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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에서 19대 광화문 대통령으로거제의 가난했던 소년, ‘운명’ 딛고 새 대한민국을 열다
박찬호 기자 | 승인 2017.06.20 17:47|(203호)
취임 선서하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제19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문재인 당선인이 재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2년 대선출마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이번 대선에서 재도전을 통해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정농단 사태로 촉발된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촛불집회 등을 거치며 ‘나라를 나라답게’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문 당선인. 원리 원칙에 충실하며 합리적으로 중심으로 삶을 살아온 문재인 대통령. 그동안 그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본다.

소년 문재인
제19대 대통령 문재인은 1953년 1월 24일 경상남도 거제군 명진리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을 피해 남으로 자유를 찾아 온 부모가 처음 정착한 곳이다. 이후 문재인 가족은 북한 출신 피란민이 많이 살던 부산 영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영도는 고갈산 아래 산복도로를 중심으로비탈진 언덕에 얼기설기 판잣집이 들어선 대표적 서민 달동네였다. 문재인은 일곱 살 때 사라호 태풍으로 판잣집 지붕이 날아가 뻥 뚫린 하늘을 올려다보던 당시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피란민 문재인 가족에게 가난은 천형과 같았다. 끼니를걱정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시절, 예닐곱 살 문재인은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신선동 성당에서 나눠 주던 구호물자를 받으려 긴 줄을 서야 했다. 아버지가 호남 이곳저곳으로 장사를 나서면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연탄을 배달했다. 어머니가 힘겹게 끄는 연탄리어카를 뒤에서 미는 일은 장남 문재인의 몫이었다. 좁고 가파른 신선동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숨이 목까지 차오르고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언젠가 삐끗 놓친 리어카가 비탈길 아래로 굴러떨어진 아찔한 사고도 있었다. 자신의 안전보다 깨진 연탄이 안타까워 발을 구르던 어머니의 모습을 문재인은 아직도서러운 기억으로 갖고 있다.
누구보다 가난했지만 소년 문재인은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서민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그의 말은 결코 가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년 문재인에게 가난은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채찍이 됐다. 독서와 청소년시절 문재인은 당시 부산 최고의 명문이었던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경남중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빈부의 격차를 겪게 된다.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 모여 살던 초등학교와는 달리 부유층 자제들이 많이 다니던 경남중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문재인은 태어나 처음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주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깨닫게 된다.
방황하는 사춘기 시절 문재인은 독서에 빠져들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지식에 갈증 난 소년은 늘 책이 모자랐다. 학교도서관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책을 읽었다. 사서를 도와 도서실 정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마치 일과처럼 됐다. 소설에서 시작된 책 읽기는 차차 영역을 넓혀 ‘사상계’ 같은 사회비평 잡지에 이르렀다. 명문 경남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지만 공부만 하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웠다. 싸움에 말려 친구들과 의리를 지키려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고교시절 처음 이름 때문에 붙은 ‘문제아’라는 별명이 나중에는 실제가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성적은 늘 좋은 편이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와 담임의 뜻대로 서울대 상대에 응시했고 낙방하고 말았다. 이후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학교 법학과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문재인의 대학시절
문재인이 대학에 입학한 다음 해인 1973년 유신 반대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대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해 문재인은 유신 반대 학내 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돼 구류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이듬해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한다. 문재인은 다음 날 사법살인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끝내 구속되고 만다. 그리고 1975년 석방되자마자 징집신체검사와 입영통지서를 받고 강제징집 당한다.
창원 39사단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문재인은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됐다. 당시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여단장 전두환 준장, 대대장 장세동 중령이었다. 이후 12·12 신군부 쿠데타 때 참군인과 반란군으로 갈려 정 사령관은 반란군 총탄에 맞고 이후 강제 예편돼 비극적 삶을 마감한다. 반란군의 전두환은 5·18 광주항쟁 이후 군사독재를 이어간다.
문재인은 군생활 경험이 이후 삶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술회한다. 생전 처음 겪는 일들도 도전정신으로 하다보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군생활의 경험은 문재인을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줬다.
민주화운동과 함께 했던 청년시절 1978년 2월, 31개월 만기 제대한 문재인이 맞닥뜨린 현실은 암담함 그 자체였다. 복학의 길은 막혔고, 대학졸업장없이는 취직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고졸로 살아도 좋다는 심정이었지만 평생 고생해 오신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사망은 문재인을 사법고시의 길로 이끌었다. 장남으로서의 책임감과 뒤늦게나마 아버지께 한 번이라도 잘 되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49재를 마친 다음 날 문재인은 전라남도 해남대흥사로 들어가 고시공부에 매달린다. 짧은 기간이었지만치열하게 공부한 끝에 1979년 초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다.
1980년 학교로 돌아온 문재인은 복학생 대표로 ‘서울의 봄’ 한가운데에 선다. 대규모 시위가 연일 이어졌고 문재인은 거침없이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고시공부는 뒤로 밀렸지만 아쉽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그동안 준비한 공부가 아까워 1980년 4월 학내 시위 와중에 2차 시험을 치렀다. 최선을 다했지만 다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경험을 쌓아두자는 생각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대학3학년 때 '법의 축전'이란 이름의 법대 축제에서 만난 아내와 동료와 촬영한 모습

1980년 5·17 확대 계엄 조치가 발동되면서 경희대 운동권 핵심이었던 문재인은 또다시 구속된다. 이후 5·18 광주 항쟁을 앞두고 수많은 학생, 민주인사들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즉결 회부됐다. 이때 문재인은 5월 15일 서울역 앞 시위에서 발생한 경찰 사망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느라 군사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채 미결수로 남아 있었다. 그때 경찰서 유치장에서 문재인은 2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는다. 당시 경찰서장은축하 차 면회를 온 학생처장과 법대 동창회장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보내 조촐한 소주 파티를 열 수 있게 해 줬다.

변호사 시절-노무현과 운명적 만남
문재인의 사법연수원 시절은 평탄했다.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연수원 차석으로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임용에서 탈락한다. 문재인보다 훨씬 성적이 낮은 동기들이 판사로 임명된 것을 보면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문재인은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국내 최대 대형 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파격적인 보수에 특전이 따르는 조건이었지만 이 모든 제안을 뿌리치고 고향 부산으로 내려갔다.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는 변호인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귀향으로 마침내 노무현 변호사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노무현과 문재인. 처음에는 동업자로 만났지만 둘의 관계는 일을 넘어 서로에게 삶의 동반자로 변해 갔다. ‘깨끗한 변호사’가 되기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선후배로 또는 친구처럼 함께 일하며 신뢰를 쌓았다. 각종 인권, 시국, 노동사건을 기꺼이 맡다 보니 자연스레 두 사람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두 사람의 법률사무소는 부산은 물론 인근 울산·창원·거제 등을 망라하는 지역 노동인권사건을 총괄하는 센터처럼 됐다. 그러다 보니 재야운동에까지 깊숙이 발을들여놓게 됐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를 창립하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부산 국본)를 만들어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문재인은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한 6월 항쟁의 기억을 살아온 동안 가장 보람찬 일이었다고 「운명」에서 술회했다. 참여정부 시절 참여정부가 시작되면서 문재인은 민정수석 두 차례와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재임했다. 참여정부 출범과 마감까지 문재인이 맡은 것이다. 문재인의 청와대 시절은 누구보다 대쪽 같았다. 고위 공직자의 관행이었던 특혜를 철저하게 내려놓았다. 업무시간 외엔 직접 차를 몰았고 방이 따로 없는 대중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비행기나 기차는 늘 일반석을 이용했다. 그리고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국정 전반을 보좌하다 보니 늘 격무에 시달렸다. 청와대 생활 1년을 지내는 동안 과로로 인해 무려 10개의 이가 빠질 정도였다.
과로로 건강이 상한 문재인은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훌쩍 히말라야로 트레킹을 떠났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못했다.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곧장 귀국해 법적 대응 전반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후 탄핵 재판이 끝나자 다시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해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2007년 3월 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다. 문재인은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이 돼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킨다. 이와 함께 한미 FTA라는 국가 중대 협약이 체결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국정 전반에 걸쳐풍부하게 축적된 경험은 다양한 정책 조율 감각과 국정 운영에 대한 균형감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2007년 5월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문재인 대통령

정치 입문과 대선 도전
문재인은 2012년 4월 부산 사상구에서 총선에 출마했다. 정치신인이 부산에서 출마해 당선되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문재인은 노무현이 걸었던 길처럼 좁은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민주당의 가치를 지키며 민주당을 정면에 내세워 부산에서 당선됐다.
총선 승리 두 달 후 문재인은 마침내 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정치신인으로 현실정치인이 된 지 두 달 만에 정치인 최고의 목표 대통령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100만 국민이 참여한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정치신인 문재인이 13번 모두 1등을 차지하며 대통령후보가 된다. 이후 안철수 후보와 어렵게 단일화에 이뤄내고 심상정 후보와 단일화하면서 야권 단일후보가 됐다. 문재인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소임을 정권교체, 정치교체, 시대교체 3가지 교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18대 대선 결과, 득표수 1천469만표, 득표율 48.02%로 아쉽게 정권교체에 실패한다. 문재인이 득표한 1천400여만표, 득표율 48%는 야권 대선후보 역대 최고의 득표수, 득표율이었다. 대선패배와 새로운 정치의 시작 - 당대표 시절 대선 패배 이후, 문재인은 깊은 반성과 성찰, 그리고 침잠(沈潛)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시대는 문재인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2014년 12월 29일 문재인은 당대표 출마선언을 한다. 당을혁신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총선은 물론이며 다음 정권교체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에서다. 문재인은 당을 살리고 국민을 살리겠다는 다짐하며 출사표를 던졌다. 여의도 정치에 익숙한 대부분이 당대표 출마를 만류했다. 당대표 자리는
실익보다 위험이 더 많은 정치적 무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칫 실패하면 정치적으로 사망선고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문재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야권기득권에 안주한 당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누가 대선후보가 된다고 해도 정권교체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독배가 될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당을 혁신해야 했다.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의 뜨거운 염원을 실천해야 한다고 믿었다. 마침내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가 된다.

대통령 출마
촛불혁명은 박근혜 정권을 침몰시켰다. 불의한 권력과 낡은 권위에 맞선 국민의 도구는 단 한 자루의 촛불이었다. 정권교체 적폐청산의 뜨거운 여망을 현실로 만드는 일은 결국 정치의 몫이다. 문재인은 자신을 국민의 도구로 써달라고 간청한다.
문재인은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을 혼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아무리 좋은 선의도 혼자하면 독선이 된다며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바라는 온 국민의 뜻을 모아 정의로운 통합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촛불집회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3월 4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박근헤 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로 열린 '19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선 후보 선출과 19대 대통령 당선
문재인은 2017년 4월 3일 더불어민주당 공식 대선후보로 선출된다. 이로써 2012년에 이어 대선 ‘재도전 티켓’을 다시 거머쥐며 운명을 넘어 숙명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2012년 당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림자에 가려졌지만 4·13총선승리,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태 등을 거치면서 더욱 강해졌다. 지난달 17일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
되자 그는 ‘촛불 민심’을 동력으로 삼아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한 때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로부터 추격을 받긴했지만 선거가 임박하면서 지지율은 40% 안팎으로까지 치솟았다. 문재인은 다자 대결 구도 속에서도 ‘대세론’을 유지하며 마침내 19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박찬호 기자  chanho227@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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