조합에서 부지런히 일해 거기서 나오는 분배 몫으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셨다. 순진하셨는지, 아니면 세상 물정을 모르셨는지 어머니는 변화하는 현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촌부로 평생을 보내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가 눈치가 부족하고 순진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어디서 들으셨는지 “선하게 살면 천국에 가고, 악하게 살면 지옥에 간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래서 난 어떻게든 악하지 않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나의 꿈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피살되고 형님이 전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막연하게나마 군인이 좋아보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오면서 혼자서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는 연습, 각개 약진하는 모습 등을 얼마나 연습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장교가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것은 내가 8~9세 무렵 가졌던 나의 희망사항이자 꿈이었다. 이후 내가 북한군에서 30년간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게 된 데에는 이런 꿈과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확신한다. 만일 내가 군인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남한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내 희망을 확정시켜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고 감사드린다.(계속)

심주일 목사의 ‘탈북 일기’는 책 ‘멈출 수 없는 소명’(토기장이)에 나온 내용을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요약, 연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심주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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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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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phzibah 2012-01-26 15:23:55

    나의 아버지는 해방 전에는 거지로 노숙하다가 딸이 셋인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둘째 딸이었던 어머니와 가정을 이루셨다. 빈농으로 소작살이를 하던 집이었기 때문에 해방 후 북한 노동당의 계층별 계급평가에서 당연히 기본계급으로 인정되었고 따라서 나는 기본계급의 가정에서 출생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무산자로서 해방 후 노동당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며
    ...자본주의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군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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