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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변화보고서] 한번 뿐인 인생, ‘효율적’으로 쓴다
김세진 기자 | 승인 2018.05.31 11:05|(206호)
한국 노동생산성 OECD 최하위권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각광
신세계의 실험, ‘저녁과 성과가 있는 삶’
최저임금 인상 전에 근무시간 업무효율부터 높여야
 
공동 육아가 일상화 되면서 한국사회에 일과 가정의 양립을 추구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개발도상국처럼 7% 경제 성장 하는 시대는 끝났다. 한국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서 중진국 이상의 반열에 올랐다. 우리는 이제 삶의 ‘질적 성장’이라는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할 때다.
이번 5월호에서는 사회적 트렌드로 자리 잡은 “워라밸(Work Life Balance)” 키워드를 통해 한국의 노동생산성에 대한 논의와 함께 한국 사회에 불고 있는 인식 변화를 조망한다.
 
글 · 김세진 기자 / 사진&그래픽 · 연합뉴스 제공
 
우린 사람을 만나면 ‘나 때는…’으로 시작하여 고생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그랬다. 우린 그때 무진장 고생했다. 성공하기 위해 잠도 안자고 얼마나 달려왔던가. 이들 덕분에 한국은 세계 경제 규모 10위권에 드는 부국이 되었다. 아 대한민국! 나 자신을 희생하면서 성공에 매달려야 했던 한국인은 이제 나를 일궈주는 나라를 꿈꾸게 되었다.

한국은 부유, 하지만 업무 효율성은 꼴찌
 
데이터 출처 한국경제연구원
 
지난 20여 년간 한국의 국내총생산(명목 GDP, OECD 기준)은 1997년 7,076억 달러에서 2016년 1조 8,320억 달러로 2.5배 이상 증가했다. 전체 경제규모 순위도 ’16년 OECD 35개 회원국 중 9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한국 노동시장의 양적·질적 노동지표들은 실업률을 제외하고 OECD 평균 수준을 밑돌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발표한 “한국 노동지표, 여전히 외환위기 수준”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여전히 OECD 평균의 68% 수준에 불과하며 증가율도 97년(6.3%)이후 지속적으로 둔화되고 있다. 연간 평균임금은 97년 25,638달러에서 2016년 32,399달러로 증가했으나 여전히 OECD 평균(’16년, 39,765달러)에 미치지 못해 한 단계(23위→24위) 하락했다. 우리나라 근로자의 연간 근로시간은 길기로 악명 높다. OECD 평균보다 300시간 이상을 초과한다. 2016년에는 31위를 기록했다.

이렇게 오래 일하는데 정작 한국 근로자가 시간당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33.1달러(2016년)로, OECD 평균(47.1달러)에도 한참 못 미치는 거의 꼴찌 수준이다. 생산성이 가장 높은 아일랜드(83.2달러)의 절반도 안 되는 수치다. 똑똑하게 일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은 업무 성과에 비해 노동시간이 지나치게 길다. 이 비효율은 장시간 회사에 머무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여기는 근로문화에서 기인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근로시간 단축이 노동생산성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주 40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제조업의 노동생산성이 1.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워라밸은 효율적 성장의 대안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박지언씨(가명, 34세)는 매일 회사와 약속한 오후 6시가 지나도 퇴근을 못한다. 그날 계획된 일을 다 했지만 상사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박씨는 점심시간에 천천히 복귀하고 근무 시간에 딴짓을 하기로 했다. 일을 끝냈다 해도 어차피 야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필요한 야근을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여기는 근로 문화는 한국 사회의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주효한 요인이 되었다.
 
이런 비효율적 업무 행태가 만연한 시스템에 대항하여 민간에서 먼저 ‘워라밸(Work Life Balance)’이 등장했다. 워라밸은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한다. 이제 사람들은 일이 전부가 아니라 취미, 가족과의 저녁 등 내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을 이제라도 적극적으로 사용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먹고 살려면 일은 해야 하고 승진도 해야 한다. 성공과 내 삶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시간을 정해놓고 업무를 완벽하게 끝내는 것이다. 약속된 시간 안에 집중해서 업무를 끝낸다. 완료하면 회사 밖으로 나가 내 삶을 산다. 당연한 얘기인 것 같지만 이때까지 대부분의 직장은 그렇지 않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맥킨지와 함께 2016년 100개 기업 4만여 명을 대상으로 회사 문화를 진단했을 당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것은 ‘불필요한 야근’이었다. 응답자 43%가 주 3일 이상 야근을 하는 등, 평균 2.3일 야근을 하며 하루 평균 11시간이나 회사에서 보내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중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시간은 5시간 32분에 불과했다. 더욱 심각한 건 야근을 많이 할수록 오히려 생산적 업무 시간이 줄어드는 '야근의 역설'이 확인됐다는 점이다.

강혜진 맥킨지 한국사무소 파트너(조직문화 담당)는 "젊은 세대의 삶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에 지금 같은 야근 문화를 그대로 두면 기업이 우수한 인재를 구할 수 없다"며 "더 이상 야근을 강요할 수 없는 만큼 효율을 높여 근무시간 감축에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업무방식이 변하지 않은 채 야근하지 말고 퇴근하라는 말만 해서는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OECD는 구조개혁 평가보고서(Going for Growth)에서 한국은 짧은 기간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끌어올렸지만, 근로시간은 회원국 중 가장 길고 생산성은 최고 선진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라고 지적했다

신세계, 대기업 최초 5시 강제퇴근 실험 시작

“사원 여러분, 퇴근하십시오”

지난 1월 4일 서울 성수동 이마트 본사. 오후 5시가 되자 퇴근을 독려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사무실의 개인 PC 모니터 한쪽에 '30분 이후 꺼집니다'라는 안내문과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오전 9시 시작한 이날 근무시간의 끝을 알리는 신호다. 직원들은 하나둘씩 컴퓨터를 끄고 짐을 챙겨 퇴근에 나섰다. 사무실에 남아봐야 PC가 오후 5시30분이면 강제로 꺼져 다음날 오전 6시까지는 다시 켜지지 않아 어차피 업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무실뿐만이 아니다. 출장으로 한국을 비우는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성수동 이마트 본사로 출근하는 정용진 부회장을 비롯해 이마트의 사무직 2000여 명의 컴퓨터가 예외 없이 일제히 셧다운 된다. 부서장의 사전 승인 없이는 심지어 해외 출장자가 들고나간 노트북까지 한국 근무시간에 맞춰 자동으로 꺼질 정도다.

지난해 12월 초 신세계그룹 정용진 회장은 ‘대기업 최초 주 35시간 근무제 시행’을 선언했다. 2018년 첫날부터 하루 7시간 근무, 즉 출근 9시-퇴근 5시(9 to 5)가 그 골자다. 임금 하락도 없다.

관리를 위해 근로시간 단축 태스크포스(TF)를 상시 운영한다. 신세계프라퍼티는 5시 정시 퇴근 방송을 시행하고 이마트24는 퇴근 후 카카오톡 업무지시를 금지한다. 여성 임직원이 많은 신세계인터내셔널은 유연근무제를 적극 활용하고 9시를 넘기는 과도한 회식도 금지다.

부서원의 칼퇴근은 올 들어 바뀐 부서장 평가항목 중 하나다. 부원이 특별한 사유 없이 야근을 자주 하면 부서장에게 일단 경고장부터 보낸다. 경고를 받거나 나쁜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임원과 부서장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퇴근을 독려할 수밖에 없다.

신세계 직원 5시 퇴근 전에 성과내야, 업무집중↑

당장 신세계 직원들은 워라밸이 가능해졌다. 칼퇴근이 가능하니 가족, 아이와 저녁식사를 갖거나 외국어, 운동 등 자기계발을 할 수 있다.

눈에 띄는 변화는 회사 업무효율이다. 사무실과 가까운 구내식당은 새해 들어 전에 볼 수 없던 긴 줄이 연일 생긴다. 주35시간 시행 전과 마찬가지로 점심시간은 지금도 1시간이 보장돼 있지만 자발적으로 식사 시간을 줄여 서둘러 근무에 복귀하는 사람이 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남곤 신세계 그룹홍보팀 치프파트너(부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시행한지 얼마 안 돼 통계를 낼 수는 없지만 가보면 (구내식당)줄이 엄청 길어 이용자가 늘어난 게 확연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입사 7년차인 장정우 가공식품 바이어(대리)는 "오후 5시에 퇴근하려면 무조건 시간 안에 일을 마쳐야 한다는 생각에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일체 딴짓 안하고 업무에만 집중 한다"고 말했다. 또 "개인 업무 뿐 아니라 회의도 체감할 만큼 타이트해졌다"고 덧붙였다. 쓸데없는 취합 보고서가 없어진 건 물론이요, 보고서로 대체할 수 있는 미팅은 아예 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세계의 한 임원 역시 "미팅 뿐 아니라 모든 일정이 어찌나 촘촘한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전에는 월요일 출근 후 첫 회의는 으례 '주말에 뭐 했는지' 묻는 걸로 시작해 정작 심도 있는 결론은 못 내린 채 회의용 보고서 뒤적이다 끝나기 일쑤였다"며 "어떤 날은 어영부영 점심시간이 되면 느긋하게 커피까지 한 잔 하고 들어와 몇 시간 일하고, 또 그러다보면 어차피 일찍 퇴근 못하니 저녁이나 먹고 들어와 야근이나 하자라는 흐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솔직히 있었는데 이젠 아무도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없다"고 말했다.

당초 신세계는 근로시간 감축정책 시행했을 때의 생산성 위축을 우려해 ‘집중근무시간’제도를 신설했었다. 오전과 오후 하루 2 차례 2시간 씩 시행되는 집중근무시간에는 흡연실 문까지 잠글 정도로 근무에 집중하게 한다. 하지만 막상 퇴근시간이 1시간 당겨지자 굳이 집중근무시간이 아니어도 직원들의 업무집중도가 높아졌다. 5시면 회사에서 퇴근하라고 채근하니 근무시간 전에 성과를 내려고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일을 한다.
 
유환익 한국경제연구원 정책본부장은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97년 이후 증가율이 둔화되고 있는 노동생산성 수준을 제고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하며, “특히 미국과 일본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서비스산업의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각종 규제 완화 등의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워라밸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려면 성공의 관건은 단순히 근로시간을 줄이는 게 아니라 어떻게 생산성을 높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과거 여러 기업이 퇴근을 독려하며 야근 줄이기에 나섰지만 실패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세계는 그룹 본사와 주요 계열사 인사팀이 주축이 돼

지난 2년 동안 가동해온 '근로시간 단축 TF'는 이런 문제의식 아래 업무의 중요도와 빈도를 리스트업해 하위에 있는 건 자동화하고, 구조적 문제는 바꾸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할 방침이다. 그중 하나가 임원 일정을 인트라넷에 공개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해 보고에 낭비하는 시간을 없애는 것이다. 이외에 매장에선 물류 시스템 개선으로 효율을 높여나가고 있다.

배광수 이마트 인재개발팀장(부장)은 "업무 효율화와 생산성 높이기가 이번 근무시간 단축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김재곤 홍보담당 상무도 "일을 줄이는 게 아니라 압축적으로 일하라는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그 방향으로 갈 게 분명하다면 빨리 가는 게 옳다는 판단에 근로시간을 줄였다"고 말했다. 신세계의 워라밸 실험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휴일 1일 늘어날수록 내수소비↑ 고용효과↑

휴일의 경제적 효과는 지난 박근혜 정부 시절 대체 휴일 도입 당시 연구로 살펴볼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휴일 지출예상액은 평균 33만8000원으로 국내관광, 문화활동, 자기개발, 쇼핑 등 산업 전반에 지출하는 비용이다. 민간소비지출 증대로 인한 총생산유발효과는 하루 7조4228억원에 이르며, 고용증대효과는 4만8561명으로 집계된다. 노동생산성 향상으로 총생산유발효과는 6조 2483억 원이며, 이로 인한 사회적 편익은 2조 4694억 원이다. 이를 모두 합친 총 편익은 16조1405억 원에 이른다.

이성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은 "2004년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됐을 때 월평균 2만원의 가계지출 증대 효과가 있었다"며 "하루를 쉬게 되면 관광 뿐 아니라 운동, 공부, 쇼핑 등 다양한 외부활동을 하게 됨으로써 지출이 대폭 늘어난다"고 말했다.
 
저성장 저출산 시대의 해법으로 '일과 삶의 균형'을 통한 노동생산성 강화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일 할 땐 하고, 쉴 땐 쉬자” 4만 달러 달성하려면 생산성 개선은 필요조건

한국은 질적 성장 추진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미 경제수준이 선진국 가까운 반열에 올라 있어 무조건적인 생산량 증가보다 생산성 향상을 통한 경제성장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전 국민이 염원하는 4만 달러 달성을 위해서라도 우선 점점 낮아지고 있는 잠재성장률을 제고하고, 대내외적 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경제발전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즉 단기적인 경기부양보다는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경제의 구조적 문제 개선, 신성장 동력 연구 등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4만 달러 시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내·외수 균형 성장, 고용률, 과학기술 경쟁력, 사회적 자본 부문과 함께 핵심적으로 개선돼야 할 요소로 지적된다. 지속적 경제 발전을 위해서 신세계에서 시작하는 실험처럼 일할 땐 일하고 쉴 땐 쉬는 효율적인 삶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세진 기자  tianmimi9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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