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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보] 정당성과 대표성을 가진 국회가 ‘숙의’해야)숙의민주주의, 갈등 해법의 새로운 대안으로 볼 수 있는가 4
정경NEWS | 승인 2017.12.28 16:37|(205호)

이영조 교수 / 경희대 국제대학원

숙의민주주의(熟議民主主義)라는 생소한 용어가 갑작스럽게 한국 민주주의 의 새로운 만트라(mantra: 眞言)로 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과 뒤이은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의 신고리 5·6호기 원전공사 중단 결정으로 빚어진 논란이 마침내 공론화위원회의 공사 재개 권고로 막을 내린 게 그 계기였다.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이 있자마자 거의 모든 언론이 일제히 ‘숙의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첫 실험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공론화의 방법을 두고 “새로운 갈등해결 모델”, “역사적 첫걸음” 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민참여단에 대해서는 “471인의 현자(賢者)”, “작은 대한민국”이란 평가를 내렸다.
숙의의 사전적 의미는 ‘깊이 생각하여 넉넉히 의논함’이다. 숙의민주주의란 그런 숙의가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형식이다. 제임스 피시킨, 조슈아 코헨, 존 엘스터 등 소수의 외국 정치학자들이 주장하는 ‘deliberativedemocracy’의 번역어이다. 피시킨 등은 숙의가 널리 공유된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을 키우고 이질적인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유대를 증진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이런 이상론과는 달리 숙의가 갈등을 좁히기보다는 확대시키고 수사(修辭)에 능숙한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비판의 목소리도 거세다.
정치학계 일각에서도 구미 학자들을 차용해 심각한 갈등을 빚는 사회적 쟁점에 대해 하나의 대안적인 해결방안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기도 했다. 이처럼 기껏해야 하나의 가능한 보완책에 불과했던 숙의민주주의가 이제 직접민주주의의 현실적 방안 혹은 참여형 민주주의의 전범으로 지위가 격상된 듯하다.
 
직접민주주의는 선동정치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어
그런데 숙의를 활용하더라도 민주적이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들이 있다. 숙의민주주의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이 정당성과 대표성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도 숙의의 절차에 대한 광범한 사전 합의가 있어야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민주주의의 요체가 “결정되지 않은 결과에 대한 동의”라고 설파한다. 이 동의의 전제는 당연히 정당한 절차다.
일단 쟁점이 불거지면 이미 입장이 갈리고 굳어지기 때문에, 절차에 대한 합의는 쟁점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존 롤스의 표현을 빌리면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뒤에서, 미리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투표(ballot)가 총알(bullet)을 대체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전에 절차가 정해지고 그 절차에 따른 결과를 수용한다는 합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숙의민주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숙의의 대상이 되는 쟁점은 물론이고 대상 쟁점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한 숙의 절차에 대한 합의가 있고 이 절차에 따라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당사자들이 이를 수용하기로 할 때만 의미가 있다. 이번 공론화 과정에서도 나타났듯이, 숙의는 당초 어정쩡한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 한쪽의 입장을 지지케 함으로써 의견을 양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합의할 절차 가운데는 당연히 숙의에 참여하는 시민의 범위와 선택 방법도 포함되어야 한다. 정당한 절차를 통해 선출된 의원들이 이미 존재하는 마당에 새로운 시민의 대표를 뽑아 숙의를 하려면 이들이 모집단인 시민전체의 뜻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공론화위원회의 숙의는 온전한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쟁점이 부각되기 이전에 절차가 마련된 것도 아니었고 결론도 광범한 합의보다는 다수결에 진배없었다.
확실히 숙의민주주의는 시험해 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숙의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거나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지나친 생각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의제야말로 숙의를 위한 제도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원형은 로마 공화정이다. 왕정을 폐지한 로마인들이 원로원이라는 대의제를 채택한 것은 직접민주주의가 선동정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관심도 없고 ‘합리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을 끌어모으면 위험은 더욱 커진다. 고대 아테네가 그랬다. 시민들이 민회에 나오지 않자 페인트를 묻힌 줄을 사용해 시민들을 아크로폴리스로 몰아갔다. 하지만 이렇게 마지못해 끌려나온 시민들은 말재주와 선동에 휘둘렸고 마침내 민주정치는 중우정치로 타락했다. 로마인들이 대의제를 채택한 것은 선동정치를 막고 조금이라도 더 정치에 대한 관심과 지식 그리고 능력을 갖춘 사람들로 하여금 숙의를 하라는 뜻이었다.
이론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유권자는 투표만 하고 다음 선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최소주의적 민주주의관을 피력한 것도, 비제도화된 참여의 폭발로 많은 혼란을 경험한 프랑스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만 그 주권은 국민의 대표를 통해서만 행사할 수 있다고 헌법에 못 박은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가 일정 규모 이상의 정체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차악의 제도가 결코 아니다. 그 자체로 장점이 있는 제도이다. 숙의가 필요하다면 정당한 절차에 의해 선출된 국민의 대표인 의원들부터 시작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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